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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협회 이월란 시인의 시집 '오래된 단서'가 출간되었습니다.



* 목차
* 머릿말
모어가 자라고 있는
신비로운 뭍으로 가고 싶을 때마다
죽은 말들을 화석에 새긴다
엄마의 혀로도
나는
아직도 나를 발음하지 못하는데
바람의 뒤태를 한 줄기씩 감아쥐면
닳고 닳은 해안 따라
귀청을 때리는 바다의 말
돌아보니 뿌리 깊은 섬
섬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어느 섬인들 그리운 뭍이 없을까
아침 해가 떠오르면
따라서 둥둥 떠 있는 혀

* 책속에서

詩人과 是認 그리고 矢人

詩人의 가슴으로 사는 어느 시인 아닌
시인의 말
詩人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아무런 기척 없이
변변한 찬도 없이
눈부신 후광도 없이
망설임의 겁도 없이
詩人의 밥을 지었더니

詩人은 是認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하네요
결핍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
거짓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
교만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
허물을 시인할 줄 아는 사람

화살을 만들어 누군가를 조준하는 矢人이라면
화살을 만들어내며 사는 시인의 몸이
늘 어딘가에 박히기를 갈구하는 시인의 몸이
화살을 본뜬 상처의 도가니가 되고 말겠네요

是認할 줄 아는 詩人
살 속이 아닌 가슴속에 박히는 화살을 만드는 矢人

시위를 당기는 마음에
詩人의 정곡에 먼저 와서 박히는 활자 앞에
오늘도 나는 백지 위에 과녁으로 서 있어야 하네요

* 출판사 서평
〈문학의전당 시인선〉 230. 2009년 계간 『서시』 신인상으로 등단한 이래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해 온 이월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사유와 감각의 도록(圖錄)과도 같은 ‘시간 예술’로서의 서정시의 속성을 충실하게 보여준다. “모어가 자라고 있는/신비로운 뭍으로 가고 싶을 때마다/죽은 말들을 화석에 새긴다”는 시집 첫머리의 말은 그러므로 그의 시편들이 구사하고 있는 정공법에 대한 실존적 고백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편들은 단순히 아늑한 동일성의 서정보다는 열정적으로 자신에 대해 묻고 따지는 일종의 ‘질문 의지’를 통해 구현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자신이 걸어갈 길에 대한 깊은 성찰과 궁극적 자기 긍정으로 귀일한다. 그의 시편들에서 모든 존재자는 시간의 운명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며, 특별히 시간의 흐름이라는 물리적 과정에 의해 선택 배열되는 시인의 사유와 감각은 지나온 시간의 상처를 누그러뜨리면서 더욱 근원적인 질서 쪽으로 자신을 구성해간다. 이번 시집은 그러한 근원적 시간에 대한 매혹과 부채감을 동시에 환기하는 쪽으로 강화되면서 시인으로 하여금 오랜 기억을 통해 자신만의 아름다운 존재의 전환을 꿈꾸게 한다. 이월란 시인은 그렇게 ‘실재/환(幻)’의 경계 위에서 더 나은 자신을 향한 에너지를 응집시키고 그러한 꿈꾸기 과정이 자신이 써가는 시의 가장 큰 내질(內質)임을 일관되게 견지함으로써, 열정과 사랑 가득한 심미적 결실의 과정을 가감 없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자기 탐구와 시적 자의식, 그리고 사랑의 서정

1.

두루 알려져 있듯이, 서정시는 ‘시간’을 가장 커다란 방법적 기제로 삼는 언어예술이다. 이는 서정시가 시간 자체에 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정시가 시간 속에 불가피하게 놓인 사물의 존재 방식을 표현한다는 것을 함축하기도 한다. 이월란 시인의 『오래된 단서』는 이러한 ‘시간 예술’로서의 서정시의 속성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사유와 감각의 도록(圖錄)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특별히 심혈을 기울여 자신을 탐구하면서 자신이“죽은 말들”을 넘어“모어(母語)”의 신비에 다다르는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과정을 거쳐 궁극적자기 긍정으로 귀결하는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전쟁의 유물처럼
어딘가에 지뢰가 숨어 있으리라 여겼다
적들의 교란은 통신망 밖에서 무사하여
한 치의 오차 위에서만 잠이 들고
종종 제한속도를 넘어버린 미친 질주로도
촘촘한 지뢰망으로부터 자유롭진 못하리라 여겼다
방금 출고된 신차처럼 매끈한 몸뚱이로도
무섭게 나뒹구는 날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리곤 어디론가 이송되리라 여겼고
적재 유무만을 살피고 통과시켜버린
검문소의 허점이 눈앞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날이 쉬이 있으리라 여겼다
일상의 평화를 악용한 심리전의 교묘한 술책이
목줄을 감아쥐는 날도 있으리라 여겼다
훈련 삼아 몇 명의 사상자가 나기도 하리라
그리곤 절벽 아래서 수직의 높이를 끝도 없이
타고 오르는 그런 것이라, 여기기도 했던 것인데
하, 단조롭기 짝이 없다, 사는 것이
새겨 보건대, 옹졸하기 짝이 없는 것이기도 하여서
높은 적중률로 불티나게 팔리는
종합문제지와도 같은 것이어서
기존의 문제들이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해묵은 시험 같은 것이어서
맞추지 않아도 길이 되는 목숨 앞에
맑은 눈으로 응시하면 안개 속에서도 길이 나고
어둠 속에서도 동공이 먼저 알고 커지는
홑진 길이었다, 진정
함정은 없었다, 함정은 내가 만들어내고 있었다
—「함정이 없다」 전문

시인은 ‘나/적(敵)’의 대위법(對位法)을 통해, 그리고 ‘전쟁’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탐구하려고 한다. 삶 어딘가에 치명적 지뢰가 숨겨져 있고, 적들은 자신을 교란할 것이고, 평화를 악용한 교묘한 심리전이 목줄을 감아쥐리라 여겼지만, 삶은 그런 것보다 훨씬 단조롭기 짝이 없을 뿐이다. 결국 삶이란 적과의 치열한 전쟁이 아니라 “옹졸하기 짝이 없는 것”이고 나아가 “높은 적중률로 불티나게 팔리는/종합문제지”처럼 해묵은 일임을 자각해간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함정은 어디에도 없고, 다만 자신이 만든 함정만이 있었다고 시인은 고백해간다. 결국 이는 ‘전쟁’도 없고, ‘적’도 없고, ‘나’를 향한 함정만이 스스로를 경각(警覺)하게 한다는 성찰과 다짐의 시편인 것이다.

클릭을 하시면 이월란(移越欄)이 뜹니다
나를 보고 싶어 이월란을 클릭한다
내게로 넘어온 계정을 찾는다
이전의 결과를 추적한다
내가 넘겨받은 기간은 무한대
마감일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곧 영원이다
내일로도 넘어가고, 다음 주로도 넘어가고
다음 달로도 넘어가고, 다음 해로도 넘어간다
전액을 넘겨줄 다음 회기는 여전히 안전한가
옮겨온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고
전해진 경로는 말끔히 지워져 있다
손에 있는 활자나 숫자들의 기원은
검고 때로는 붉은 잉크 위에서 감사를 마쳤다
전생에서 내세로 넘어가는 얇은 장부 속
단식과 복식 부기가 번갈아가며 달을 넘기고
또 해를 넘겨 왔겠다
아직 끝나지 않은 손익계산서
어디선가 고스란히 넘어온 항목과 잔액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던 신생의 거래내역은
미수금처럼 마이너스로만 뜨는 기장 사무실에서
복사만 시켜도 자동으로 불러오고 자동으로
넘어온다
—「이월란」 전문

‘이월란’이라는 동음이의어의 펀(pun)에서 착상된 이 시편은, 시인의 남다른 자기 탐구의 열정을 활달하게 보여준다. 시인은 ‘나’를 보고 싶어 ‘이월란(移越欄)’이라는 ‘나 아닌 나’를 클릭해본다. 그런데 어느새 ‘移越欄’은 ‘나’가 오랜 세월로부터 넘겨받은 시간을 성찰하게 해준다. 가령 그렇게 시인은 선순환하는 자신의 생애를 생각하면서 “손에 있는 활자나 숫자들의 기원”을 떠올리고 “어디선가 고스란히 넘어온 항목과 잔액이/문신처럼 새겨져있던 신생의 거래내역”을 사유함으로써 자신의 생을 긍정해간다. 아마도 그 과정은 “통용되지 못할 언어로 봉인되어/내 손을 떠나 버린 편지 같은 이야기”(「변경(邊境)」) 같은 것일 터이다.


2.

다음으로 우리가 접하는 이월란의 음역(音域)은, 바로 ‘시(詩)’를 향한 그녀의 치열한 자의식에 있다. 대체로 서정시는 인간의 힘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비극성의 차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염없이 그 안에서 숨 쉬는 어떤 긍정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실존적 슬픔을 알게 해준다. 이월란 시편은 이러한 ‘시’의 불가피한 존재론을 노래하는 세계이다. 그녀는 자신을 감싸 안고 있는 ‘시’라는 불가항력의 조건을 자신의 시로 재현함으로써, 자신이 견지하는 예술적 사유와 감각을 지속적으로 선보여 간다. 여기서 이월란 시인이 발화하는 ‘시’란, 자신의 실존을 가능케 하는 호환할 수 없는 언어 방식인데, 그만큼 시인은 ‘시’에 관한 메타적 사유와 감각을 줄곧 향하면서‘시’가 언어의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현실을 견디고 넘어설 수 있는 언어적 양식임을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다. 그렇게 시인은 ‘시’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는 남다른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詩를 쓰는 일은
마치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
꽉 부여잡고 있는 것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내가 모르는 그 시인은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사망 소식처럼
어느 백화점의 파산 소식보다도 작은 놀라움으로
그렇게 잠시 스쳐갔을 뿐이었다
죽었구나

장담이 아닌 불안으로
믿음이 아닌 의심으로
대답이 아닌 물음으로
결론이 아닌 전제로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로

멀쩡한 삶 속에서 어딘가 자꾸만 아파오는 비상식의
신열이 고스란히 고여 있는 행간에서
떨어져 내린 그는
추락했을까, 구조되었을까

아랑곳없는 詩만 아직도 난간을 붙들고 있다
하얀 백지 위에서
—「유고시집」 전문

이 시편 역시 “詩를 쓰는 일”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담고 있다. “구조를 기다리며 난간에 매달리듯, 무작정 그것을/꽉 부여잡고 있는 것”이라는 비유는 ‘시 쓰기’의 운명적 절박함을 함축하는 것이지만, “장담이 아닌 불안으로/믿음이 아닌 의심으로/대답이 아닌 물음으로/결론이 아닌 전제로/느낌표가 아닌 물음표로” 씌어지는 ‘시’는 그 자체로 실존적 물음의 양식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 쓰기의 자의식으로 충일했던 어느 시인은 “신열이 고스란히 고여 있는 행간에서/떨어져 내린” 후에 유고시집을 백지 위에 남겼다. 이를 두고 이월란 시인은 “아랑곳없는 詩만 아직도 난간을 붙들고” 있는 자신의 실존적 상황을 이어간다. ‘시’가 가지는 양식적 한계와 가능성을 함께 노래한 이 시편은 그만큼 “소음이 목청을 잃고 어스름한 소실점을 따라”(「저녁의 내력」)가면서 “눈을 감아야만 보이는 것”과 “침묵 속에서만 들리는 것”(「요가」)을 경험하는 시의 직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그는 ‘시 쓰기’의 자의식을‘是認하는 矢人/아랑곳없는 유고시집’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외줄기 타고 오른 저마다의 길”(「내부순환도로」)을 통해 다다른 시인으로서의 존재론을 선명하게 이야기한다.


3.

모름지기 모든 존재자는 현실에서 물질적 존재 방식을 취하다가 일정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소멸해가게 마련이다. 생성과 성장과 소멸 과정은 모든 존재자의 실존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멸이란 그 자체로는 비극적이지만, 누구에게나 편재적으로 주어진 과정이므로, 시인으로서는 그것을 심미적으로 해석해야 하는 책무를 부여받게 된다. 이월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생기 있는 것들의 움직임과 함께, 소멸해가는 것의 잔상(殘像)을 노래함으로써 이러한 책무에 적극 부응해간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만가(輓歌)가 아니라 심미적 리듬을 지닌 새로운 생성의 노래로 몸을 바꾸기도 하는데, 이는 시인이 비극적 세계관을 넘어 역설적 생성의 에너지를 사물의 소멸 형식에서 찾고 있음을 알려주는 핵심적 표지(標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소멸의 형식을 탐색하면서도 모든 존재자들의 역설적 신생을 꿈꾸는 긍정의 시인인 셈이다.

뼛가루가 수액으로 흐르는 나무들이 있다 한다
가을이 와도 떨어지지 않는
죽은 자들의 이름표를 잎사귀 대신 달고
비명(碑銘)을 응시하며 자라는 나무들이 있다 한다
사체 위에 꽃을 피우는 잔인한 정원
영구차 같은 계절이 다녀갈 때마다
영혼의 옷을 갈아입는 곳
뿌리로 만지는 유골마다 추억을 빨아올리며
사자(死者)의 재로 숨 쉬는 나무들
내세의 안락으로 헛배 부른 봉분 대신
무성한 숲이 전생의 밤을 불러와
산책로를 따라 걷는 산목숨들은
나무가 되어 숲으로 같이 운다 한다
나는 살아 있고 나무는 죽어 있던 땅
내가 죽어서야 나무들이 걸어다닌다 한다
맑아진 피가 수액으로 도는
나무들이 넋으로 날아다닌다 한다
잠시 뿌리내린 땅, 사심 한 점 꽃피지 않은
마른가지로도 평안히 그늘 한 뼘
키워내게 되었다 한다
밤새워 별빛의 소나기를 맞고
울긋불긋 피 끓는 대지의 가을이 와도
이제야 식어 내리는 더운 피
땅만 가리키던 열손가락
그제야 하늘 향해 뻗고 싶어
나무가 되었다 한다
—「수목장」 전문

‘수목장(樹木葬)’이란, 화장한 뼛가루를 나무의 뿌리 주위에 묻어 그 나무와 함께 상생한다는 섭리에 근거한 장례 방식이다. 그러니 시인으로서는 “뼛가루가 수액으로 흐르는 나무들”을 상상할 만도 하다. 가을이 와도 죽은 자들의 이름을 달고 “비명(碑銘)을 응시하며 자라는 나무들”은, “영혼의 옷을 갈아입는 곳”에서 뿌리로 만지는 유골마다 추억을 빨아올리며 죽은 자의 재로 숨을 쉬어간다. 그렇게 맑아진 피가 수액으로 도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이제야 식어 내리는 더운 피”를 말갛게 씻고 스스로가 “그제야 하늘 향해 뻗고 싶어/나무”임을 알아간다. 이는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기록되기를 열망”(「화성인」)하는 마음을 기저(基底)로 하면서, “저렇게 아름다운 주검은 처음”(「 노을」)임을 발견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한 장면들을 통해 시인은 ‘수목장’의 죽음을 새로운 생성의 질서로 전이시켜가게 된다. 그러한 질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말할 것도 없이 대상을 향한 ‘사랑’의 마음일 것이다.

첫 페이지의 의혹을 넘겨버린 것도 세월이었다
더 이상 번역하지 않아도 되는 당신을 눕혀두면
눈 밖에 난 활자들도 어둠을 먹고 자란다

신비롭게 제본된 팔다리를 흔들어본다

사서처럼 당신을 들고 오던 날 편협한 장르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었다
당신을 펼치고도 늘 화자였던
나는 바깥이 그리운 아내가 되고
숨 쉬는 것조차 다른 당신을 매일 덮었다

아이들은 생소한 이야기를 시작한 지 오래다

나의 눈높이로 들어 올린 당신은 한 번씩 버려진 문장처럼 뚝 떨어진다
글자보다 여백이 많은
감명 깊은 나라로 떠난 여행길에서도
당신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

개미의 길처럼 작은 통로로 끊임없이 사라지는 주인공을 따라오는 사이
당신은 헌책방의 고서처럼 누렇게 뜨고 있다
신간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중략)…

평생을 먹어도 배가 고픈 우리는
간단한 줄거리를 오래도 붙들고 있다
어느 날은 율법처럼 서 있던 당신을 성경 옆에 꽂아두기
도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꺼내어 일기를 쓴다
어느 페이지엔가 나의 혼을 접어 두었었다
—「당신을 읽다」 부분

이 시편은 ‘당신’이라는 대상을 향한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적고 있는데, 그 마음이 번져가는 운동을 시인은 ‘읽다’라는 동사(動詞)로 표상하고 있다. ‘당신’을 읽어가는 과정에서 시인은 세월을 따라 “첫 페이지의 의혹을 넘겨버린 것”인데, 이제 시인은 ‘당신’을 향해 ‘번역/활자들/제본/장르’ 등의 계열어들을 수반하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는 ‘사서/화자/아내’가 되어간다. 그렇게 “나의 눈높이로 들어 올린 당신은 한 번씩 버려진 문장처럼” 떨어지고, ‘나’는 도대체 ‘당신’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는데, ‘당신’이라는 “한 끼의 그리움을 번역”하면서 시인은 “더 이상 속독이 되지 않는 느린 벤치 위”에서 ‘당신’을 읽고 가는 바람을 만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당신’을 꺼내 일기를 쓰고, 어느 페이지엔가 ‘나’의 혼을 접어 두었던 시인의 그리움과 열망이 손에 잡히는 듯하다.
이렇게 현실적 대상이든 초월적 대상이든, 이월란 시에는 자신이 흠모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의 힘이 가득 담겨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수한 정신적 과정에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삶의 원리로까지 부상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힘을 시인은 성숙한 시선으로 바꾸어가면서 특유의 타자 지향성으로 만들어간다. 그래서 이월란의 시편은 생명체로서의 존재 증명에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심미적으로 실증해준다. 그렇게 그녀의 시편은 외롭고도 절실한 목소리의 형태로 일종의 대상(代償)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사랑의 결여 상황을 넘어서는 긍정의 회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미디어 서평

이월란 시편의 핵심에는 ‘자아’와 ‘시’와 ‘사랑’의 문제가 가득 출렁이고 있다. 그녀의 시편은 자기 탐구와 시적 자의식 그리고 사랑의 서정이 가득한 세계로서, 구체적 경험의 매개가 없이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고유한 속성을 두루 구유(具有)하고 있다. 근대의 이면을 꿰뚫는 디오니소스적 혜안을 줄곧 작법의 원리로 택하면서 그녀는 현실에서의 근원적 사라짐의 속성을 시에서의 탈환 과정으로 완성해간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시간 경험을 아름답게 그려 보여준다. 그 근원적 속성을 그녀는 자기 탐구와 타자 사랑의 시 쓰기 과정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이 마치 시인으로서 가야 할 실존적 도정이자 불가피한 존재 이유라는 듯이 말이다. 그 길이 참으로 애잔하고 융융하고 아스라하게 깊다.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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