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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2 14:06

건망증과 단순성-김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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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과 단순성                          


                                                                                             김태수          


  헬스클럽 2층에서 땀을 흠뻑 흘렸다. 아래층에서 서둘러 샤워를 끝냈다. 내려올 때 수건을 갖고 왔어야만 했다. 가게 문 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물기를 손바닥으로 훔쳐내고 그냥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자주 깜빡깜빡하는 나에게 “본인은 잘 몰라요. 옆에 있는 사람이 답답하고 고생한다니까요.”라고 말하곤 했던 집사람이 떠올랐다. 젖은 머리카락이 영하 20도의 기온을 녹이려 뻣뻣하게 버티기 시작했다. 요즘 내 모습이다.


  자주 잊어버리면 남들한테 모자라 다는 소리를 듣게 되기 마련이다. 바로 오늘처럼 추운 날씨에 고생하는 일도 잦다. 하지만 골치 아픈 걸 잊어버리게 되어 때로는 편하게 사는 행운을 만나기도 한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분을 삭일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어진다.


나는 기본 정보를 입력하지 않고 러닝머신 위를 걷는다. 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적당히 피곤함을 느끼면 됐지 이것저것 입력해서 열량소모, 심폐기능 등 따져보고 싶지 않다. 세상은 계산과 계획대로 짜임새 있게 살아야 현명하다는 소릴 듣는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바보처럼 살고 있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잊어버리는 일이 드물다. 문제는 모든 일이 좋을 수도 없고, 늘 집중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몰두하고 있는 일 외에는 자주 깜빡깜빡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산다고 건망증이 완전히 없어질 것 같지도 않다.


스마트 폰에 지인들의 전화번호는 물론 일정과 할 일을 메모해 둔다. 떠오르는 생각의 저장은 물론 가끔 습작도 스마트 폰으로 한다. 문자를 주고받고 이메일과 인터넷 검색을 한다. 주소만 입력하면 길 안내까지 친절하게 해준다. 모든 것이 손안에서 해결된다. 자주 잊어버리는 나에게 한때 스마트 폰은 최고의 친구이자 안내자였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이놈의 건망증 때문에 가끔 어딘가 두고 오거나 배터리 충전 시기를 잊어버린다. 진동과 벨 소리를 때와 곳에 따라 바꿔 놓는 일을 깜빡해서 실수할 때도 있고, 중요한 연락을 놓치기도 한다. 비싼 스마트 폰을 2년도 안 되어 3개나 잃어버렸다. 할 수 없이 이제는 꼭 필요할 때만 스마트 폰을 사용하는 멍청한 사람이 되었다.


 첫 직업이 화장품 회사 영업 담당이었다. 방문판매를 주로 할 때였다. 대리점과 영업소를 아침마다 돌아다니며 조회를 주관하고 판매를 독려한다. 계산기는 필수품이고 업소별 주요 영업 목표 수치도 머리에 담아야 한다. 화장품 회사에서 항공회사로 옮겼다. 복잡한 영업 실적의 희비가 엇갈릴 필요 없이, 비행기를 타면 근무가 시작되고 내리면 끝났다. 처음엔 단순해서 좋았던 일이 차츰 고공을 장시간 나는 일이 녹록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더구나 비행 근무가 없는 날 쉬는 게 아까워 공부를 더 하려는 욕심에 학업까지 병행했다.

                               

 미국에 이민 왔다. 낯설고, 물설고, 사람 설고, 말 설고, 돈 설은 초기 이민생활은 정신이 없었다. 두 잡 세 잡을 뛰며 바쁘게 산 만큼 차차 익숙해지며 안정을 찾아갔다. 어느새 머리는 희어지고 50을 훌쩍 넘어버렸다. 익숙해짐에 따라 건망증도 슬그머니 자리를 잡아 황당하게 만든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서 건망증을 불러온 면도 있겠지만, 오히려 남보다 더 잘 해보려는 마음, 앞서가려는 마음, 빨리 이루려는 마음이 건망증을 불러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건망증과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삶을 되돌아볼 겸 취미 삼아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왕 시작한 마당에 남들처럼 등단도 해 보고 싶고 문학상도 받고 싶어, 공모전에 응모해서 신인상과 문학상도 받았다. 욕심은 기대를 낳고 기대는 실망을 낳는다고 했던가? 꼭 되려고 했던 문학상 공모전은 번번이 낙방했고, 그냥 한 번 보내 본 응모작 들은 당선되었다. 욕심 부린 응모작은 심사위원들이 용케도 알아보는 것 같다. 무심으로 글을 쓰면서 단순하게 살면 건망증도 그에 비례하여 줄어들 것 같다. 뭔가 이루려는 마음에 비례하여 건망증도 암세포처럼 번지는 것은 아닐까?


   느긋함과 여유로움은 내 마음가짐에서 오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생존 경쟁의 사회에서 조금씩 비켜서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는 뒷전으로 밀려도, 더디다고 핀잔을 받아도 단순하게 생각하며 살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깜빡 증’이 심한데 따지고 살펴서 건강하기 위해서는 어떤 음식을 얼마만큼 어떻게 먹어야 하고, 운동은 어떻게 해야만 한다는 등 모든 일에 신경을 쓰다 보면 머리에 쥐가 날지도 모른다. 좋은 정보를 다 담으려 한다면 뇌의 인지능력도 빨리 한계를 느껴 건망증이 더 심해지고 급기야는 치매로 발전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음식을 먹을 때도 열량, 영양소, 요리 방법 등을 따지지 않는다. 입맛대로 당기는 음식을 적당히 먹고 있다.


단순하게 산다는 것은 덜어내며 산다는 말일 것이다. 일상의 사물이나 일도 줄이고, 내 몸을 느슨하게 하여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내 능력에 맞는 이룸과 포기 그리고 거기까지에 만족하며 고마워하고, 한 가지에만 전념해서 최선을 다하는 일일 것이다. 노력은 내가 할 일이나 결과는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는 마음가짐일 것이다. 한마디로 비우며 살면 되는 건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비우려 함과 채우려 함이 부딪치는 갈등 속에서 건망증이 고개를 드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의 심한 건망증은 욕심이 빚어내는 산물인 셈이다. 더 단순하게 살아가라고 일러주는 경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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