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리를 찾습니다
2006.07.24 10:44
내 자리를 찾습니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조내화
학창시절, 설날 아침이면 오히려 늑장을 부리며 아버지와 말없는 신경전을 벌이곤 했었다. 동생들은 다 남겨두고 나 혼자만 새벽 공기를 가르며 십리 길을 가야하는 어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꽁꽁 언 몸으로 집안 어른들 집에 도착하면 차례가 시작되는데 나는 촌수가 낮은 관계로 내가 차례를 드리는 자리는 뒷방이나 마루이기 일쑤였다. 복잡하고 비좁아 절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차례가 끝나면 떡국 한 그릇을 먹는데 마루에 앉아서 먹든가 아니면 뒷방에서 서서 먹어야했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아래인데도 촌수가 높다는 이유로 따뜻한 어른들과 함게 아랫방에 앉아서 떡국을 먹는 모습이 부러웠다. 아마 이때부터 어디를 가든 내 자리가 어딜까 하는 망설임과 자리를 따져 보는 습성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몇 년 전 유럽연수를 갔을 때였다. 비행기 표를 받아 보니 내 자리는 앞쪽 한가운데였다. 가끔 유럽의 멋진 하늘과 구름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창가를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런데 내 자리에선 밖을 볼 수도 없고 통로 쪽으로 자주 나오려 해도 다른 사람에게 눈치가 보이는 그런 자리였다.
전국에서 모인 선생님들로 직급도 연령도 차이가 많았다. 처음 만나는 어색함을 덜어내려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며 선생님들과 어울렸다. 며칠이 지나자 선생님들끼리 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앉을 때와 버스를 탈 때의 자리가 새로이 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직급에 따라 모이고, 지역에 따라 모이고, 나이에 따라 모이고……. 타 시도에선 두서너 명이 참가했는데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나 혼자였고, 또한 타 시도에서 온 선생님들은 젊은 선생님들이 많다보니 내 자리가 이상해져버렸다.
주로 젊은 선생님들과 많이 어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식사 시간, 늦게 식당에 도착해 보니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어느 자리로 갈까 순간 망설여졌다. 다른 날 같으면 젊은 선생님들이 이리 오라며 손짓을 하건만 어느 한곳에서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내가 끼어들기를 바라는 눈치가 아니었다. 망설이고 있는데 한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세가 좀 높으신 선생님들과 교장, 교감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였다. 실은 그 자리를 피했었다. 연세가 높거나 젊은 선생님이라도 나보다 직급들이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냥 선생님들과 어울리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거기도 내 자리는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가장 어중간한 게 내 자리였다. 지역으로도, 직급으로도, 나이로도. 나머지 날들은 나이가 많은 선생님들과 어울리며 유럽연수를 마쳤다. 하지만 마음은 끝내 편하지 않았다.
교무실 내 자리는 앞쪽에 있다. 발령을 받고 학교에 처음 등교한 날, 선배님이 계셔서 자리를 양보했건만 교무라는 직책 때문에 그럴 수는 없다며 교장선생님께서 그 자리에 앉기를 강요하셨다. 다른 선생님들을 오른쪽과 왼쪽에 학년별로 줄 지어 앉아 있는데 나만 윗자리로 옮겨 앉은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의 자리가 조금씩 밀려 올라가 이젠 위쪽이 내 자리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자리가 내 자리가 아닌 듯하고, 남의 자리에 앉은 듯하여 불안하다. 아래쪽에서 위쪽을 바라보며 마음 편하게 지내던 자리가 어느덧 위쪽으로 바뀌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위쪽에서 아래쪽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면사무소에 근무하면서 마을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참석하자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장님의 회의시작 인사가 끝나자 마을 담당직원인 내가 마을 어른들에게 인사를 드릴 겸 오늘 회의안건을 이야기하려고 일어섰다. 그러자 아랫목에 앉아있던 마을 어른에게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어이 서기, 메가네(안경) 좀 벗고 이야기 하소.”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력이 나빠 안경을 끼었는데 이것이 어른들의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니 그보다는 아직 새파란 청년이 마을에 와서 어른들 앞에 일어서서 이야기 하는 것이 못마땅했나 보다. 이 어른들이 내 자리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새마을사업을 위해 담장을 헐고, 집에 손을 대는 일은 추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어르신 제가 눈이 나빠 안경을 끼었습니다. 어르신들 앞에서 당장 벗고 말씀드리고 싶지 만 벗는 순간 저는 어르신 얼굴을 볼 수가 없습니다.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며 내게 주어진 자리를 지키려 노력했다. 그 결과 다음 날부터 마을담장을 새로 쌓는 일이 시작될 수 있었다.
내 자리는 내 마음대로 만드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순간 나의 자리도 존재하게 된 것이다. 내게 주어진 자리의 주인은 바로 나인 것이다. 내가 원하여 그 자리에 있든 아니면 원하지 않았는데 그 자리에 떠밀려 있건 그 자리의 주인은 나이다. 그 자리를 얼마나 값있게 만들 것인가도 결국은 내 책임인 것이다. 윗자리만 올려다보며 불평만 할 것이 아니요, 내 자리가 낮다고 불평만 할 것이 아니다. 원하지 않았는데 떠밀어 올려졌다고 불평할 것이 아니요, 내 자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할 일도 아니다.
오늘도 회식 자리에 가서 자리 때문에 두리번거렸다. 아래쪽으로 치우쳐 앉아야 하나, 아님 위쪽으로 치우쳐 앉아야 하나……. 나는 아직도 내가 앉아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잘 모르겠다. 누가 내 자리를 좀 찾아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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