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옥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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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카르페 디엠 (carpe diem)

2024.09.09 09:55

허경옥 조회 수:11

 

  파아란 하늘이 하얀 구름 몇 점과 노닥거리고 있다. 바로 어제 있었던 거친 비바람은 까마득히 잊은 얼굴이다. 태풍에 꺾이고 부러진 나뭇가지들로 심란하던 거리가 말끔히 치워져 있다. 길모퉁이마다 한자 높이로 쌓여 있는 나뭇가지들만이 태풍의 기억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숨이 턱턱 막히던 더위도 비바람에 떠밀려 일찍 떠나갔는지, 가을이 오려면 아직 날짜가 많이 남았는데 아침 공기에 벌써 선선함이 들어있다.

 

  덕분인지 이것저것 걱정거리로 가라앉았던 마음에도 햇볕이 반짝 든다. 이유없이 가벼워진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늘이 어두워 지면 비바람이 치고 끝이 없을 듯 몰아치던 태풍도 어느 순간 따사로운 햇살아래 숨을 죽인다. 이것이 우리들의 삶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고난의 무게가 아직 등허리를 휘게 해도 오늘 내 머리 위에서 화사하게 부서지는 햇살과 눈을 맞춘다. 언제 다시 먹구름에 묻힐지 모르는 오늘의 햇살, 가슴에 안을 수 있을 때 한껏 품에 안아 그 순간을 누린다. 카르페 디엠!

 

  함께 유학생 시절을 보냈던 사람 중에 시집살이를 고되게 하다 유학 오는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온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만날 때마다 미국 오기 전에 본인이 어떤 시집살이를 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에 한국에 살고 계시던 그 시어머니가 마치 미국에서도 옆에 졸졸 따라다니는 듯했다. 나도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 그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과거에 갇혀 남편과 둘이 오붓하게 보내는 현재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그녀가 참으로 안타까웠다.

나에게도 유난히 힘들었던 날들이 있었고 그때 깊이 패인 상흔은 오늘의 내 삶을 쉽게 무너뜨리기도 하고, 원하지 않아도 어두운 장막을 드리우곤 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으면 어제의 무게에 눌려 오늘을 제대로 살아 내지 못하기도 한다. 몇 번의 이런 뒷걸음질을 해 본 끝이라 이제는 어제 지나간 태풍을 오늘의 햇살 속으로 끌고 오지 않으려 한다.

 

  아침 산책길은 마른 곳보다 젖은 곳이 더 많다. 그러나 그곳에도 아침의 환한 햇살이 골고루 머물고 있다. 몇 달 전에도 몇 년 전에도 걸었던 같은 길에 같은 나무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무의 빛깔이 다르고 공기의 냄새가 다르다. 길도 어제보다는 더 닳아 패인 곳도 있고 새 흙으로 덮인 곳도 있다. 어제와 다른 모습을 더 찾아본다. 내가 찾아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 사라질 것들을.  내 눈에 담으면 내 하루 속에 들어와 귀하게 빛을 낼 것들을 가능한 한 많이 누리기 위해, 어제의 빗물을 머금고도 오늘의 햇살에 반짝 빛을 내는 나무와 꽃잎과 그 사이로 부드럽게 드나드는 바람에 눈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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