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 뒷굽을 자르다

2017.03.18 02:40

정국희 조회 수:8917

images.jpg


  

[천년의詩 043] 정국희 시집

신발 뒷굽을 자르다

 

이민자가 되살려낸 아름다운 고향, 그 고향의 고운 말

정국희 시인은 “객지 냄새 나는 둥근 달”이 되어 “홀로 울적한 시”를 쓴다. “텃세 센 잡수풀 휘저어/꺾꽂이로 꽂은 몸에 뿌리가 내린 것”만큼 고국에서의 삶보다 몇 배 힘든 고통을 이겨내야 한다. 생활의 고달픔보다는 인정스런 이웃이 없는 것이 이민자로서의 나날을 더욱 서럽게 한다. 머나먼 이국에서 혹시라도 잊어버릴까봐 어렸을 때의 우리말과 사투리를 기억해내 그때의 아름답고 정겨운 추억으로 시를 이룬다.

시인은 정겨웠던 고향의 풍경을 보여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깊숙이 자리 잡은 그리움을 드러낸다. 자신이 서 있는 이국과 먼 고향의 간격을 버티기 위해 방랑의 꿈으로 시를 풀어낸다. 시집을 넘길 때마다 마치 바람이 불고 지나간 듯 스친다. 시공간을 막론한 바람의 눈으로 시인의 세계는 풍요롭게 펼쳐진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다음에는 길을 떠나 “몸 없는 몸”으로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차분하게 말한다.

 

■ 추천사

몇 개의 단서가 없다면 그녀를 미국에 사는 시인으로 알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언어는 한국적, 전라도적이다. 정겨움 속에 담긴 그리움이 짙게 배어 있는 모습으로 그녀의 시는 우리에게도 이미 잊혀진 고향을 되살려준다. 그곳은 그냥 몸으로 태어난 곳이 아니라 먼 원초(原初)의 마음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그래서 한 디아스포라의 삶은 현실을 인식하면서도 과거를 재생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녀의 모습은 언제나 사라지지 않고 그녀의 원생(原生)으로 삶을 불러일으킨다.

고달픈 생활에도 진정성을 간직하려는 마음이 있는 한 우리는 고향을 잃지 않는다. 어른이 된 소녀가 바라보는 흐린 창밖에 순수의 바람결을 불어 보내는 곳, 오래된 사랑이 쌓여 있는 곳, 그녀의 시가 있는 곳.

─ 윤후명 시인·소설가·국민대 문창대학원 겸임교수

 

정국희 시인의 시는 쉽고 편안하게 읽혀진다. 시어의 선택이나 표현에 있어서 별다른 형용이나 수식을 피하는 대신 고향인 전라도 토속어를 적절히 배열함으로, 마치 ‘이야기꾼’의 이야기라도 듣고 있는 것 같은 친밀감을 더해, 독자들을 시의 보다 빠른 이해로 이끌어낸다. 또한 정국희 시인의 시 소재는 매우 다양하며 특히 사건에서 얻어지는 주제는 해학적이고 희화적인 표현으로 다루어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재미를 느끼게 한다. 비록 애증과 애환을 다루는 슬픔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시라 해도 구수한 재미를 맛보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옹골찬 덤인 것이다.

─ 문인귀 시인

 

■ 시인의 말

하루에 두 날씩 시간이 어서 가서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죽음이 가까이 와 있으면

집착도 욕구도 없어질 터

설령, 털썩 주저않을 일이 벌어져도

복장 두어 번 치고 큰숨 한번 내쉬고 나면 그뿐이겠지

만사가 귀찮은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후줄근한 입성에 궁상스런 몰골이라도

하늘을 이고 살고 싶다

낮에는 비탈밭에 푸성귀를 심고

밤에는 가마니를 구들삼아

노루새끼와 말동무를 할지언정

이승에서 살고 싶다

이제는 두 날이 하루에 갔으면 좋겠다

읽을 책은 너무 많고

내게 남은 시간은 자꾸 줄어들기 때문이다

 

■ 약력

『창조문학』 등단. 미주한국일보 문예공모 시 부문 입상. <시와사람들> 동인. 미주한국문인협회 이사. 미주시문학회 회장. 시집 『맨살나무 숲에서』.

 

■ 차례

I

디아스포라의 밤 ──── 13

밤의 세레나데 ──── 15

나의 아바타 ──── 16

소 ──── 18

영정사진 ──── 20

책임 ──── 22

오냐 ──── 24

영지버섯 ──── 26

선인장 ──── 28

시간 ──── 29

아내 ──── 30

언젠가 ──── 32

포쇄 ──── 34

기도 ──── 36

바람아 ──── 38

선 ──── 40

 

II

물방울 ──── 45

신발 뒷굽을 자르다 ──── 47

바람 ──── 48

정력 때문에 ──── 50

蘭 ──── 51

단전호흡 ──── 52

나이 값 ──── 54

빛 ──── 56

대책 없는 수컷 ──── 58

그 남자 ──── 60

그늘 ──── 62

무서운 세상 ──── 64

등을 내준다는 것 ──── 66

달이 시를 쓰는 곳 ──── 68

눈빛 ──── 70

 

III

향수 ──── 75

패싸움 ──── 77

사주팔자 ──── 79

상현달 ──── 81

남의 말 ──── 83

질투 ──── 85

가게에서 ──── 87

오늘 ──── 89

소리 2 ──── 91

소리 3 ──── 93

완도 ──── 95

동창회 ──── 97

 

IV

헬멧 ──── 101

바람 휑한 날은 ──── 103

초상화 ──── 104

떠남은 도착을 위함이라 ──── 106

일상의 길목 ──── 108

국화 ──── 110

쟈카란다 ──── 112

바람의 습성 ──── 114

아름다운 회상 ──── 116

얕은 잠 ──── 118

시를 품고 살아서 ──── 120

집으로 가는 길 ──── 122

엘에이 다운타운 ──── 124

■ 해설 이민자가 되살려낸 아름다운 고향, 그 고향의 고운 말 | 이승하 ──── 140


회원:
2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28
어제:
23
전체:
93,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