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5.11.05 19:44

실버타운 가는 친정엄마

조회 수 349 댓글 4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어놓고 나면 할 일이 부쩍 많아진다. 사무실 일이나 남편 식사 같은 일상의 일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놓고 싶어, 또 한국 지인들에게 줄 작은 선물이라도 준비할까 싶어 내내 동동거린다. 여기에 더해 평소 안 하던 일까지 꼭 해놓고 가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더 분주하다. 서랍장 정리가 그중 하나다. 눈에 보이는 거야 한 군데로 몰아 놓으면 되지만, 문제는 부엌 서랍장, 옷 서랍장, 책상 서랍장 등등.

보이지 않는 데가 은근히 켕긴다. 정리정돈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한국 갈 때마다 심각하게 각성하지만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뭉개버리고 만다. 그런 내가 친정집 정리해 주러 한국에 간다.

그 집은 추억 가득 담긴 나의 집이기도 하다. 우리 다섯 남매가 자라고, 결혼하고, 엄마.아버지의 환갑, 칠순, 팔순 잔치까지 했던 집. 안방 다락에는 미국 올 때 맡겨놓은 우리 살림살이도 한 귀퉁이 잘 차지하고 있는 내 마음의 집이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홀로 집을 지키는 엄마, 지난 겨울 계단에서 넘어져 한참을 병원 신세지더니 그렇게 미루던 실버타운행을 결정하셨다. 몇 해 전부터 권했지만 '짐 정리는 우짜노'라며 걱정이 늘어지길래 '내가 도와주러 나갈 테니 걱정 마세요' 라고 안심시켜 드렸는데 바로 그날이 온 것이다.

'힘들 낀데 뭐하러 오노?' 말씀은 그렇게 하면서도 엄청 좋아하신다. 내가 짐 정리해 준다고 했잖아, 생색 좀 냈더니 '버릴 것밖에 없어. 몸만 가는 거야' 라신다. 호되게 아프고 나서 마음 정리가 많이 된 것 같다. 엄마 음성이 어찌나 홀가분하게 느껴지던지, 내 마음이 다 시원해진다. 서랍장마다 가득 찬 우리집 살림도 다 버려지는 거구나, 소중하게 잘 사용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리하는데 워낙 소질이 없는 데다 짐을 어떻게 버리는지 한국 상황도 모르는 내가 무슨 도움이 될까만, 옛집에서 엄마와 마지막 시간을 보낸다는 데 의미를 두려고 한다. 엄마는 '내가 빨리 가야 너그들이 고생 안 할낀데 내가 짐이구나' 맨날 하시는 말씀 또 되풀이할 것이다. '왜 그런 생각 하세요. 엄마 존재 자체가 가치 있는 삶이라구요.' 나는 또 위로의 말을 건넬 것이다. 무엇보다 짐 정리 하면서 많은 추억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친정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될 것이다.

한국 간다니까 우리 네 자매 오랜만에 뻐근한 모임 좀 해야 하지 않냐, 강원도 여행이 어떠냐, 종로에 무슨 뷔페는 어떠냐, 완전히 딴 동네 이야기가 카톡방에서 오가고 있다. 한국 사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텐데 무슨 짐 정리? 자기들끼리 킥킥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암튼 나는 약속대로 짐 정리하러 간다고 공식 선언했다.

우리 결혼할 때만 해도 정정하셨던 양가 어른들, 이제 엄마 한 분 생존해 계신다. 한국 갈 일이 점점 뜸해지고 있다. 엄마 살아계시는 한국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살아 계심만으로 가치를 지니는 존재, 엄마 뵈러 한국 간다.

미주중앙일보 < 이 아침에> 2015.11.4

?
  • 김예년 2015.11.16 17:46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납니다
    4일 쓰신글이니...
    좋은 추억 많이 쌓고 오셨지요?
  • 오연희 2015.11.25 10:51

    아...예년님...
    제가 이글 쓰고 바로 한국 갔다가 어제 돌아왔어요.
    스케줄이 빡빡해서 지인들 만남 제대로 다 못하고 부랴부랴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엄마는 실버타운 적기에 잘 들어가셨구요.
    경치도 환경도 좋아 네 자매 모두 나도 늙어면 여기 오고 싶다고
    이구동성 입을 댔으니까요. 다음에 예년님 만나 주실라나?

    제 얼굴 잊어버리셨을텐데...우리 만났던 그때가 언제에요? 도대체...세월도..참..
    늘 건강하시고 사업번창하시구요.^^

  • 김예년 2015.12.06 20:18

    하는거 없는데 바뻐서 이제서 글 봤습니다

    죄송합니다.ㅎㅎ

    반나뵐때가 있겠죠,,,

  • 오연희 2015.12.07 10:37
    예정 날짜보다 늦게 엄마가 실버타운 입주하는 바람에
    지인들 만날 시간이 없어서 전화로 대신 했는데
    잠시 한국 나가사는 이웃 분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이런바보가 한국 전화번호를 물어보지 않은 거에요.
    상대는 눈빠지게 기다리고...엄청 섭섭해 하더라구요.
    가기 전에 전화번호 여쭤볼께요.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49 엄마의 자개장 4 오연희 2016.05.10 173
348 수필 공항에서 만나는 사람들 2 오연희 2016.05.10 166
347 수필 인터넷 건강정보 믿어야 하나 2 오연희 2016.03.29 215
346 수필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낙서' 오연희 2016.03.12 258
345 수필 우리는 어떤 '가면'을 쓰고 있을까 오연희 2016.02.13 191
344 수필 가뭄 끝나자 이제는 폭우 걱정 1 오연희 2016.01.29 174
343 수필 굿바이, 하이힐! file 오연희 2016.01.14 145
342 수필 새해 달력에 채워 넣을 말·말·말 오연희 2015.12.29 183
341 수필 냉장고 정리와 마음 청소 오연희 2015.12.11 375
340 수필 추억은 힘이 없다지만 2 오연희 2015.11.25 249
» 수필 실버타운 가는 친정엄마 4 오연희 2015.11.05 349
338 수필 독서, 다시 하는 인생공부 오연희 2015.10.21 183
337 수필 자매들 오연희 2015.10.08 149
336 수필 일회용품, 이렇게 써도 되나 2 오연희 2015.09.16 516
335 네가, 오네 오연희 2015.09.12 182
334 독을 품다 오연희 2015.08.29 264
333 수필 북한 억류 선교사를 위한 기도 편지 오연희 2015.08.21 309
332 수필 다람쥐와 새의 '가뭄 대처법' 오연희 2015.07.29 362
331 수필 따뜻한 이웃, 쌀쌀맞은 이웃 오연희 2015.07.11 216
330 하늘에서 왔어요 오연희 2015.07.07 9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1 Next
/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