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나라에 걸친 어머니의 삶

2024.08.13 14:10

성민희 조회 수:12

세 나라에 걸친 어머니의 삶 / 성민희 

 

그러니까 벌써 10여 년 전검정깨를 한 봉지 사 온 날이었다찬물에 훌훌 씻으니 물이 새까맣게 변했다몇 번만 헹구면 되겠지 했는데 물을 갈아줄 때마다 똑 같은 농도의 검은 물이 나왔다염색한 중국 깨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설마 ‘00장터라는 한국산인데 싶기도 하고마음이 오락가락해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엄마검은깨를 씻으니까 자꾸만 검은 물이 나오네요.” “그래안 그런데몇 번 씻으면 물이 깨끗해지는데...” "엄마검은깨니까 검은 물이 나오는 거 아니예요?" "~뭐라카노그라몬 흰둥이가 목욕하몬 허어연 물 나오고노란둥이 목욕하몬 노오란 물 나오고껌둥이가 목욕하몬 시커먼 물이 나오더나?" 엄마의 순발력은 아무도 못 말린다. 

 

어머니는 일제시대에 경상도 함안에서 태어나셨다네 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후 해방이 되자 한국에 나오셨다그때는 열여덟 살 나이에 이미 결혼을 하고 아들까지 둔 상황이었다귀국을 하여서는 시댁에 들어갔는데 한국말을 몰라 바보 취급을 당하셨다고 했다그때 일어난 시댁 식구들과의 에피소드를 들을 때면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하고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한국에서 32년을 살고 나이 쉰 한 살이 되던 해에 이번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다그러고 보면 어머니는 세 나라에 걸친 인생길을 걸어오신 셈이다유년에서 청년까지청년에서 장년까지장년에서 노년까지 살아온 세 나라 중 어머니는 어린 시절의 나고야를 가장 그리워하신다.

 

나는 몇 년 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나고야 옛 동네를 찾아 갔다노구를 이끌고 70 여 년 만에 돌아온 그곳은 기억 속의 장소가 아니었다어머니가 자전거를 몰고 다니던 개천가 흙길만 그대로 있을 뿐 식구들이 두레상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았던 그 집은 날씬한 양옥으로 변해 있었다장삿군의 외침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개천가에 앉아 어머니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신 듯 했다막내 동생을 자전거 앞자리에 앉히고 골목길을 달리던 씩씩한 시절도 있었노라 회상하는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까지 번졌다누나를 따라다니던 동생도자전거를 날렵하게 몰던 자신의 모습도참 예쁘다는 칭찬을 해 주던 동네 어른도 선명하게 보이는지 어머니는 허공으로 이리저리 먼 눈길을 보내셨다가슴 속에 살아 있는 앳된 소녀가 얼마나 그리웠으면 차가운 땅바닥에서 일어날 생각도 안 하셨을까우리는 그 동네를 몇 시간이나 빙빙 돌다가 해가 떨어질 무렵에서야 호텔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이제 아흔 여섯 살이 되셨다거동이 불편하여 보행기를 밀고 다니신다우리를 볼 때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나를 안 불러주실까 한숨을 쉬기도 한다하늘나라에 가면 우리를 못 보실 텐데 그래도 가고 싶으냐고 여쭈면 항상 대답은 똑 같다. “너희들 보는 건 좋은데너무 고생 시키는 것 같아 미안해서......” 이 연세에도 맑은 정신과 깨끗한 모습으로 계신 어머니를 뵙는 건 하나님이 주신 또 하나의 축복이다나는 기도한다하나님우리 어머니아버지 곁에 가실 때까지 지금처럼 건강하게 지켜주세요

 

[2022.5.8] 중앙일보 게재. / 어머니는 5월 6일에 돌아가셨다. 

댓글 0

파일 첨부

여기에 파일을 끌어 놓거나 파일 첨부 버튼을 클릭하세요.

파일 크기 제한 : 0MB (허용 확장자 : *.*)

0개 첨부 됨 ( / )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73 [평론] 미주 수필의 디아스포라적 이미지와 특성 성민희 2024.08.13 35
172 [한국소설] 운 정 성민희 2024.08.13 31
171 축하받아 마땅한 날 file 성민희 2024.08.13 85
170 띠앗 성민희 2024.08.13 11
169 돌잔치에서 흘린 조카의 눈물 성민희 2024.08.13 14
168 아이들이 '사라진' 감사절 만찬 성민희 2024.08.13 18
167 재미(在美) 수필가들은 ‘재미(fun)’ 있다고? 성민희 2024.08.13 15
166 엘에이 올림픽 라이온스(Olympic Lions) 성민희 2024.08.13 16
165 엘에이에 부는 ‘코로나19’ 열풍 성민희 2024.08.13 18
164 일상(日常)이 축복이었네 성민희 2024.08.13 18
163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성민희 2024.08.13 19
162 떠난 사람, 남은 사람 성민희 2024.08.13 17
161 남자의 보험 성민희 2024.08.13 14
160 침묵의 미덕을 생각한다 성민희 2024.08.13 17
159 그들은 그들 삶의 영웅이었다 성민희 2024.08.13 17
158 그 날을 위한 선택 성민희 2024.08.13 16
» 세 나라에 걸친 어머니의 삶 성민희 2024.08.13 12
156 말이 통해서 살고 있니? 성민희 2024.08.13 11
155 리셋 (Reset) 성민희 2024.08.13 10
154 사진으로만 남은 사람 성민희 2024.08.1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