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벌써 15년 전이었나 보다. 어머니의 팔순 잔치였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노래방 기계에서 반주가 나오자 한국에서 온 언니 부부가 마이크를 잡았다.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 해. 흔들리지 말고’ 자꾸만 있을 때 잘 하라고 했다. 나는 생전 처음 들어본 노래였다. 무슨 노래 가사가 저래? 있을 때 잘 하라니. 자기들이 모처럼 미국에 왔으니 잘 대접해 달라는 소리인가? 우리들 보고 엄마를 잘 모시라는 소리인가? 자기는 멀리 있다는 핑계로 아무 한 일도 없으면서…. 신나는 리듬에 박수를 치면서도 머릿속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런데 요새 이 노래가 자꾸 떠오른다. 석 달 동안 손가락 부상으로 고생을 하고 나니 가사가 참 진리라는 생각까지 든다.

코로나19 팬데믹 격리가 시작되자 삼시 세끼 부엌에서 부대낄 주인을 위해 왼손가락이 장렬히 희생해 주었다. 오이를 다듬던 칼에 기꺼이 몸을 내어준 거다. 약과 붕대로만 버티기에는 많이 다쳤는데도 코로나가 무서워 병원에 갈 엄두는 못 내었다. 덕분에 완치 기간은 길어지고 주위 친구들은 반찬을 해서 나르느라, 남편은 설거지 하느라 고생했다.

평소에는 왼손을 얌체라고 생각했다. 왼손은 그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옆에서 얼쩡거리며 도와주는 역할만 할 뿐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 부엌의 고무장갑도 오른쪽 것만 구멍이 난다. 오른손은 매니큐어도 예쁘게 발라주는데 왼손은 어설프게 발라준다. 손톱을 깎는 것도 그렇다. 모든 것이 서툴러 오른손 한테 제대로 해주는 게 없는데도 대우는 자기가 받는다. 로션도 꼼꼼하게 발라지고 예쁜 반지와 시계는 자기 차지다.

그런데 이번에 다치고 나니 그게 아니다. 왼손의 도움 없이는 오른손이 너무 힘들었다. 제일 아쉬운 것은 컴퓨터에 앉아 자판기를 두드릴 수 없다는 거였다. 왼쪽 검지 첫 마디 끝이 조금 베였는데도 단 한 줄의 문장도 완성할 수가 없었다. 이번 기회에 왼손은 자기의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냈다. 왼손한테 쩔쩔매며 몇 달을 보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며칠 전 치과에 갔다. 아픈 사랑니는 발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한 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았던 이인지라 당연히 의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니 휑하니 빈자리가 느껴져서 자꾸만 혀를 갖다 댄다. 좀 더 신경을 쓰고 관리를 했을 걸. 후회도 된다.


세월은 혼자서 가지 않는다. 탄탄하던 생각도 경쾌하던 마음도 함께 가져간다. 육신의 에너지와 모양새도 가져간다. 내 삶을 영위해주는 모든 것이 하루하루 쇠락해가는 걸 느끼는 건 인생 고갯길이 내리막이라는 뜻이겠지. 그것과 헤어질 날이 가까웠다는 뜻이겠지.

팬데믹이라고 사방이 모두 닫혀버리니 친구들이랑 식당에 둘러앉아 메뉴를 뒤지던 때도 그립고 주일마다 성가대석에서 목청껏 노래 부르던 때도 그립고 어두컴컴한 영화관에서 좌석을 찾던 일도 그립다. 내 몸이든 주위 사람이든 환경이든 참말로 있을 때 잘 할 일이다.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는 단순한 유행가 가사가 아니다. 깊은 인생철학이다.  (2020년 8월 중앙일보 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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