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보험

2024.08.13 14:13

성민희 조회 수:14

남자의 보험 

 

  TV 채널을 돌리다가 눈에 확 띄는 장면에서 손이 멈췄다이마에 주름 세 줄이 깊이 패인 남자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 KBS에서 방영한 <남자여늙은 남자여>라는 다큐다.

 

요즘 들어 부쩍 칼럼이나 소설영화에 노인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예전에는 조용히 세월만 흘리고 살던 노인의 활동이 적극적이 되고 목소리가 커져 이제 기득권 세력이 되었다는 뜻일까시대를 지탱하는 주류 세대가 노년층이 되었다는 뜻일까.

   나 역시 청년기는 이미 떠나보낸 지 오래고 장년기까지 흘러간 처지이고 보니 늙음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다손수건을 적시는 남자의 눈물을 지나칠 수 없어 화면을 고정시켰다.

 

  변두리 쪽방촌에서 홀로 살아가는 남자가 자신이 노년에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20년간이나 공장장으로 일했지만 기계가 디지털로 바뀌면서 본인의 기술이 필요 없어져 결국은 밀려나왔다다른 곳에 취직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기에 그는 가족에게 빌붙어 사는 구박 덩어리로 전락되었다돈만 벌어다 주면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 하는 것인 줄 알고 가족과의 소통에 무심했던 결과는 어려울 때 서로 보듬고 의지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젊어서 누리던 가부장의 권리는 더 이상 용납이 되지 않고 이혼으로 이어졌다그는 막강한 권위로 아내와 아이들의 대장 노릇만 하며 살아왔는데큰 소리 치며 대우를 받았는데막상 은퇴를 하고 나니 사회적 지위는 물론 가장의 위치마저 박탈되었다며 한숨이다. “돈 못 버는 사람은 아빠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는 눈물을 닦는다.

 

  남자의 자탄(自歎)에 대해 여자도 할 말이 많다남편들은 돈을 벌어다 주는 것으로 가장의 역할을 다했다는 그 생각이 문제라고독박 육아와 살림남편의 무관심과 잦은 술자리 등에 지친 아내들은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는 가족을 위해 밥 해주는 여자애 키우는 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거죠.” 몇 명의 젊은 여자들이 찻잔을 앞에 두고 한 마디씩 한다.

  아내의 입장으로서 가장 이혼하고 싶을 때는 어떤 이유로 마음의 상처가 깊어질 때라고 한다남편의 경제적 무능 때문에 이혼을 결정하는 아내는 없다며 단호하게 말한다젊어서 와이프에게 잘 해두면 늙어서 호강한다니까한 여자가 농담처럼 말하고는 깔깔 웃는다.

 

  결론은 그렇다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연민의 정을 쌓는 관계를 만들라는 것이다그것은 은퇴나 경제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젊을 때부터 열정과 에너지를 밖으로만 쏟을 것이 아니라 부인에게도 나누어주는 것은 사랑의 보험을 들어두는 것과 같다그러면 사업에 실패했을 때나 퇴직 후노년에 그 보험이 효력을 발휘한다. “내가 불리할 것 같으니까 전략과 전술을 바꾼 거지요히히히

  젊었을 때 남편은 하늘아내는 땅을 복창시키며 가족에게 군림했다는 남자가 두 다리를 둥글게 벌리고 앉아서 잔뜩 쌓인 빨래를 개키며 하는 말이다이제 50대인 남자는 벌써 시대의 조류를 읽고 보험금을 열심히 붓는 중이다.

(중앙일보 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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