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日常)이 축복이었네

2024.08.13 14:18

성민희 조회 수:18

일상(日常)이 축복이었네

 

 

딸이 이모티콘을 보냈다머리에서 열이 풀풀 나는 도깨비가 옆으로 찢어진 눈을 이마까지 치켜뜨고 씩씩댄다. “엄마꼭 피넛 버터를 먹어야 돼?” Target의 텅 빈 식품 진열대가 너무 충격적이라 내 딴에는 실감나게 사진을 찍어 가족 카톡방에 올렸더니 득달같이 날아온 딸의 꾸지람이다내가 괜히 피넛버터 사러갔다고 실토했나좀 더 수준 높은 걸 들먹일 걸... 후회하고 있는데 아들의 반응도 왔다어떤 안부를 물어도 굿’ 한마디우리의 전화벨 소리에는 미팅 중이라는 메시지애교 섞인 대화 시도에도 ‘nothing'으로 일관하던 녀석이 제법 긴 글을 보냈다두 손을 간절히 모은 이모티콘과 함께 제발요엄마집에만 계세요한다이 아이들이 언제부터 엄마한테 이렇게 관심이 많았지괜히 행복해지려고 한다.

 

요새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집집마다 효자 효녀 속출이다매일 안부 전화 하는 아이필요한 것 있으면 말만 하라는 아이아예 식료품을 사서 현관 앞에 던져두고 가는 아이 등어제는 혼자 사는 친구가 하소연을 해왔다딸이 아예 엄마 차를 자기 집으로 가져가 버렸다고 한다외출 금지령에 확실한 조처라며 마구 웃었다세상이 거꾸로 되었다자녀가 부모를 단속하느라고 난리라니.

 

달라진 게 아이들만은 아니다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 스케쥴을 확인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교회의 예배정기적인 각종 모임친구와의 약속이 사라졌다유일한 운동인 골프마저 금지다덕분에 시간이 널널해졌다얼마나 원하던 상황인가때론 ‘leave me alone'을 외치기도 했다내 시간을 빼앗겨야 할 때에는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그런데 지금이 바로 소원했던 그런 시간이다누구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해 내 시간을 쓸 수 있다그런데 마음은 왜 이리 허전할까일상을 붙잡아 주던 뼈대가 사라진 기분허공에 둥 뜬 것 같은알맹이가 비어버린 느낌이다.

저녁 찬거리를 걱정하며 마켓을 들락거리고식당에 앉아 메뉴를 들여다보고트레픽이 너무 심하다며 툴툴거리던 일이 이제는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공기처럼 물처럼 아무런 느낌 없던 소소한 일상(日常)이 이제 보니 축복이었다.

 

오늘은 내 서재 정리를 했다온갖 잡동사니가 나왔다여행 후 남은 중국일본유럽 돈도 나왔다이게 다 무슨 소용이람바깥으로 벋어가던 관심과 에너지를 안으로 모아보니 세상의 가치가 달라진다다이야반지보다 한 장의 휴지가예금통장보다 라면 하나가 더 고맙고 빌게이츠나 마크 저크버그보다 내 가족이 더 멋지다외출 전 옷 맵시를 거울에 비춰보던 일약속 시간을 놓칠까봐 스트레스 받던 일이 모두 내 삶의 꽃이었다내 시간을 빼앗아가던 사람이 나의 보배였다.

 

딸이 또 전화를 했다아예 페이스 타임이다. “엄마뭐 해?” 커다란 눈이 전화기 안에서 내 등 뒤를 둘러본다에구에구아무데도 안 가고 집에만 있단다하하하 웃는 딸의 웃음소리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하는 희망을 띄운다.

<3/24/2020> 중앙일보 이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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