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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태 ( " )
2010.03.10 05:20
산사태
최 문 항
어두워지기 시작한 주차장 아스팔트 위에 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세찬 바람이 휘-익 불어와 마른 나뭇잎들을 한쪽 구석으로 몰고 갔다.
“사장님 다음 월요일부터 밤 반을 돌리려면 아무래도 한국사람이 한 명 있어야겠는데요, 그래야 안심하고 열쇠를 맡기죠.”
“전에 나오던 김씨 한번 연락해보지그래”
나는 귀찮은 듯이 조 반장에게 알아서 한사람 구해 보라고 했다.
다음날 오후에 조 반장이 중늙은이 한 사람을 데리고 내방으로 들어 왔다.
“사장님 오늘부터 밤 반 책임 맡을 차 선생인데요.”
“반갑습니다. 폴 박입니다,”
내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네, 차 성근입니다. 사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차 성근이라! 어디서 듣던 이름 같은데, 밤늦게까지 수고 좀 해 주시오.”
사무실을 돌아 나가는 차 씨가 왼발을 쩔룩이는 것 같았다. 저녁 다섯 시가 조금 지났는데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우선 12월 한 달은 조 반장이 정오에 출근해서 밤 여덟 시까지 밤 반 사람들을 훈련시키기로 했다.
한 주일이 지나갔다.
“그래서 미스터 차는 불평 없이 밤일 잘하고 있나?”
“괜찮게 하던데요 어디서 배웠는지 남미말도 잘하고요 애들보고 자기를 ”캐피탄 차“라고 부르라고 했어요, 그분 옛날에 한국군 장교 출신이래요, 아주 재밌는 분이더라고요.”
-한국군 장교 출신이라, 그 옛날 내가 알던 차 성근은 양구에서 증발했는데 아마 동명이인이겠 지, 그때 차 소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으니 말이야-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사장님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미스터 차가 몇 시에 출근하지?”
“오후 네 시요.”
“그 친구 이력서 가져오고 출근하면 내방으로 좀 오라고해”
- 차 성근 1947년생 충북청주출신 육사 졸업 콜롬비아에서도 살았고 미국에 들어 온 지는 일 년이 조금 지났군. 육사 출신이라! -
오후에 미스터 차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얼굴이 수척하고 머리는 반 이상 벗겨져서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차 형! 밤일 힘들지 않아요?”
“할 만 합니다, 멕시코 친구들이 말도 잘 듣고 아주 착해요.”
“남미 말을 한다면서. 남미 어디 있었어요? 얼마동안이나.”
“여기 저기 머물렀지요. 처음에는 브라질로 갔다가 콜롬비아로해서 중남미 과테말라에도 좀 있었고요.”
“아니 왜 한곳에 정착을 못하고?”
“젊어서 꿈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방랑벽이 생겼나 봐요, 한곳에 머무는 것처럼 따분한 일은 없었으니까요.”
미스터 차는 그렇게 구름 속에 달 가듯 한국에서 남미로 중미에서 미국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럼 이곳에도 오래는 안 머무르겠구먼.”
“글쎄요, 이제는 어디건 한곳에 정착했으면 좋겠는데 그게 쉽지가 않군요.”
그는 어딘지 모르게 지쳐 있는듯했다.
“한국으로 돌아 갈 생각은 없나? 혹시 가족이나 친척이 있다면…….”
“아무도 없어요, 떠나 온 지도 오래고.”
그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들고 만지작거렸다. 내가 얼른 불을 그어댔다. 그가 한 목음 깊이 빨아들이더니 거침없이 푸-우하고 길게 내뿜었다. 오래간만에 맡아보는 담배 냄새가 구수하게 느껴졌다.
“별명이 캐피탄 차라고?”
나는 혹시나 이 사람이 그때 양구 북쪽에서 증발(蒸發)했던 차 소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슬쩍 이야기를 유도 해봤다.
“이거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갔네요, 나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아마도 지난 이야기를 꺼내기가 싫은 것 같았다.
“차형 이렇게 시간 내기도 쉽지 않은데 우리 요 앞에 나가서 저녁이나 하고 옵시다.”
조 반장을 불러서 여덟 시 전에 돌아온다고 말해 주고 길 건너편에 있는 데니스식당으로 걸어갔다. 아직은 저녁이 일러서 그런지 식당안은 한가했다.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를 두 개 시켰다.
“박 사장님은 미국 온지 오래됐습니까? 이렇게 큰 공장을 일으키셨으니 성공하셨네요! ”
미스터 차가 처음으로 나 개인에 대한 흥미를 보였다.
“성공이라고 할 거야 없지만 몇 십 년 동안 한 가지 일만 했으니 나도 참 미련하지. 내가 1972년에 미국으로 건너왔으니까 이제 30 년도 넘었군.”
“1972년이라, 제가 병원에 누워 있을 때군요.”
“병원에는 왜, 어디가 아파서?”
나는 약간 흥분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이 사람이 정말 흙탕물 속으로 빠져들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차 소위라면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도도하고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특수임무를 수행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나이가 들고 약해진 모습을 내게 보여 주는 것이 괴롭지 않을까? 나를 알아본다면 최소한의 체면마저도 짓밟히지나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는 아직도 한국군 장교였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캐피탄 차”로 불러 달라고 하지 않는가! 다행히 아직까지는 박현규 소위를 기억 못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미국 이름으로 “폴 박”이고 그 이상은 알리지 않기로 속마음을 다져먹었다.
“강원도 산골 깊숙이 들어간 곳에서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산사태와 물난리에 떠내려가고 깔려 죽고 난리가 났었지요, 저도 그 와중에 물에 떠내려갔습니다.”
미스터 차는 그날 밤늦게까지 옛날이야기를 했다. 물론 나는 처음 듣는 무용담처럼 양구 이야기를 들었다. 몇 번을 나도 그 현장에 있었노라고, 내가 박현규라고 고백하고 싶은 것을 끝까지 잘 참아냈다.
****
연대 본부를 떠나 한 시간이 넘게 덜컹거리는 트럭을 타고 올라와 도착한곳이 내가 소대장으로 부임해 온 1대대 3중대 제2소대가 진지작업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원산에서부터 꾸불꾸불 물줄기를 따라오다가 군사분계선을 지나 내려오면 문등리 계곡으로 연결되고 다시 굽이굽이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양구 호에 다다른다.
트럭이 골짜기를 더듬어 올라와 민통선을 지나고 군사분계선 가까이 있는 계곡 안쪽 후미진 곳에 나를 내려놓았다. 넓은 공터 여기저기에 구덩이를 파 놓은 것을 보니 진지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조그마한 동산 뒤로 점점 높은 돌산이 연결되어있고 앞쪽에는 북에서 남으로 많은 물이 흘러내리는 깊은 계곡이 있었다. 남과 북이 적과 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니 금방이라도 저쪽 숲 속에서 공비가 튀어나올 것 같고 길 양쪽으로 검게 녹 쓴 철조망에 붉은 글씨로 “지뢰”라고 쓰고 그 밑에 해골을 그려 넣은 경고판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정오쯤 되었을까? 점심식사를 트럭에 싣고 중대장이 나타났다. 큰 알루미늄 통 두 개와 네모난 누런색 플라스틱 식기 그리고 다 찌그러진 국그릇이 내려지고 취사병이 뭐라고 고함을 지르니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던 사람들이 한 명 두 명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천천히 밥을 받아들고는 주변에 아무렇게나 둘러앉아서 식사를 시작했다. 그때 중대장이 나를 앞으로 나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동안 소대장 없이 고생들 많았는데 이번에 너희들이 기다리던 소대장님이 왔다. 박 소위 인사하지!"
나는 한발짝 앞으로 나섰다. 두 팔을 뒤로하고 턱을 바짝 끌어당겨 한껏 위엄을 갖추고 헛기침을 한번 했다.
"방금 중대장님으로부터 소개받은 박현규 소위다. 지척에 적과 대치한 상황 속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작업과 훈련에 열중하는 제군들을 보니 마음 든든하다. 앞으로 젊음을 다 바쳐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자. 어제는 선배들이 이 자리를 지켜주었고 오늘 우리가 국토방위에 최선을 다할 때 우리 부모 형제들은 후방에서 생업과 각자 맡은 임무에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서 후배들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똑같은 일을 맡아 줄 것이니 나만 손해 보고 있다는 어리석은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고 오늘 내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해 주기 바란다. 이상!"
내 인사말이 너무 거창했는지 혹은 전혀 흥미가 없었는지 녀석들은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소대원들은 서너 평 넓이의 구덩이를 파놓고 산에 올라가 통나무를 베어다 껍질을 벗기고 적당한 길이로 자른 다음 원형으로 벽을 쌓고 그 안에 박격포를 설치했다. 나도 소대원들과 함께 통나무를 어깨에 메고 수차례 언덕을 오르내리고 보니 온몸이 쑤시고 특히 벗겨진 어깨에서는 피가 찔끔거려 몹시 괴로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 우리 소대원들은 저녁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한 명도 안 남고 특수 임무소대 막사에 가서 청소와 빨래부터 총기손질 등 잡일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들은 본래 임무인 박격포진지를 짓는 일보다 일과가 끝난 다음에 해야 하는 일을 더 싫어하고 힘들어했다.
소대장 막사는 대여섯명은 들어 갈만한 공간이 있고 책상과 침상이 잘 준비된 야전용 A 텐트였으나 소대원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천막의 골격을 세우고 각 병사에게 지급된 두꺼운 비닐 판초 우의를 거둬서 아무렇게나 지붕을 씌워 만든 움막 같은 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계곡 밑으로부터 뿌연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는 소대원들이 기거하는 텅 빈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막사 안에서는 정말 참아내기 어려울 정도의 악취가 풍겨나고 있었다. 쾌쾌한 땀 냄새와 수십 일을 씻지 않은 발꼬락 냄새, 그리고 수컷들이 풍기는 비릿한 냄새가 뒤엉켜서 도저히 숨을 쉴 수없을 만큼 고약했다. 텐트 안에는 어느 물건 하나 제자리를 잡아놓은 것이 없고 침구도 펼쳐놓은 그대로였다. 소총받침대로 다가갔다, 손전등으로 총구 안을 비춰보니 뻘겋게 녹이 슨 것이 이삼 주 동안은 병기 손질을 하지않은 것이 분명했다. 옆에 있는 총들을 일일이 조사해 봤다. 어느 것은 노리쇠 부분이 들러붙어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이놈들이 소위 최전방을 지키는 병사들이란 말인가? 도대체 장교들은 뭘 했기에 소대 전체가 이 모양이란 말인가? 괘씸한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며 한참 동안 어두워진 막사 안을 서성거렸다. 얼마쯤 지났을까? 주변이 시끌벅적하면서 소대원들이 천막 안으로 몰려 들어왔다. 누군가 석유등에 불을 붙이고 아무렇게나 자신들의 침상을 찾아 걸터앉고 드러눕기도 하면서 왁자지껄하며 떠들다가 한 명의 병사가 나를 발견하고는 "차렷"하며 큰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주변이 조용해지면서 동작들을 멈추니 마치 돌아가던 활동사진이 정지된 것처럼 화면도 멎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좋아 편한 자세로들 앉아”
소대원들은 잠시 웅성거리더니 침상 끝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연일 계속되는 작업에 수고가 많다. 너희들이 지금까지는 어떻게 내무반생활을 했는지 묻고 싶지 않다. 그러나 오늘 일석점호를 끝낸 후부터는 어떤 사소한 일이라도 각분대장을 통해서 내게 보고 되어야 한다. 또 내 지시 없이는 어떤 행동도 너희 맘대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내가 소대장으로 부임한 이상 다른 소대의 일은 안 해도 좋다. 이 시간 이후 소대장이 모든 책임을 지기로 할 터이니 나의 지시만 따를 것! 알겠나?”
소대원 모두가 어리둥절하여 신통한 대답이 없다. 다시 목청을 높여서 “알겠나?”하고 소리를 꽥 지르니 그제야 우물쭈물 답이 돌아왔다.
“각분대장은 지금 즉시 내 천막으로 집합할 것. 이상!”
희미한 등잔불 밑에 제1분대장 곽 정남하사 제2분대장 이 진오하사 그리고 3분대장 이 영수병장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조금 있으니 대대 P.X에 막걸리를 사러 갔던 박찬영 병장이 헐레벌떡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탁자 위에는 왕 멸치, 썰어놓은 양파 몇 조각과 군대 고추장이 놓여있었다. 박 병장이 구해온 막걸리 한 주전자를 탁자 가운데 올려놓았다.
“편이들 앉지!”
통나무를 대강 잘라 만든 의자에 다섯 명이 둘러앉았다.
“오늘은 내가 각분대장들에게 신고하는 날이니 긴장들 풀고 간단하게 목이나 축여 보자고! 그동안 소대장 없이도 잘들 꾸려왔으니 지난 일도 이야기하고 또 내게 바라는 것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말해주기 바란다.”
아무도 선 뜻이 나서는 자 없이 찌그러진 식기에 담긴 허연 막걸리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 잔씩 마시면서 천천히 시작해보자고, 어디 제1분대장부터 한마디 해보지 그래”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곽 하사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소대장님 오싱께 참 존네요 맨날 옆 소대 눈치만 봤는디 이제 기 좀 펴도 되겄지요, 잉?”
차례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 진오하사가 나섰다. 그는 마치 나를 원망이라도 하듯이 큰소리로 말했다.
“와~ 이제야 왔능교, 내 드러버서 군대생활 몬 할 뻔했다 아임니꺼”
이 하사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박찬영 병장이 가로막고 나온다.
“이제는 특소 명령 안 받아도 되것지요? 지들은 뭐 카추샤라나 암튼 소대장님만 믿어유”
“자- 자- 우선 한잔씩 하자고, P.X 막걸리 맛이 그만 이라고들 하던데…”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막걸리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 잔씩 더하자고”
내가 손을 내미는데 이 하사가 일어서면서 주전자를 뺐다시피 낚아채고는 내 잔을 가득 채웠다.
“소대장님 한잔 더 하소 마”
한두 차례 잔이 더 돌고 나니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 졌다.
“그래 이 병장도 한마디 해 보지”
“저는 할 말 없습니다. 한두 달 만 지나면 제대 할 텐데요 뭐…”
“그래도 소대장을 환영한다던가 뭐 한마디 쯤 해봐!”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남들은 파견근무하면 슬슬 농땡이나 치고 여유도 있다는데 우리 소대는 정말 재수 더럽게 없다고요, 하필 우리가 차출돼서 대대 본부중대로 올 게 뭡니까? 그것도 특소(이네들은 특수임무소대를 줄여서 그냥 특소라고 했다.)에 배속되어서 정말 더러운 꼴 실컷 보고 갑니다.”
힘들게 시작한 이 영수병장의 넋두리는 대강 다음과 같았다.
나무로 되어 있는 방책선을 철책으로 교체하면서 1대대 전 병력이 동원되어 문등리 계곡 깊숙한 곳에 숙영지를 만들어 놓고 밤낮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대대 주력화기인 82밀리 박격포를 휴전선 안쪽에 고정배치하기 위해 견고한 진지와 화력지휘소를 만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제2소대장 김일우 소위는 철책선 작업보다는 박격포 진지 작업이 훨씬 수월할 것 같고 또 본부중대에 배속되면 대대장을 가까이에서 모실 기회가 많을 것 같아 중대장에게 간청해서 1소대를 젖히고 소원대로 본부 중대로 오게 되었다. 산 중턱을 깎아내고 겨우 평지작업이 시작될 쯤에 소대장과 당번병이 계곡 아래로 목욕하러 내려가다가 그만 지뢰를 밟는 바람에 당번병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김 소위는 오른쪽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소대장은 양구에 있는 이동외과병원으로 후송되고 그날 이후 특소소대장 차 소위가 2소대를 지휘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특소의 부속 소대로 전락하고 말았다.
2소대원들은 하루 종일 통나무를 베어다가 박격포 진지 작업을 하고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반 시간 이상 걸어 소대막사로 돌아온다. 허겁지겁 저녁식사를 끝내고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탄약고 언덕을 넘어 특소천막으로 가서 그들이 아무러게나 어질러 놓고 출동한 것들을 깨끗이 정돈해 주고 나서야 다시 2소대 막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특수임무소대는 월남 전선에 배치된 한국군들의 장비를 고스란히 들여다가 사용하고 있었다. 정글 복에 검은색 통일화를 신고 M-16자동소총으로 무장했으니 그야말로 월남에서 정글을 누비는 특수부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철책선 작업이 밤낮으로 진행되면서 최전방지역을 시찰 나가는 대대장을 경호하기 위해 대한민국 군 편제에도 없는 특별한 소대를 만들어서 불법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소대장은 육사출신의 차성근 소위가 맡고 있었다. 소대원들 역시 무술을 대강 한가지씩은 익힌 똘똘한 녀석들을 모아다 놓았다. 그들은 말 그대로 특수임무 이외에는 자신들의 잡일까지 모두 2소대 원들에게 맡겨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 안하겠다던 이 영수병장은 앞에 놓인 막걸릿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소대 선임하사 오 중사님이 일과 후의 특소 잡일을 못하겠다고 거부했다가 차 소위한테 심하게 구타를 당했습니다. 오 중사가 홧김에 술을 잔뜩 마시고 수류탄으로 자폭한다고 난리를 피웠는데 결국은 체포되어 연대 영창에 가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진짜 아비도, 어미도 없는 불쌍한 놈들이었지요. 그래도 제대하기 전에 소대장님이라도 오셨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밤이 이슥하도록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너무나 격분해서 어금니가 부스러지게 입을 앙다물었다.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중대장에게 전화로 불만을 호소해봤다. 허 대위는 대대 본부중대장과 의논해보라면서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허 대위는 2소대 원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대강은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본부중대장 정 대위를 찾아가서 우리 소대원들을 돌려 달라고 사정을 해보았다. 그의 반응은 뜻밖에 2소대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듯이 말했다.
“글쎄 이제는 소대장이 왔으니 자기 소대 제가 챙겨야겠지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나? 차 소위하고 잘 해 보게나!”
-그렇다면 이것은 순전히 차소위가 우리 소대원들을 하인 다루듯 했다는 말이로군 그래.―
그날 밤 문둥리 계곡의 칠흑 같은 어둠을 혜치고 차 소위를 찾아갔다. 그는 천막 속에 자동차 건전지를 떼어다가 전등을 켜놓고 비스듬히 누어서 영어잡지를 읽던 중이었다.
“안녕하시오, 차 소위 이번에 3중대에 배속된 박 소위요 인사나 합시다.”
그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다시 눈길을 책에 고정시키고 첫마디부터 반말지거리로 나왔다.
“용건이 뭔가?”
“인사 왔소이다.”
그는 내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벌떡 일어서면서 소리를 꽥 내지르면서 경멸하는 눈초리로 나를 노려봤다.
“귀관은 그렇게 배웠나? 선임 장교에게 제대로된 신고를 해야지, 그 태도가 뭔가? 여기가 무 배추 파는 시장 바닥인 줄 아나? 그래서 학훈 장교들이 욕을 먹는 거야…”
“야! 차 소위 너 누가 누구보고 신고를 하라는 거야, 너 25기지, 임관은 내가 먼저 했으니 그렇게 따진다면 네가 나한테 먼저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냐? 어디 육사에서 배운 대로 신고 한번 멋들어지게 해봐.”
차소위는 모욕을 당했다는 듯이 앞에 놓인 탁자를 힘껏 걷어찼다.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다시 말해봐, 신고는 새로 온 놈이 하는 거야 인마!”
“허어 이거 점잖은 장교님이 말을 막하시네”
“야! 너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냐?”
“눈치 한번 빠르군, 어느 육군규정에 타 소대원들을 너희 하인 다루 듯해도 된다고 나와 있냐? 당장 우리 소대원들 돌려보내! 만약에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사단감찰부에 확 고발해 버리겠어, 알아서 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차 소위의 천막에서 돌아서 나오려는데 내 뒤통수에 대고 조금 쫄 아든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대장님 명령이야! 따질 일이 있으면 직접 물어봐도 좋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서면서 차 소위를 노려봤다.
“이거 좀 비겁하지 않냐? 그래 소대장이 사고를 당해서 하는 수 없이 너같은 놈에게 맡겼더니 우리를 너희부속물로 여겨? 야! 인마 나는 대대장이 시켜도 그 짓은 못한다. 이것은 군 윤리문제 이전에 네 양심적인 문제 아니냐?”
“너 대대장님 경호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나 하냐?”
“응 그래서 2소대를 너희들 청소부로 쓰라고 대대장이 허락해 줬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협조를 부탁 할 수는 있는 거 아니냐?”
“그래서 너희들이 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고 2소대는 너희 잡일이나 도와라?”
“그게 왜 잡일이냐?”
“청소하고 빨래하고 너희 개인화기까지 돌봐드려야 된다고?”
“그런 일 시킨 적 없다.”
“오 중사 빨리 빼줘 인마.”
“오 중사? 어, 그 친구 술 먹고 난동부린 거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우리도 맡은 임무에 충성을 다 바치고 있어, 너희가 하는 일보다 몇 배 더 힘든 일 하고 있다고, 너희도 땅 파고 등짐 한번 져 봐라. 여태껏 네가 우리 소대원들에게 얼마나 못되게 놀았는지는 네가 더 잘 알 테니까 더 말 않겠다. 이 문제는 네가 해결해. 만약 내일까지 시정 안 되면 대대장님을 만나든지 사단 감찰부를 찾아가 내가 해결할 테니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라."
특수 임무소대 천막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을 뒤로하고 긴 그림자를 밟으면서 탄약고 언덕을 넘어 내 천막으로 돌아왔다.
2소대원들에 대한 본부중대 취사병들의 행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했다. 식사하기 전에 공연한 트집을 잡아 각가지 기합을 주고 될 수 있는 한 식사시간을 짧게 주었다. 매일 여섯 명씩 남아서 식사 후의 설거지며 청소를 해주고 취사장의 모든 잡일을 끝내주어야 겨우 작업장으로 돌려보내 주었다. 소대원들은 식당에서 뿐만이 아니고 가는 곳마다 푸대접을 받아서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부정적이고 자조적이었으며 비협조적이고 게을렀다.
이들을 제대로 된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 소대장이 앞장서야 했고 공정한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짧은 거리도 뛰어다니게 했고 언제나 두 사람 이상이 움직이게 했다. 간혹 특소원이나 본부중대 고참병들이 일을 시키면 아주 간단하게 “우리 소대장님 지시를 못 받았습니다.”로 대답하고 그 자리를 요령껏 피하도록 교육을 시켜놓았다. 작업장으로 향해 갈 때나 작업을 끝내고 숙영지로 돌아올 때도 피곤하고 지쳤지만 줄을 맞추어 큰소리로 군가를 부르며 행군했다. 우리 소대원들은 마치 신병훈련소에 다시 들어온 것 같이 행동했다. 몇 주 걸리지 않아 소대원들은 행동도 민첩해졌고 제법 군인다운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육군 형무소에서 돌아온 조창현 이병은 나이가 서른두 살이나 되는데도 막냇동생 같은 동료들과 잘 어울려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는 풍수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숙영지 주변에 샘터를 찾아내 옹달샘을 만들어서 지뢰밭을 지나 계곡 밑에까지 내려가지 않고도 맑은 물을 실컷 쓸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지압도 잘하고 동료들의 손금도 봐주곤 했다. 소대원들은 그를 조 영감이라고 불렀다. 그가 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소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보게…”
“저~ 우리숙소 말인데요. 아무래도 뒤쪽 저만치로 옮겨놔야 될 것 같습니다. 만약에 큰 비가 와서 뒷산이 무너져 내리면 우리 모두 깔려죽습니다. 탄약고 오른쪽에 아주 좋은 자리가 있는데 하루라도 빨리 소대막사와 소대장님 텐트를 옮겼으면 합니다.”
“탄약고 오른쪽이면 본부 중대에서 더 멀어 지는 거 아냐?”
“그래도 지금 위치는 너무 언덕 끝 쪽에 붙어있어서 물에 휩쓸리게 되면 그대로 저 밑 강 바닥까지 밀려 내려가고 말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게 위험한 위치에 있단 말인가?”
“네 탄약고 언덕에 올라가서 내려다보십시오!”
“조영감 생각이 정말 그렇다면 옮기도록 하지 뭐!”
다음날부터 우리는 3개 분대만 작업에 투입하고 이 영수 분대를 계곡 밑 개울가로 내려보내 곧게 자란 물푸레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잘라 작업장으로 끌어 올려놓고 저녁에 숙영지로 돌아올 때마다 한 사람이 몇 개씩 가져왔다. 충분한 양의 기둥감을 확보해놓고 제2분대는 소대 막사를 다시 짓기 시작했다. 조 영감의 감독 아래 땅을 한 자가량씩 파고 준비해온 물푸레나무를 두 줄로 나란히 세워나갔다. 가는 끝 부분을 구부려서 건너편 나무와 연결하고 칡덩굴 줄기로 잘 동여매 둥근 천막의 골격을 만들었다. 판초 우의를 낡은 천막에서 거둬내 깨끗이 씻어 말린 다음 새로 지은 막사의 지붕을 덮고 나니 훌륭한 천막이 되었다.
매일같이 분대 별로 돌아가며 환자(?)한 명을 막사에 남아있게 해서 자기분대의 세탁과 병기 손질을 하다 보니 제법 정돈된 내무반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화력지휘소 건물만 완성하면 본대로 복귀할 수 있을 만큼 진지작업도 많이 진척되어 가고 있었다. 무더위가 계속되더니 먹구름이 몰려오고 긴 장마철이 시작되는 것 같았다.
공비들의 남침을 막고 남쪽에서 암약하던 간첩들이 북으로 넘어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해 엉성한 나무로 만든 울타리를 걷어내고 튼튼한 쇠고리 철조망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철책선을 따라 교통 호를 깊고 넓게 파서 오토바이를 타고 순찰할 수 있게 하려고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해안 초소까지 155마일을 요새화하려는 1군의 최대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매일 계속되는 철책공사에 병사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작업기일이 길어지고 안전사고로 인명 피해까지 생기고 나니 병사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와 비례해서 사단과 군단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높은 분들이 작업장까지 돌아다니며 감시하고 재촉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대대숙영지 연병장에 천여 명이 훨씬 넘는 병사들은 M1소총을 한쪽 어깨에 거꾸로 메고 다른 쪽에는 각종 작업도구를 걸치고 작업장으로 출발하기 위해 줄지어 늘어서서 매일 반복되는 안전 교육을 받고 있었다.
703 G,P 전면 철조망작업을 끝내고 부비튜럽을 설치하던 중 한 병사가 부주의로 인계철선을 건드리는 바람에 철조망에 매달아 놓은 수류탄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두 명이 죽고 수명의 병사들이 중상을 입고 후송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북쪽의 적들은 기회를 놓칠세라 대남방송을 해 대기 시작했다. 고막이 터질것 같은 대남방송은 매시간 쉬지 않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북한 공작원들이 비 오는 밤에 남방 한계선을 넘어와 물이 고인 도로 한가운데 대전차 지뢰를 이곳저곳에 숨겨놓고 갔다. 이른 새벽 부식을 실어 나르던 트럭이 그 위를 지나가다가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북쪽의 방해가 점점 거칠어만 가는 거대한 작업현장은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으며 사단과 군단의 감시와 독촉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용접 통을 어깨에 멘 병사들이 계곡과 야산에서 파란 불을 뿜으며 야간작업을 하고 후방지역의 행정병들까지도 철책 작업장으로 내몰렸다. 병사들은 억수같이 퍼부어대는 장대 빗속에서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반나절 작업을 마친 후에 소대별로 휴식 겸 정비시간이 허락된 토요일 오후였다. 대부분의 병사는 비를 피해 천막 안에 있었다. 후드득거리며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모처럼 만의 휴식을 즐기기에 더없이 정겨웠고 사방이 빗소리와 바람 소리 이외에는 별 잡음이 없었다.
십 여일이 넘게 쉬지 않고 퍼부어대는 빗줄기를 뚫고 조 영감과 이 영수 병장이 내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소대장님 제 생각으로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우리 천막 쪽으로 쏠릴 것 같습니다. 마침 탄약고 뒤에 큰 미루나무 여섯 그루가 있는데 그놈들을 잘라서 천막 옆에 뉘어놓았으면 합니다.”
조영감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옆에 이 병장도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이렇게 빗줄기가 세찬데 좀 수그러들면 하지 그래~”
“아닙니다. 천막 주변에 배수로도 더 깊이 파고 좀 주변을 정리한 후에 쉬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섯 명만 보내 주십시오.”
“고집하고는! 그래 될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 쉬는데 방해 안 되게 조 영감하고 힘쓰는 친구 몇 명 불러내서 빨리 정리하도록 해!”
조 영감 일행이 나무를 자르는 동안 여러 명의 병사가 몰려나와 배수로를 깊이 파고 많은 흙을 천막주변에 둘러놨다. 미루나무 무더기를 천막 왼쪽에 대각선으로 쌓아놓고 배수로를 한 바퀴 둘러본 조 영감과 이 병장이 흠뻑 젖은 옷을 쥐어짜면서 내 천막으로 들어섰다.
“소대장님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몇날 며칠을 이렇게 퍼부어대니 겁이 나네요. 우리 뒷산이 너무 가파르고 시계(視界)청소 한다고 나무들을 다 베어 버렸으니 산사태가 나면 여러 명 다치겠어요.”
“조 영감, 나이가 들면 겁이 많아진다던데 너무 겁먹을 거 없어, 지금 월남전에 나간 병사들 머리 위로는 빗방울이 아니라 총탄이 쏟아지고 있다고.”
조 영감은 내가 하는 말을 듣는지 마는지 초점 없이 밖을 내다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저희는 이렇게 준비라도 조금 했지만 특소 애들이 걱정입니다. 만약에 물에 휩쓸리면 순식간에 계곡 밑으로 쓸려 내려갈 텐데 저렇게 태평들이니…”
그때 갑자기 뒷산 쪽에서 우르르하며 흙과 돌들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대장님 아무래도 오늘저녁을 무사히 넘길 수 없을 것 같은데요! 만약에 큰 사태가나면 모두 탄약고 언덕으로 뛰어야합니다.”
“조 영감 너무 겁주지 말라니까 그러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굵은 빗줄기가 온종일 퍼붓고 있었다.
-조 영감이 왜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는지 모르겠네? 정말 산사태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
철모에 우의를 걸치고 탄약고 언덕에 올라가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계곡 아래쪽을 보니 마치 큰 강처럼 엄청난 양의 물이 굽이쳐 흘러가고 있었다. 아래쪽에 있는 특소천막 주변은 벌써 흙탕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소대천막으로 들어갔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맨발로 여기저기 모여앉아 휴식을 즐기던 병사들이 엉거주춤 일어서면서 나를 맞이해주었다.
“휴식시간에 방해해서 미안하다 그러나 이 영수 병장과 조 영감이 숙영지 주변을 정찰한 결과 우리는 현재 매우 불안정한 위치에 놓여있다. 엄청난 폭우로 침수피해와 산사태가 우려되기 때문에 지금부터 철저한 준비를 해야겠다. 전 소대원은 지금 즉시 통일화를 착용할 것, 그리고 어떤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소대장과 분대장의 명령에 따라서 행동해 주기 바란다. 첫째 침수에 대비해서 보급품들을 침상 위 한곳으로 모아놓고 밧줄로 단단히 동여 매 놓을 것, 비상을 알리는 호각소리가 들리면 머뭇거리지 말고 곧장 탄약고 언덕으로 대피할 것, 각 분대장들은 10분 간격으로 주변 상황을 돌아보고 내게 보고한다. 이상”
웅성거리는 소대원들에게 각분대장들이 대피 장소와 복장 그리고 헤어지지 않게 서로서로 조를 만들어 주고 비상시에 사용할 신호와 호각소리로 연락하는 방법 등을 철저하게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천막으로 돌아와서 중대본부에 전화를 걸어 침수나 산사태의 위험이 있는지 또는 어떤 특별한 지침이 내려졌는지 알아보았으나 별다른 지시가 없었다. 특소 차 소위에게 연락했다.
“차 소위 이거 비가 너무 많이 내리는 것 같은데 별일 없겠나?”
“무슨 별일? 모처럼 휴식인데 저녁에 소대원들 회식이나 시켜줄까 하는데.”
그는 귀찮은 듯한 어조로 내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에 탄약고위에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특소천막 근처에 벌써 많은 물이 고였더라고, 밖에 한번 나가 보라고.”
“이게 뭐 하루 이틀 오는 빈가?”
“차소위 그래도 한번 밖을 내다보라고, 자네는 대대장님 주변도 살펴봐야 되지 않겠나?”
“알았네. 자네도 조금 더 지나면 야전생활에 익숙해질 거야, 소대장이란 작자가 그렇게 심약하게 굴어서야 어떻게 적과 대치할 수 있겠나? 바로 이런 데서 군인정신의 차이가 나는 거라고, 내가 왜 학훈장교들을 우습게 보는지 알겠지!! 그리고 지금 내가 나서서 설쳐대면 대대 참모들이 건방지게 논다고 뭐라고 할 거야, 좌우지간에 걱정해줘서 고맙다!”
차소위는 한참 훈시하더니 내 말은 더 이상 듣지도 않고 전화를 철커덕 끊어 버렸다. 후드득거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공연히 조 영감 때문에 호들갑을 떨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두세 시간이 지나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하사가 내 천막으로 들어서면서 아무 일도 없는데 괜히 조 영감 말만 듣고 비상을 걸어 놔 소대원들이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고 투덜거렸다.
“소대장님요, 이제 고만 아 - 들 좀 쉬라 카소 마! 배수로도 잘 치와놓고 걱정없슴다.”
“야! 이왕에 준비한 거 그냥 놔둬 그리고 분대장들 다 오라고 해 참 조 영감도 부르고…”
특소에서 회식한다면 우리도 막걸리나 받아올까? 생각하며 천막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뒷산 쪽에서 마치 4.2인치 박격포탄이 터지는 소리 같은 "꽈-앙"하는 굉음이 들리고 "따―악"하면서 무엇인가 엄청나게 큰 것이 부러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산이 무너져 내리고 돌이 구르는 소라와 함께 어디서 흘러오는 물인지 모르게 엄청난 양의 흙탕물이 탄약고를 가운데 두고 우리 소대 쪽과 본부중대 쪽 두 갈래로 나뉘어 노도 같이 덮쳐왔다. 내 천막 쪽으로 오고 있던 분대장들이 허둥대며 호각을 꺼내 들고 불어대기 시작했다.
“호로로……. 호로로……. 호로로……. 호로로…….”
눈 깜짝할 사이에 흙탕물이 허리까지 차올랐다. 이 진오 하사와 나는 서로 허리에 찬 탄띠를 꽉 붙잡고 한발 한발 탄약고 언덕을 향해 걸음을 옮겨 놓았다. 겨우 십여 미터쯤 전진 했을 때 이 하사가 “헉”하는 소리를 내면서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내가 있는 힘을 다해서 끌어올려 봤으나 이 하사는 꿈쩍도 못하고 물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급한 물살에 떠내려 온 바위가 이 하사의 다리를 덮쳐서 점점 물 밑으로 끌려 들이고 있었다.
“곽 하사!! 이 병장!! 이 하사를 구하라. 여기다 여기야…”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이 하사를 부둥켜안고 몸부림치면서 소리소리 질렀다. 곽 하사가 뛰어오고 병사들이 합세하여 이 하사를 탄약고 언덕 위로 끌어올렸다. 호각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몇 명의 병사들은 흙탕물에 휩쓸려 넘어지고 물속으로 곤두박질을 쳤다. 그래도 다행스럽게 3인 일조로 서로를 보조 로프로 묶어놓아서 겨우 떠내려가지는 않았다. 박찬영 병장이 천막 왼편 가운데를 대검으로 쫘-악 찢어버리고 새로운 통로를 만들었다. 안에 있던 병사들이 밖으로 몰려 나와 옆에 쓰러트려 놓은 미루나무 가지를 붙잡고 한 사람씩 탄약고 언덕으로 기어올라왔다. 언제 올라갔는지 탄약고 꼭대기에는 조 영감이 올라서서 양팔을 휘저으면서 큰소리로 동료를 부르고 있었다.
“각 분대장들은 인원을 정확하게 점검하고 부상자들의 상태가 어떠한지 확인해서 보고하라”
잠시 후 곽 하사가 숨을 헐떡이면서 내게 다가와서 보고했다.
“이 하사는 왼쪽 다리가 부러지고 세 명의 병사들이 물에 휩쓸리면서 얼굴과 어깨부분에 찰과상을 입었습니다, 다른 두 명은 흙탕물을 많이 마셨으나 모두 토해내고 이제는 안정을 되 찾았습니다. 그 외에는 전원 이상 없이 대피했습니다.”
천막 왼쪽에 뉘어놓은 미루나무가지에 돌과 흙이 밀려와 쌓이면서 높은 둑을 만들어 놓아 침수는 되었어도 골격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자 흙탕물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대장천막과 본부중대막사는 굴러온 바윗덩어리와 쌓인 흙으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고 특소천막도 끝 부분만 조금 보일 뿐 누런 진흙으로 덮여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어두워지기 시작한 숙영지 곳곳에서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들려 왔다.
조금이라도 부상당했거나 몸이 불편한 사람을 제외하고 분대 별로 인명구조팀을 만들어서 우선 본부중대와 특소천막이 있던 곳으로 내려갔다. 탄약고에서 박격포 장약을 가져다가 물에 푹 젖은 생나무들을 모아놓고 불을 지폈다. 여기저기에 모닥불처럼 피워놓고 물에 젖은 몸을 녹였다. 훤한 불빛으로 흙에 파묻힌 사람들과 부상당한 사람을 찾아내기가 조금 수월해졌다.
대원들은 우선 특소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돌을 굴려내고 땅을 파 들어갔다. 텐트입구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계곡 아래로 떠내려갔고 중간부터 끝 부분에 있던 병사들은 미처 밖으로 빠져나올 틈이 없었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땅을 파헤쳤다. 대부분 의식이 없어 보였지만 간혹 신음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열여덟 명을 끌어냈으나 겨우 여섯 명만이 생명이 붙어 있었다. 다시 대열을 정비하고 개인 로프를 준비하여 계곡 밑으로 내려갔다. 여기저기 흙 속에 묻혀있는 사람들 중에 생존자를 확인하면서 큰 물줄기가 흐르는 강기슭까지 내려왔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여기요!”
어둠 속에서 박 병장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급류가 언덕에 부딪혀서 흙더미가 무너져 내리는 비탈에 엉거주춤 서서 누군가에게 밧줄을 던져 주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와 이 하사가 황급히 언덕 밑으로 뛰어 내려가면서 구조 로프를 던져 주었으나 그는 이미 급한 물살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었다. 윗옷을 벗고 있었지만 얼핏 보기에 차 소위 같았다. 급류에 떠내려가면서도 한 손을 물 위로 허우적거리는 것이 늦게 도착한 우리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에게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급류로 뛰어들어 갈 용기가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그는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내 망막 속에는 그의 휘젓고 있던 손이 가물거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힘없이 돌아섰다.
“분명히 차소위 였어.”
나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몇 번을 뒤돌아보며 언덕 위로 올라왔다. 허리에 보조로프를 묶어 삼인 일조로 움직이고 있었으나 세찬 빗줄기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더 이상 움직인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해야겠다는 마음만 앞섰지 우리도 똑같은 위험에 노출된 상태였다. 퍼부어 대는 빗줄기 때문에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고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특히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 왔을지도 모르는 지뢰 같은 폭발물들이 주변에 깔렸으리라는 사실이 우리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다.
겨우 다섯 명을 들것으로 운반하고 구조작업은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숙영지로 올라와 보니 여기저기에 횃불들을 밝히고 다른 중대원들이 몰려와서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우리도 불을 피우고 천막 주변을 둘러봤다. 흙탕물에 잠겼던 모든 것이 누런 황토색으로 변해 있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했다. 마치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느 한구석 마른 땅이 없었다. 굴러온 바위와 흙더미를 파헤치며 한 명이라도 더 구조해 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던 병사들도 이제는 지쳤는지 이 구석 저 구석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다. 온몸이 푹 젖어 있었는데도 긴장이 풀린 탓인지 눈꺼풀이 내려앉으며 걷잡을 수 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천막 구석에 꾸겨지듯 주저앉았다. 잠시 잠이 들었었나 보다. 몸이 으스스 떨려왔다. 다시 천막 밖으로 나와 보니 빗줄기는 가늘어지고 저쪽 산등성부터 훤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조영감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건빵 몇 조각과 수통을 건네주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부터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뛰어다닌 셈이었다. 건빵은 사양하고 시원한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정말 생명수같이 귀한 물이었다. 언제 손을 봐놨는지 조 영감의 옹달샘이 말짱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소대원들이 줄을 서서 물을 퍼마시고 있었다. 나는 조 영감의 손을 덥석 잡았다. 소대원들의 안전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하는 마음이 무능한 소대장보다 열 배는 더하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고마움이 솟아났다.
“조 영감 정말 고맙소!”
그는 건빵과 물을 줘서 고마워하는 줄 알고 계면쩍은 듯이 돌아섰다.
먼동이 터 올 무렵이 돼서야 중대장이 제일, 제삼 소대를 이끌고 우리를 구조하기 위해 들이닥쳤다.
“박 소위 무사했군 그래 천만 다행일세!”
“네, 소대 전원 이상 없습니다.”
“하늘이 도왔군. 아래에서 듣기에는 모두 매몰 됐다고 난리였는데…”
“중대장님 우리는 전원 무사한데 특소 애들은 많이 당했습니다. 어젯밤에 우리가 구조해낸 사람은 몇 명 안되거든요, 저 밑에까지 내려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 공병대원들이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면서 인양작업 중인데 아직 대대장과 차소위는 못 찾았다는구먼.”
“중대장님! 우리 전원이 무사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 창현 이병의 공로입니다. 어느 누구도 산사태가 일어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조 이병이 철저하게 준비해서 소대 전원을 살렸습니다. 이 진오 하사가 다리에 골절상을 입었고 세 명이 얼굴에 찰과상을 입었으나 인명 손실은 전혀 없습니다.”
“참 잘했군. 정말 잘했어! 산사태가 일어난 중심에 있었는데 피해가 이 정도라니 이건 기적이야 기적! 바로 옆에 있던 특수임무소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는데 말이야!”
“이번 사고로 얼마나 인명피해가 났습니까?”
“아직은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대대장님을 비롯해서 최소한 백 명 이상 당한 것 같다고들 하는구먼…”
우리 소대 전원이 무사하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워낙에 큰 인명손실이 발생한 것에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
다음날 오전에 민간인 통제선이 있는 계곡 끝에서 여러 구의 시체를 인양하던 중에 대대장의 시신도 발견됐다. 공병대와 전차중대 소속의 불도저가 연일 산사태로 밀려 내려온 흙을 파헤치며 매몰된 시신을 찾고 있는데도 아직 차 소위의 소식은 묘연하기만 했다.
우리소대는 몇 주 후에 화력지휘소 건물을 완성하여 파견 임무를 모두 완수하고 다시 3중대로 원대 복귀했다. 연대본부에서 중대장과 나에 대한 표창식이 있었다. 훌륭한 군인정신과 탁월한 지휘 능력으로 그 무서운 산사태 속에서도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임무를 완수하였기에 상장을 수여한다고 했다. 사실 표창은 조 영감이 받았어야 마땅한 것을, 나는 조 영감이 하자는 대로 따랐을 뿐이고 또 중대장은 이 산골짜기에서 우리가 어떤 대접을 받고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훌륭한 지휘능력이 인정되어 상을 받고 실제 아이디어와 헌신적인 노력으로 동지들을 구해낸 조창현 이병은 칭찬 한마디 못 듣고 말았으니 참으로 불공평한 처사였다.
그때 차소위는 하늘로 솟았을까? 아니면 땅으로 꺼졌을까? 아마 땅속 깊은 곳으로 숨어 들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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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는 얼마나 오래 있었나?”
나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물었다.
“수도육군병원에서 제 젊음은 끝난 셈이죠!”
그는 어두워진 창밖을 멍청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때를 회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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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찾아온 휴식시간을 만끽하던 차 소위는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런닝셔스에 짧은 팬티만 입고 소대원들과 둘러앉아 바둑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아무런 경고도 없이 엄청난 흙더미가 천막을 덮쳤다.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겨우 나뭇가지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불어나는 흙탕물은 점점 그를 격랑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구조의 손길이 한 발치 앞까지 다가왔으나 그때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어서 그들이 던져 주는 빗물에 젖은 가는 밧줄을 붙잡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구조대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지만 어떻게 해 보지도 못하고 성난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말았죠.”
차소위는 민간인통제선 근처까지 떠내려가 공병대원들이 쳐 놓은 그물에 걸려서 인양됐다. 어느 누구도 물에 퉁퉁 불어 오른 그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고 복장이나 어느 것 하나 그가 차 소위라는 것을 증명해 주지 못했다. 너무 오랫동안 물에 잠겨 있어서 뇌에 산소공급이 안 됐기 때문에 혼수상태로 이미 숨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6종 창고에 짐짝처럼 버려졌던 그를 고참 위생병이 시체를 부검하다가 그의 심장이 아직 뛰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원주에 있는 1군 종합병동으로 후송시켜 줬다. 원주 종합병원에서 몇 주 지나는 동안에 주변의 병사들은 대부분 연고자가 나섰지만 차 소위만은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편 가족들은 차 소위가 아직도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을 거라고 믿고 매일 같이 발굴 현장을 맴돌았다. 차 소위 약혼녀가 미친 듯이 양구에서부터 원주까지 오르내리면서 부상병들의 후송 행적을 꼼꼼히 뒤지고 다니다가 일반 병사들이 입원해 있는 원주 병동까지 찾아왔다. 그리고 구석에 방치 돼 있던 차 소위를 찾아냈다. 거의 포기 상태에 있던 가족들에게는 마치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뻤다. 그날로 차 소위는 신분이 회복되고 장교 병동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비극은 시작되었다. 심장은 살아 있으나 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식물인간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병상에 누워 있게 되었다. 얼마가 지난 후 약혼녀는 아무 말도 안 남기고 그의 곁을 떠나갔다. 어느 누구도 그가 회생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무더운 여름날 진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그의 팔다리를 얼음물로 닦아내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내 아들을 살려 주소서”
서너 달이 지난 어느 비오든 날 저녁 긴 잠에서 깨어나듯 차 소위가 눈을 떴다. 그리고 수도육군병원으로 후송되어 무려 삼년이 넘는 긴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차 소위는 대위로 진급과 동시에 전역했다. 그러나 혼수상태에 있을 때 손상된 그의 왼쪽 다리 근육은 회복이 안 되고 말았다.
고향 청주에서 재활의 길을 찾던 차 성근이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멀리 상파울로에서 한 장의 엽서가 고향집으로 날아들었다.
“어머님 전상서…….”
이곳에 와서 잘 지낸다는 이야기, 브라질 여자와 사는데 딸을 하나 낳았다는 소식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 편지를 읽어줄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에 안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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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은 미국 이름만 쓰세요? 폴 박이라고 하셨죠.”
차 성근이가 나의 한국이름를 물었다. 이제 30여 년 전 박현규 소위가 그의 기억 속에서 살아나고 있는 듯하였다. 만약에 내가 ‘야, 차소위 나 박현규야 생각나?’하면서 다가선다면 그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옛 전우를 만났다고 반가워할까? 아니면 젊었을 때 우쭐대던 것을 생각하고 무안해할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베푸는 호의를 덥석 받아 챙기기에는 너무 어색해 할 것 같았다. 내 쪽에서도 수십 년 전의 일로 그와 무슨 계산 할 것이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같은 장교로서 차 소위에 대한 미움 때문에 눈앞에 닥쳐올 큰 위험을 더 단호하고 절박하게 경고해 주지 않았던 것이 후회됐다. 또 그가 격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용감하게 물속으로 뛰어들어 구조해내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보였던 것이 평생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 그때 나와 함께 움직였던 병사들이 나의 비겁했음을 누구에게 말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적도 있었다. 빗물에 떠내려 온 폭발물로부터 우리 대원들을 보호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로 허겁지겁 그 자리를 피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가고 자책감이 흐려지면서 그 사건을 이야기할 때만 마음에 걸리곤 했었는데 눈앞에 나타난 차 소위의 모습은 이렇게까지 꾸겨져 있으니 어찌해야 옳단 말인가?
그래 나는 차 성근을 여기서 처음 만난 것으로 해 두자. 강원도 양구에서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내 눈 앞에 나타난 이 친구를 잘 보살펴 주는 것이 지금의 내 몫인 것이다.
“왜? 폴이 너무 버터 냄새가 나나? 예수 이름만큼이나 유명한 바울! 좋은 이름 아냐? 주변 사람들이 다 폴, 폴 하니까 한국에서도 내 이름이 폴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하하하”
“하기야 수십 년 쓴 이름이니 뭐…”
그도 이쯤에서 나에 대한 궁금증을 접기로 한 것 같았다.
“차 형! 남미에서는 주로 무슨 일을 했소? 우리 공장 대부분 일꾼이 남미 사람들이거든, 그래서 말인데 차형이 낮 반 작업반장을 맡아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아이고 그런 소리 하지도 마쇼, 그냥 밤 반일이나 합시다, 괜히 낮에 돌아다니다가 이민국 사람들한테 잡히면 골치 아파지거든, 요즘은 교통 티켓 떼다가도 신원확인이 안 되면 잡아 간다는데…”
그는 한참 동안 옛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스스럼없이 자기 신분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아니 그럼 영주권도 없단 말이요? 조 반장 이놈 안 되겠는데!”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공연한 엄포를 놔 봤다.
“아, 그럼 모르고 계셨군요. 하숙집 할머니가 조 반장한테 다 말했다고 하던데.”
여태껏 당당하고 자신만만하던 차 성근은 어디로 가버리고 갑자기 창백한 얼굴을 가진 한 늙은이가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는 체하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차형 만약에 내가 영주권 내는데 스폰서가 되어 준다면 낮 반 반장 일을 맡아주겠소?”
아주 힘든 결심이나 한 듯이 슬쩍 그의 마음을 떠 봤다.
“물론입죠, 근거가 없어서 그렇지 영주권만 만들 수 있다면야 무슨 일인들 못하겠소?”
-그는 다시 깊은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가 아주 튼튼한 동아줄로 허리를 단단히 묶어서 이 미국땅위로 끌어올려 놓아주지! -
다음날 아침 수십 명 되는 낮 반 멕시칸들에게 차형을 내 동생이라고 소개시켜 주었다.
“엘 에스 미 엘마노”
오늘부터 이 사람이 너희들 매니저니까 잘 모셔야 한다고 단단히 일러주었다.
“엘 에스 엔카르가드 데스데 오이”
멕시칸 일꾼들은 새로운 매니저가 왔다는 사실엔 별로 흥미가 없다는듯 자기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부터 낮 반은 차형이 책임지기로 했으니 취임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요?”
차형이 서슴없이 앞으로 나서더니 유창한 남미 말로 훈신지 인사말을 한참 동안 했다. 수십 년 전의 특소 소대장 같은 위엄이 엿보였다.
그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작업장 사무실 조 반장 의자에 앉으면서 일에 대한 걱정과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다. 우선은 모르는 일 있으면 조 반장을 수시로 불러 대고 12월부터 혼자 해결하기로 했다.
“사장님 그러면 조 반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공연히 나 때문에 자리 뺐기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네요.”
“미스터 조는 차형 덕에 이 층 재단실로 올라갔지, 오래전부터 재단일 배우게 해달라고 졸라댔었는데 낮 반 맡을 사람이 없어서 여태껏 버텨왔거든…”
12월 첫 주 월요일 아침 일찍 차형은 말쑥한 차림으로 출근했다. 머리카락 몇 올을 끌어올려서 벗겨진 이마를 가렸다.
“폴 박 사장님 신고 받으십시오!”
“아니 이거 왜이래? 여기가 뭐 군댄가, 신고는 다 뭐야 그만두라고…”
“신고합니다. 차 성근은 OO년 12월 1일 부로 낮 반 반장직을 명 받았습니다!”
그는 마치 육이오 때 북한으로 끌려갔다가 제 삼국을 통해 남한으로 다시 돌아온 노병이 국방부 장관에게 하듯이 거수경례까지 하면서 신고했다.
“차형 이거 원 쑥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데 이렇게 의식(儀式)을 차리니 내가 답례로 덕담하나 합시다. 육사 나온 사람 앞에서 화랑 5계 이야기해도 되나 모르겠네, 사실은 그게 육사 전유물이 아니고 원광법사의 세속 5계에서 따 온 건데 그 세 번째로 교우이신(交友以信)있지요, 우리 이거 한번 멋지게 지켜봅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이해하고 옛일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그의 생활보장과 체류신분을 약속하고 그는 신의를 갖고 내 사업의 동반자가 될 것을 말없이 약속했다.
“오후에 변호사 사무실에 갑시다. 공 변호사 얘기로는 브라질에 있는 아내와 딸 서류도 이번에 함께 넣어보자고 하던데.” (文)
약력:
최 문 항 (CHOI MOON HANG)
중앙대학교 약학대학 졸업
대한민국 육군 ROTC (7기)
1975년 미국 이민
제25회 한국일보 문예작품 공모전 생활수기부문 입상 (미주 한국일보 주최)
제8회 이민 문학상 단편소설부문 당선 (크리스천 문학가 협회)
미주 한국문인협회 회원
현재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개인사업 중
전화:714) 953-6616 FAX:714) 953-1912
e-mail: info@belairmach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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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영화를 보는듯 생생한 경험담이 담긴듯한 얘기가 너무나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습니다.
어쩌면 그토록 묘사가 자세하고 긴장감이 돌게 표현하셨는지 정말 대단한 글솜씨입니다.
여태껏 읽어본 단편소설 중에서 이처럼 표현력이 특출한 소설은 제 경험으로는 없는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