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그 시절
2009.07.31 17:36
그리운 그 시절
김학
내가 삼계초등학교를 졸업한지 어언 53년. 어느덧 반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그리운 그 시절을 회상하면 나는 열 살 안팎의 어린이가 된다.
나는 요즘에도 역사 드라마를 보면 옛날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때 <단종애사>란 연극에서 단종 임금 역을 맡았던 기억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단종이 나오면 남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러기에 수양대군이 미워지고, 사육신이나 생육신이 고맙게 느껴진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갓 부임하신 한동기 선생님이 연극 연출을 맡으셨다. 아마츄어 배우인 우리들은 밤낮 없이 연습에 몰두했었다.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들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익혔다. 학예회가 막을 올리던 날, 무대 앞에는 많은 학부모들이 모여들었다. 연극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우레 같이 쏟아졌던 박수 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극에 출연했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그때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웃는다.
옛날엔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렸고, 날씨가 몹시 추웠었다. 교실에 난로를 피우려고 학생들이 장작을 한 지게씩 가져와야 했다. 그게 초등학교 시절의 교실 겨우살이 준비였다. 눈이 내리면 우리들은 운동장으로 몰려나가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며 좋아라 낄낄거렸다. 학교가 끝나거나 일요일이면 얼어붙은 논으로 달려가 손수 만든 썰매를 타며 즐겼다.
6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자유롭게 놀던 시간을 많이 빼앗겼다. 중학교 진학을 위하여 날마다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과외를 했기 때문이다. 이용운 선생님은 참 열심히 가르치셨다. 그 당시에는 6학년 담임을 맡게되면 누구나 열심히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명의 학생이 좋은 중학교에 합격하느냐가 그 선생님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열심히 과외를 시켰지만 돈을 받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헌신적인 무료봉사였다. 그때만 해도 삼계면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초를 살 돈도 없었다. 그래서 남포등을 밝히고 공부를 했었다. 그로 인해 언제나 콧속은 그을음으로 시꺼멓게 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초여름이면 보리 베기나 모심기를, 가을이면 벼 베기에 동원되기도 했는데 일이 끝나고 나면 몹시 허기졌었다. 누구나 너무 가난했던 탓으로 밥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하고 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쓰라린 기억도 지워지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은 그때의 그 상황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여름이면 해마다 운동장 가에 퇴비를 쌓아두었다. 학생들이 매일 등교를 하면서 풀을 한 짐씩 가지고 왔었다. 퇴비는 논밭의 밑거름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 퇴비는 농토의 산성화를 막아주고 풍년농사를 기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고사리 같은 어린이들도 놀려두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운동장엔 왜 그리도 잡초가 무성했던지. 방학이 끝나면 상급생들은 그 잡초를 뽑느라 땀을 뻘뻘 흘려야 했었다.
가을운동회는 삼계면민의 축제였다. 운동장 주변에 동네마다 텐트를 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응원을 하거나 음식을 나눠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때는 온 동네마다 남녀노소가 모두 참가했었다. 다시 보기 어려운 풍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하늘에 즐비하게 매달려있던 만국기의 펄럭이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난 6․25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고 어린이들은 저마다 부모를 따라 피난을 떠났었다. 추석 무렵 인민군이 물러갔다. 그 해엔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한 학년 올라갔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살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고, 따스한 인정 속에서 자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내가 오늘날 문학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덕이다.
누구나 고향이 있지만, 도시를 고향으로 둔 사람보다는 시골이 고향인 사람이 더 순수한 인간성을 갖기 마련이다. 그만큼 시골 사람은 때 묻지 않은 심성을 지닌다. 비록 몸은 고향을 떠났지만 삼계는 나의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요, 추억의 보물창고다. 나는 요즘도 고향이 그리우면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
김학
내가 삼계초등학교를 졸업한지 어언 53년. 어느덧 반백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그리운 그 시절을 회상하면 나는 열 살 안팎의 어린이가 된다.
나는 요즘에도 역사 드라마를 보면 옛날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5학년 학예회 때 <단종애사>란 연극에서 단종 임금 역을 맡았던 기억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단종이 나오면 남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그러기에 수양대군이 미워지고, 사육신이나 생육신이 고맙게 느껴진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갓 부임하신 한동기 선생님이 연극 연출을 맡으셨다. 아마츄어 배우인 우리들은 밤낮 없이 연습에 몰두했었다.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우리들은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열심히 대사를 외우고 연기를 익혔다. 학예회가 막을 올리던 날, 무대 앞에는 많은 학부모들이 모여들었다. 연극이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우레 같이 쏟아졌던 박수 소리는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극에 출연했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들을 만나면 그때의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리며 웃는다.
옛날엔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렸고, 날씨가 몹시 추웠었다. 교실에 난로를 피우려고 학생들이 장작을 한 지게씩 가져와야 했다. 그게 초등학교 시절의 교실 겨우살이 준비였다. 눈이 내리면 우리들은 운동장으로 몰려나가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들며 좋아라 낄낄거렸다. 학교가 끝나거나 일요일이면 얼어붙은 논으로 달려가 손수 만든 썰매를 타며 즐겼다.
6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자유롭게 놀던 시간을 많이 빼앗겼다. 중학교 진학을 위하여 날마다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과외를 했기 때문이다. 이용운 선생님은 참 열심히 가르치셨다. 그 당시에는 6학년 담임을 맡게되면 누구나 열심히 가르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명의 학생이 좋은 중학교에 합격하느냐가 그 선생님의 능력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열심히 과외를 시켰지만 돈을 받지는 않았다. 선생님의 헌신적인 무료봉사였다. 그때만 해도 삼계면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초를 살 돈도 없었다. 그래서 남포등을 밝히고 공부를 했었다. 그로 인해 언제나 콧속은 그을음으로 시꺼멓게 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초여름이면 보리 베기나 모심기를, 가을이면 벼 베기에 동원되기도 했는데 일이 끝나고 나면 몹시 허기졌었다. 누구나 너무 가난했던 탓으로 밥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하고 주린 배를 안고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쓰라린 기억도 지워지지 않는다. 요즘 아이들은 그때의 그 상황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여름이면 해마다 운동장 가에 퇴비를 쌓아두었다. 학생들이 매일 등교를 하면서 풀을 한 짐씩 가지고 왔었다. 퇴비는 논밭의 밑거름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 퇴비는 농토의 산성화를 막아주고 풍년농사를 기약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고사리 같은 어린이들도 놀려두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운동장엔 왜 그리도 잡초가 무성했던지. 방학이 끝나면 상급생들은 그 잡초를 뽑느라 땀을 뻘뻘 흘려야 했었다.
가을운동회는 삼계면민의 축제였다. 운동장 주변에 동네마다 텐트를 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응원을 하거나 음식을 나눠먹으며 즐거운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그때는 온 동네마다 남녀노소가 모두 참가했었다. 다시 보기 어려운 풍요롭고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하늘에 즐비하게 매달려있던 만국기의 펄럭이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들리는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난 6․25를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학교는 문을 닫아야 했고 어린이들은 저마다 부모를 따라 피난을 떠났었다. 추석 무렵 인민군이 물러갔다. 그 해엔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대로 한 학년 올라갔었다.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에서 자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살며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고, 따스한 인정 속에서 자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내가 오늘날 문학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덕이다.
누구나 고향이 있지만, 도시를 고향으로 둔 사람보다는 시골이 고향인 사람이 더 순수한 인간성을 갖기 마련이다. 그만큼 시골 사람은 때 묻지 않은 심성을 지닌다. 비록 몸은 고향을 떠났지만 삼계는 나의 영원한 마음의 안식처요, 추억의 보물창고다. 나는 요즘도 고향이 그리우면 초등학교 동창을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