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Reset)

2024.08.13 14:08

성민희 조회 수:10

리셋 (Reset) 

  

성민희 

 

냉장고가 또 말썽이다얼음통의 얼음이 녹아내려 부엌 바닥이 흥건해졌다김칫병에서는 국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일단 전기 콘센트를 뽑았다풀이 죽어버린 채소랑 과일을 차고의 작은 냉장고로 옮기고 물 먹 은 종이처럼 늘어진 냉동고의 고기와 생선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맛있게 빚은 만두도 잘 재워둔 불고기도 소금 살살 뿌린 고등어도 모두 버려졌다.

 싱크대와 아이랜드 위는 온통 냉장고에서 나온 음식으로 난리법석이다겨우 두 사람 먹는 식탁을 위해 어쩜 이렇게 많은 것이 들어있었을까하나하나 들여다보며 그것도 버리기 시작한다구석자리에 들어박혀 곰팡이가 살짝 핀 명란젓갈이 있고 유효기간이 지난 치즈도 있다언제 만들어 둔 양념간장인가 싶은 것도 있고 정체 모를 소스도 몇 병 나온다하나 둘 버리고 보니 쓰레기통이 또 꽉 찬다벌써 몇 번째 갈아 끼우는 쓰레기봉지인지 모르겠다.

 

 수리 기사님께 전화를 드렸다내일 아침에 오신다니 그때까지 청소나 깨끗이 해 두자 싶어 서랍을 모두 꺼내어 식초 섞은 물로 씻고 냉장고 안도 구석구석 닦아내었다음식을 가득 안고 힘겨워 보이던 큰 덩치가 가뿐해졌다불빛 아래 하얗게 드러난 벽이랑 바닥이 해방해방이라며 환호하는 것 같다몇 달 치의 먹거리가 버려졌는데도 이상하다기분은 좋다.

 

 북새통 부엌을 일부러 외면하며 하루를 보내고 드디어 기사님이 오셨다요즘 제품은 컴퓨터 식이라서 한번 고장 나면 손을 볼 수가 없어요버려야 되요기사님은 냉정하게 말했다겨우 8년을 쓰고 버려야한다니 너무 아쉽지 않은가어제 저녁부터 아침 내내 청소를 한 것도 억울하고 새 냉장고도 구입할 생각에 속이 상한다턱 밑에 손을 괴고 식탁에 앉아있는 내가 딱했던지 기사님은 일단 한번 전기 연결이나 해보자며 전기선을 콘센트에 꽂았다갑자기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컴컴하던 냉장고 안에 환하게 불이 켜진다고개를 갸웃하던 기사님이 벽 안쪽의 작은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보고는 어작동하네한다어머나어머나나는 냉장고를 와락 안아주고 싶었다. “컴퓨터 식 기기는 과부하에 걸리면 멈추기도 해요그럴 때는 리셋을 하면 될 때가 있어요.” 리셋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새해라며 연하장이 무수히 날아다니더니 어느새 1월이 다 가고 또 2월이 되어버렸다새 달력을 걸며 뭔가 달라져야겠다는 다짐을 했는데한 달이 다 가도록 계획하고 결심한 일은 하나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타성에 젖은 일상이 선두에 서서 바쁘게 나를 끌고 다니기 때문이다새로 받은 시간에 정장을 입혀 품위 있게 걷고 싶었는데하루하루 미루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곰팡이가 슬어있는 욕망이나 폐기 처분해야 할 습관까지 안고는 허덕이며 가고 있는 나를 본다.

 새롭게 시작하려고 나무는 해마다 죽는다고 하던데 나는 언제까지 죽일 것과 살릴 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세월에 밀려서만 다닐 건가하얗게 몸을 씻은 냉장고처럼 일상의 재정비는 2월이라도 늦지 않다리셋그래오늘부터 내 삶도 리셋(reset)이다.  중앙일보 2.6.2023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3 [평론] 미주 수필의 디아스포라적 이미지와 특성 성민희 2024.08.13 35
172 [한국소설] 운 정 성민희 2024.08.13 31
171 축하받아 마땅한 날 file 성민희 2024.08.13 85
170 띠앗 성민희 2024.08.13 11
169 돌잔치에서 흘린 조카의 눈물 성민희 2024.08.13 14
168 아이들이 '사라진' 감사절 만찬 성민희 2024.08.13 18
167 재미(在美) 수필가들은 ‘재미(fun)’ 있다고? 성민희 2024.08.13 15
166 엘에이 올림픽 라이온스(Olympic Lions) 성민희 2024.08.13 16
165 엘에이에 부는 ‘코로나19’ 열풍 성민희 2024.08.13 18
164 일상(日常)이 축복이었네 성민희 2024.08.13 18
163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성민희 2024.08.13 19
162 떠난 사람, 남은 사람 성민희 2024.08.13 17
161 남자의 보험 성민희 2024.08.13 14
160 침묵의 미덕을 생각한다 성민희 2024.08.13 17
159 그들은 그들 삶의 영웅이었다 성민희 2024.08.13 17
158 그 날을 위한 선택 성민희 2024.08.13 16
157 세 나라에 걸친 어머니의 삶 성민희 2024.08.13 12
156 말이 통해서 살고 있니? 성민희 2024.08.13 11
» 리셋 (Reset) 성민희 2024.08.13 10
154 사진으로만 남은 사람 성민희 2024.08.1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