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즐겁다

2005.04.02 17:07

김정자 조회 수:39 추천:6

시작이 즐겁다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기초반  김정자


  가을단풍이 어우러진 아침 운해 속에 멀리 보이는 마이산을 찍은 사진이 거실에 걸려있다. 남편이 찍은 사진이다.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마다 너무 멋있고 신비롭다고 한마디씩 한다.
남편은 그 사진 하나를 얻기 위해 마이산 주변의 산들을 헤아릴 수도 없이 오르내리며 찍을 장소를 물색했었다. 새벽 네다섯 시면 집을 나서기 4,50번 만에 저 사진을 찍어 왔다. 그 사진을 찍은 날은 느낌이 좋았는지 “이번엔 된 거 같아. 근사할 것 같거든!” 하고 기뻐했었다. 그러더니 작년 전라북도 관광사진공모전에서 은상을 수상하여 그 상금으로 결혼 때도 못해주었던 다이아 반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나는 가끔 사진을 찍는 남편을 따라 나선다. 해뜨기 전까지 올라가야 하는 지리산 노고단의 일출장면을 찍으려면 전주에서는 새벽 2시에 집을 나서야 한다. 그것도 그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메고 산길을 한 시간 이상을 걸어가는데, 한두 번 출사해서는 한 장의 사진도 못 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편의 그 허탈감은 나까지도 지치게 만든다.
언젠가 경주 바닷가 대왕암에서 바라보는 새벽 일출은, 특히 카메라 렌즈를 통해보는 구름과 어울린 아침 해의 황홀함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음력 정월 초사흘 날 바닷가의 새벽추위는 셔터 위에 올려놓은 손을 금방이라도 얼음 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 기세였다. 그런데 우리는 사진작품 속에서 아름다움만을 보지 그 작가의 노고를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작가들은 그걸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는 거니까. 물론 사진작가만이 그렇게 노력하는 건 아닐 것이다. 나이 많은 어느 수필가님은 한 편의 수필을 끝낸 뒤 맥주 컵으로 소주를 두 잔이나 마셔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하셨다.

“나도 뭔가 해야 할 텐데?” 하는 생각만 가질 뿐 행동으로 나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내게 가장 용기를 주는 사람은 남편이다. 운동신경이 부족해 절대로 못한다고 생각했던 자전거를 덜컥 사게 만들더니, 며칠을 공원 옆길로 데리고 가서 자전거를 끌고 가는 것부터 한 발을 페달에 올려놓고 중심을 잡아보고, 브레이크를 잡아 멈추는 연습을 시키더니, 기어이 동네를 한 바퀴씩 돌고, 경사진 언덕을 내려오는 기쁨을 안겨 주었다. 두 발 달린 탈 것에서 중심을 잡을 수 있다니 내 스스로도 얼마나 기쁘고 대견했는지 모른다. 나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자랑하곤 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자. 내게 조금만이라도 가능성이 있는 거라면 내 남아있는 노후를 위하여 해보자. 그러다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생겨서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도 가끔은 잘 안되어 좌절하고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리고 아이들에게 엄마의 마음이라도 보여주자. 그러면 저희들도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무언가 하려고 하겠지!”

  딸아이의 집에 놀러온 직장동료들이 거실에 걸려진 그림에 관심을 보여 엄마의 작품이라고 넌지시 자랑했다는 전화가 왔다. 잘 그려진 작품이어서 자랑한 건 아닐 것이다. 그냥 엄마가 그렸으니까 좋아했을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30년이 넘는 직장을 그만둔 뒤 재작년까지 그림을 배웠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딸들의 혼수품 속에 내가 그린 그림을 한 점씩 넣어 보냈다. 화가가 아니면 어떤가? 엄마가 그렸고 내 아이들이 좋아하는데.

작년에 일이 생겨 쉬었던 그림 대신 올해는 무엇을 해볼까 생각하다가 수필공부를 해 보기로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남보다 활자로 된 것은 무엇이든 잘 읽는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쓰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하지?” 하고 망설이자 남편은 “해봐, 작가가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 꼭 해서 진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취직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스트레스 받지 말고 그냥 해봐.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면 그때 손 털고 나오면 되잖아? 잘 되면 작가가 되어 좋고.”
시작하기로 했다. 노후를 위한 시도를 내 딴엔 참 과감하게 해본 것이다. 미칠 정도로 하면 좋겠지만 언제 한 번 어떤 일에 미쳐 본 적이 있었던가. 점차 수필이 풍기는 멋을 알아 가면 그땐 밤잠을 설쳐도 좋으리라.
내 첫 번째 독자가 되어주고 맞춤법이나 사투리 등을 사전을 찾아가며 고쳐주는 남편과, 자기 생활을 열심히 하며 저희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게 만드는 아이들이 있으니 나는 언제나 시작이 즐겁다.
“그래, 한 번 시작해보는 거야! 남들도 하는데 나라고 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