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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신춘문예]시/꽃 피는 공중전화/김경주

2003.01.04 09:31

최석봉 조회 수:598 추천:38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 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 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 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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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시간이 가고 있습니다 유령처럼.

그대를 비 내리는 창 밖에서 처음 보던 순간이 생각나는군요 나는 은유로 출렁이던 그대의 눈 속에서 무엇을 보았던가요 알 수 없는 세상의 거친 은유에 대해 나는 자주 연민합니다 어머니,아버지,고향,그리고 그대…,그래요 그대라는 계절을 타는 동안 나는 시를 썼던가요 한량없는 마음으로 나는 틈만 나면 노트에 나의 계절들을 옮기기 위해 애썼지요 오늘 첫눈 같은 당선 소식을 받고 무작정 수화기를 들었다가 마음에 주소하나 없이 떠다니던 그 손끝의 떨림에 대해선,맥없이 내려놓는 나의 어정쩡한 자세에 대해선 침묵하겠습니다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많습니다.詩 이전에 이미 詩이셨던,생각하면 눈물로 이루어지는 어머니,너무 야위어져버린 종아리로 오늘도 새벽에야 겨우 주무시고 계실 아버지,그리고 두분 당신이 지상에 내리신 희끗희끗한 눈발들 희경+현수,나경… 이승에 없는 누님,아직도 눈빛만 보고 나의 뒤통수를 아무런 이유없이 툭 때려줄 수 있는 고향들 희상 경석 봉섭 성환 진영 승필 계택,나의 파란 피 필용형,힘들게 공부하시는 진이형 등등, 끝으로 부족한 작품에 죽비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까지 살아 있어 주어 감사합니다.


●약력 본명 김병곤 76년 광주생 원광대 국문과 4년 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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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편들은 모두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여주었다.높낮이를 쉽게 가늠하기 힘든 작품들 중에서 당선시 한 편을 고른다는 것은 괴로우면서도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번갈아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고,선자들은 한여진의 ‘나의 서가’외 5편,권오영의 ‘투입구’외 4편,김경주의 ‘꽃 피는 공중전화’외 4편 등을 최종 후보작으로 정하였다.

이 세 편의 시들은 저마다 장단점이 있었다.‘나의 서가’외 5편의 시들은 평이한 서술로 진솔한 감정을 유연하게 드러냈지만,시적 수사에서 약세를 보여주었고,‘투입구’외 4편의 시들은 유전자 조작 실험쥐나 공룡알 화석 등을 통해 과학적 상상력을 독특하게 포착하고 있지만 이를 시적으로 전환시키는 데는 아직 미흡한 점이 있었다.

김경주의 ‘꽃 피는 공중전화’외 4편의 시들은 이런 약점들을 극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자들의 관심을 끌었다.삶을 객관적으로 투시하는 시선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는 동시에 사물의 핵심을 놓치지 않는 시적 역량이 신선하게 다가왔다.예를 들어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수화기를 타고 전해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가슴 속에 고스란히 박혀온다”와 같이 사물의 속살을 파고드는 그의 ‘꽃 피는 공중전화’는 당선시로서 손색이 없다고 판단되었다.다른 투고작의 고른 수준 또한 참고가 되었다.

최종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을,그리고 아깝게 탈락한 응모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 드린다.또한 신춘문예가 일회성 연례 행사가 아니라 모든 시인 지망생들에게 지속적인 분발과 자기 발전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황동규·최동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