사자의 첫걸음

2025.10.25 11:58

성민희 조회 수:41

사자의 첫걸음

 

햇살이 마지막 온기를 남기고 서서히 지붕 위에서 사라지는 시간. 난데없이 아들의 메시지가 왔다. “엄마, 옛날에 내가 IQ 테스트한 기록 가지고 있나요?” 웬 뜬금없는 질문인가 싶었는데 또 메시지가 왔다. 혹시 나 키울 때 내게 부족한 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나요? 불쑥 들어오는 말에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이 순간 멈칫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아이들이 어릴 때는 마음에 상처가 될 말은 안 하려고 조심 했지만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마음 놓고 험담을 좀 늘어놓아 볼까? 하는 장난스러운 충동도 일었다.

  그래도 우선은 칭찬으로 시작해야지. 메시지를 보냈다. 별로 기억나는 건 없는데. 말은 참 잘했어. 어떤 모임에서든 네가 나타나기만 하면 무거운 분위기가 금세 화기애애해졌어. 선생님도 화가 난 상태였지만 네 한마디에 웃음보가 터졌다는 말도 전해 들었어. 너는 머리도 참 좋아서. 아들 키우던 시절을 생각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막 흥이 돋으려는데 또 메시지가 들어왔다. “엄마! 그런 칭찬 말고 나의 약점을 말해달란 말이야.”

아들은 앞으로 자신을 어떻게 다듬어 가야 하나. 사업 동료나 결혼 상대자로 어떤 사람을 선택해야 자기의 불완전함과 조화를 이루며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타인의 시각에 비치는 자신과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자아의 차이를 비교해 보고 ''라는 존재를 더욱 정확하게 점검하려는 듯했다. 아차, 이 철없는 엄마를 어찌하나. 나는 소파에 기대었던 몸을 곧추세우고 핸드폰을 다잡았다.

너는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흥미로운 일은 밤을 새워서라도 하는 데 관심이 없거나 귀찮은 일은 마무리를 잘 안 했어. SAT 신청 접수도 마감일을 놓쳐서 밤에 롱비치 우체국까지 가서 부치고.” 등등... 아들은 맞아. 맞아. 이런 말 듣는 거 너무 재미있어. 엄마 생각나는 것 계속 올려줘. 라며 하하하 웃는 이모티콘까지 보내왔다. 나는 발동이 걸려버렸다. 그때의 심정이 되살아나며 마치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리듬을 타듯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마감일을 안 지켜 벌금을 내고, 밤중에 쫓아가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 어느 순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잠시 멈추나 했는데 어느새 나는 또 칭찬 버전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너는 몇 년 전, 샌프란시스코의 백인 동업자에게서 온 전화를 받고는 어두운 밤거리에 차를 몰고 바로 집을 나섰지. 그 먼 길을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즉각 옷 몇 가지만 챙겨서 말이야. 그걸 보고, 우리 아들은 게으름을 부릴 때도 있지만 해야 할 일에는 시간과 장소를 안 가리고 최선을 다하는구나 하고 대견해했어.”

나의 메시지를 읽은 아들이 말했다. 그래, 엄마. 나는 사자 유형의 사람이야. 사자는 에너지가 필요할 때는 엄청나게 쓰고 필요 없을 때는 그냥 쉬거든. “사자 유형의 사람?”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설명을 하려다 말고 한 남자가 마이크를 쥐고 있는 유튜브 영상을 보내주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인데 비즈니스도 잘할 뿐 아니라 생각도 아주 철학적이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영상 속 인물은 인도계 사업가 나발 라비칸트(Naval Ravikant)였다. 그는 2010년에 스타트업과 투자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인 엔젤리스트(AngelList)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사상가이기도 하다. 팟캐스트와 인터뷰, 에세이 형식의 전자책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일해야 할까?’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아들이 왜 이 영상을 좋아하는지 문득 이해가 되었다. ‘돈만으로는 진정한 행복을 살 수 없다는 그의 말이 마음에 닿았던 걸까. 예전엔 비지니스의 숫자와 성과에만 몰두하던 녀석이 요즘은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고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 시간을 사용하는 방식도 어딘가 달라졌다.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그려가는 삶의 방향과 행복을 찾고자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영상에서 나발은 말했다. “사람들은 세상이 선형적이라고 믿어요. 8시간 일하면 8시간만큼의 결과가 따라올 거라고. 하지만 실제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아요. 동네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도 당신이나 나보다 훨씬 열심히 일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그만큼의 결과를 얻고 있을까요?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일해도 삶은 제자리일 수 있고, 누군가는 단 한 번의 기회로 인생을 바꾸기도 하죠. 결국 중요한 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느냐보다 누구와, 어떻게 일하느냐예요. 지금 우리가 내는 결과는 단순히 시간에 비례하는 게 아니라, 일의 질과 올바른 방식에 따라 비선형적으로 달라져요.”

이 말을 듣는데 이상한 후회가 밀려왔다. , 나는 그 '열심히'라는 마법에 얼마나 오래 갇혀 있었던가. 땀방울이 곧 훈장이라 믿었던 우리 세대의 '열심히'는 얼마나 빛나는 가치였던가. 아침에 일어나 정해진 일을 하고 맡은 역할을 성실히 해내면 그것이 최선의 삶인 줄 알았던 나. 그 믿음은 너무나 견고해서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또 말했다. “일은 마치 사자 같아요. 당신과 나는 소처럼 하루 종일 풀 뜯는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사자처럼 사냥하고, 쉬고, 다시 사냥해야 하는 존재에 가까워요. 현대의 지식 노동자, 혹은 지적인 운동선수처럼 일하고 싶다면, 운동선수처럼 살아야 해요. , 열심히 훈련하고, 전력 질주하고, 휴식하고, 피드백을 받고, 다시 훈련하고, 다시 질주하고, 다시 쉰다이 반복의 사이클이 필요하죠. 인간은 기계처럼 일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자처럼 살아야 해요. 사자는 필요할 때 온 힘을 쏟아 사냥하고 그 외의 시간엔 조용히 쉬죠. 쉬는 건 게으름이 아니라 에너지를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뒤이어 '사자처럼 살아라'는 말에는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자는 어느 순간 번개처럼 몰입한다는데. 나는 마치 오래된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느리고 평온하게 매 순간을 숙제하듯이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반문을 해본다. '효율''성실'이라는 미덕 아래, 정작 나의 가슴을 뛰게 하는 나만의 호흡과 리듬은 잊힌 지 오래였다. 학교, 취업, 결혼, 은퇴. 그 견고한 메뉴판에 따라 정해진 답안의 길 위에서 누군가가 걸어간 그 발자국만 따라 걸었다. 소처럼 열심히 일하면서 성실하게 하루를 채우고 사회의 규칙에 맞춰 살아왔다. 오늘날 MZ세대가 추구하는 도전이나 파격은 곧 인생의 탈선이었다. 돌아보면 그 삶에 안정은 있었지만, 그 안정 속에서 오히려 나의 색깔은 흐려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새삼 나는 나에게 물어본다. ‘이렇게 살아온 너 삶에 만족하니?’

오늘을 살아가는 MZ세대 삶의 방식을 들여다본다. 그들은 효율보다 몰입을,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긴다. ‘을 분리하지 않는다. 일터에서의 내가 따로 있고 집에서의 내가 따로 있는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이 진심으로 몰입할 수 있는 일, 자신의 가치와 연결된 일을 하려고 애쓴다.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물음 없이 영위하는 삶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지속적인 고통을 감수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공을 좇지도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소진 시키지 않으면서도 창의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삶을 설계하려 한다. 그 변화는 곧 의 정의 자체를 바꾸는 혁명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의 정의는 기성세대와는 다르다. 우리는 그것이 이해되지 않아 마음 졸이고 MZ세대는 그런 시각으로 보는 우리를 불편해 한다.

  이제 나는 안다. 아들이 보내준 영상은 하나의 링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스스로 던지는 질문이었다.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설계해 가려는 조용한 사자의 첫걸음이었다. 그 걸음은 한 청년의 도전이자 낡은 궤도를 걷던 엄마의 마음에 작은 파장을 일으키는 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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