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4 04:50
창작이란 사회가 구현하는 목표에 함성을 지르는 주체도 아니다. 또한 작가는 창작이 내딛는 방향으로 사회가 변모해 줄 것을 성급히 요구해서도 곤란하다. 다만 인간의 뜨락에 미의 씨앗을 파종하는 것이다. 문학이 물신적 상상의 가치에만 집적하여 판각된 관념의 편견만을 고집할 때 작품은 독자로부터 멀어지거나 문학은 허상의 옷을 입게 된다. 그러나 거짓으로 참말 하는 것이 문학의 수단이 될 때가 종종 있다. 박인애의 에세이 『수다와 입바르다』의 문학적 탈(가면)의 뒤에는 반드시 진실이 살아 있다. 그가 토로하는 언어적 표현의 분장은 순박한 미학의 변명을 획득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종종 현실을 초월 한다. 바람이 나뭇가지에 부딪히면 바람결은 잎을 끌어 내린다. 그는 창작을 통하여 그 바람결에 물감을 들이며 인간의 징검다리를 탄탄하게 놓고 있다. 그의 언어가 인간의 가슴에 떨어질 때 비로소 나무에는 찬란한 봄이 올 것이다. 이처럼 그의 문학은 인간의 삶을 미적으로 구체화시켜 궁극적 이상의 열매를 따려는 아름다운 꿈을 실천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작품의 성향은 사회 통념적 가치관의 물레로 옷감을 짠다. 그 옷감에 삶의 악보를 쓰고 있다. 새로운 꿈의 집을 짓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집에서 불을 피우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해답을 밥상위에 올리고 있다.
- 안익수의 『수다와 입바르다』 評釋 중에서
내게도 한쪽 문이 닫혀버린 순간이 있었다. 적의 야간 공습 시 적의 목표가 되는 것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해 불을 끄게 했던 등화관제燈火管制 훈련, 한줄기 빛도 허락되지 않는 차단된 공간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로 떨던 70년대의 어느 캄캄했던 밤처럼 말이다. 나를 위해 열려있는 또 다른 문을 보게 되었다. 문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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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라는 틀이 때론 즐겁고 행복하기도 했지만, 때론 부담스럽고 답답하기도 했다. ‘수다’의 사전적 의미는 쓸데없이 말수가 많다는 뜻이다.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기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사람을 낮잡아 ‘수다쟁이’, 순우리말로는 ‘가납사니’라 부른다. 이렇듯 수다는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부정적으로 많이 쓰인다. 그러나 수다를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어찌 보면 수다는 관계의 시작이다. 수다가 빠진다면 사람들과의 관계는 건조해져서 사무적이 되고 말 것이다. 수다는 숨겨두었던 마음을 밖으로 쏟아낸다는 측면에서 위험한 요소가 있긴 하나 내가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은 소통이었다. 마음을 열고 독자와 소통하며 가까워지는 자리, 그곳이 지면이었다.
책 제목을 『수다와 입바르다』라고 붙여보았다. 소리를 내어 읽으면 어감이 딱히 좋은 제목은 아니다. “입바른 소리를 잘한다.”는 말은 익숙한데, ‘입바르다’를 따로 떼어 놓으면 생소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입바르다’는 바른말을 하는 데 거침이 없다는 뜻이다. 소리를 내어 읽는 것보다 눈으로 읽으면 더 정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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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의 “행복을 나누는 수다”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행복한 수다를 떨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가 될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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