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숙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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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2016.11.07 13:39

쟈스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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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쟈스민

  

                                                                홍인숙(Grace)
    

    

나에게도 예쁜 꽃잎을 보면 책갈피에 끼워 말리고 꽃 이름이나, 꽃말들을 외우며 꿈을 가꾸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꽃 이름 중에 '쟈스민'을 발견하고 그 예쁜 이름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쟈스민꽃은 무척 작다. 빼곡한 초록잎 사이로 희고 예쁜 꽃들이 만발하면 꼭 반짝이는 별 같아서 나는 별꽃이라 부른다. 한 줄기 바람이라도 다녀갈 때면 쟈스민은 작은 꽃잎들을 하늘거리며 하늘 높이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 낸다.
  
조그만 가게. 하루에도 수 없이 드나드는 사람 중에 유난히 인상적인 모녀가 있었다.
사십 중반의 엄마와 십대의 가냘픈 딸이었다. 딸은 우윳빛 얼굴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아주 예쁜 소녀였고, 언제나 색색의 모자를 쓰고 있었다. 유난히 다정한 그 모녀는 항상 가게에 들어서면 여러가지 색깔의 헤어밴드나 머리핀을 샀다.
  
물건을 고를 때에도, 엄마는 각가지 색깔을 딸의 얼굴에 대어 보며 예쁘다고 권했고, 소녀는 연신 거울에 자기의 모습을 비춰 보며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이곤 하였다.
카운터에 와서 돈을 지불할 때에도 항상 엄마를 꼭 껴안고 "Thank You. Mom." 하고 속삭이는 다정다감한 소녀였다.

봄볕이 눈부시게 내려와 유리창 가득 부딪치던 날. 그날도 모녀가 환한 모습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그리곤 역시 헤어밴드를 고르고 있었는데 무심히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소녀가 쓰고 온 빨간 모자를 벗으니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맨살의 머리가 드러난 것이다.
  
소녀의 이름은 '쟈스민'이고, 그녀는 오랫동안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이미 항암치료로도 더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의사의 마지막 진단을 받아논 지 여러 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머리 한 올 없는 그녀가 그토록 자주 헤어밴드를 산 것이 내겐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 날 오후,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펑펑 쏟았다. 불치의 병과 싸우면서도 항상 미소를 띄우던 그녀가 불쌍해서 울었고, 내 무성한 머리카락이 부끄러워서 울었다. 남부럽지 않게 갖추었어도 더 가지려던 욕심이 부끄러웠고, 별탈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 나의 기대만큼 따라 주지 않는다고 나무라던 것이 부끄러웠다. 돌이켜보니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나의 삶은 온통 부끄러움 투성이었다.  
  
이제 그 모녀는 가게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녀가 어느 곳에 있더라도 지금도 그 환한 미소를 날리며 색색의 헤어밴드를 사러 힘찬 발걸음을 옮길 것을.
  
집 앞에 쟈스민 꽃이 만발하였다. 은은한 향이 아지랑이처럼 하늘로 오르고 있다.
쟈스민꽃처럼, 이름처럼, 아름다웠던 그녀. 열 여섯 살 그녀의 해맑던 미소는 나의 삶 언저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고운 빛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1999년 3월 크리스챤 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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