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춧가루를 장만하고

2018.08.13 07:13

이진숙 조회 수:7

고춧가루를 장만하고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이진숙

 

 

 

 

 ‘이젠 김장고추걱정을 덜었으니 다행이다.

많은 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곳에 나도 끼어서 줄을 섰다. 간간히 끼어 드는 사람들에게 여기저기에서 날카로운 힐난이 쏟아졌다. 마치 내 물건을 남에게 빼앗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을 보니 작년의 일이  떠올랐다.

 살림하는 사람이라면 일 년 열두 달 중요한 일들 중에 때 맞춰서 꼭 해야 되는 일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 일 순위에 해당되는 것이 늦가을과 초겨울 사이에 김장 담그는 일이다. 그러기위해서 봄부터 밭에 고추를 심고 약도 치며 온갖 정성을 들여 키운다. 한 여름 뙤약볕에서 탐스럽게 선홍색으로 잘 여문 고추를 따서 행여 비가 올세라 노심초사하며 마당에 널어 바삭하게 말린다. 꼭지도 따고 깨끗하게 닦아 방앗간에 가서 가루로 빻아 놓고 나면 그제야 한 가지 큰일을 끝내서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된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이렇게 번잡한 고춧가루 장만을 대신 해 주는 곳이 많이 생겨났다. 그러면서 예전에 없던 많은 일자리도 생겨났다. 살림을 짭짤하게 규모 있게 잘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나온 고춧가루를 믿을 수가 없어서 전전 긍긍하지만 어쩔 수 없이 사서 먹곤 했었다. 이런 걱정을 단번에 해결해 주는 사업체가 흔히 ‘열매의 고장’이라 불리는 ‘임실’에 ‘전북 동부권 고추’라는 농업회사 법인이 만든 주식회사가 생겼다. 소비자들을 안심시키는 방법으로 모든 공정을 투명하게 직접 보면서 그곳에 오는 사람들이 관람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나에게도 이것은 귀가 번쩍 띄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해마다 그곳에 가서 양념고추가루, 김장용고추가루, 고추장용 고춧가루를 입맛에 따라 매운맛, 보통 맛, 순한 맛을 골라 사다 먹기 시작했다. 여간 편리하고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작년에 여차하여 조금 늦게, 다른 해보다 늦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갔더니 모든 판매가 끝났다는 안내판 한 장 달랑 붙여 놓고 문을 닫아버렸다. ‘큰일이다, 김장을 어떻게 하지? 일 년 내 반찬 할 때 요긴하게 쓰는 양념고춧가루는?’ 온갖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다음해 연락해 달라는 전화번호만 등록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날씨가 참 유별났다. 나도 밭에 이것저것 심어 봤지만 가뭄이 심하여 모종값도 못 건질 정도로 심하게 흉년이 들었다. 우리야 텃밭에 우리 먹을 것만 간단하게 심고 있지만 그것들을 팔아 생활하는 농민들은 커다란 타격을 받을 것 같다. 그러니 고추라고 풍년일리도 없고, 행여 올해도 고춧가루를 못 사면 어떻게 하지? 하는 불안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문자가 온 것이다. 임실에서 온 문자로 가격까지 친절하게 안내를 해 주었다. 문자를 받자마자 서둘러 갔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에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는지 넓디넓은 주차장에 자동차들이 가득했다. 서둘러 판매장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이미 긴 줄로 입구에서부터 막혀버렸다. 그곳을 뚫고 물건이 진열된 진열대 앞으로 가니 진열대가 텅텅 비어 있었다. 특히 나에게 필요한 매운맛 고춧가루가 없었다. ‘큰일 났군’속으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순간 망설였다. ‘다음에 다시 와서 살까? 아니 기왕 왔으니 그냥 있는 것으로 사가야지.’하고 마음을 먹었다. 맨 뒤꽁무니에 붙어서 줄을 섰다. 줄을 서서 자세히 살펴보니, 계산하는 직원 뒤편에 상품을 쌓아 놓고 주문하는 대로 그곳 직원이 일일이 챙겨 주는 것이었다. 다행히 내가 서 있는 줄이 차츰 줄어 들면서 아쉬운 대로 보통맛과 매운 맛의 고춧가루 두 봉투를 계산하고 마치 개선장군이 된 것처럼 자동차에 올랐다. 정문을 나와 막 길에 들어서니 문자소리가 났다. 찾아보니 ‘준비한 물건이 다 판매되어 판매가 중단 되었습니다.’하는 문자였다. ‘어휴, 다행이다! 망설이다 그냥 돌아 왔으면 어쩔 뻔 했어?’ 생각할수록 아슬아슬했다.

 

 살림하는 사람들이 그간 힘들고 어려웠던 것들을 해결해주는 것이 비단 고춧가루만은 아니다. 내가 신혼 때인 40여 년 전만해도 우리 집에 청소기를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세탁기에 빨래를 하는 모습도 퍽 신기하게 바라보았었는데. 또 김장철에 날씨가 너무 따뜻하면 김장한 김치가 시어서 큰일이라는 뉴스가 나오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김치를 일 년 내내 먹어도 방금 담근 김치처럼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김치냉장고까지 나와 얼마나 편리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이제는 미세먼지 때문에 빨래를 직접 말려서 나오는 건조기까지 나오는 시대에 살고 있다. 정말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모든 것들이 다 발전하여 변해도 부엌에서 만드는 음식만은 오로지 주부의 손으로 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살았지만, 이제는 고춧가루는 물론이고 공장에서 담근 김치가 대중화되는 시대가 왔다. 번잡한 고춧가루 장만하는 일이 신용 있는 곳에서 판매하여 소비자들을 안심시키듯이 농사를 짓는 농민이나 그것을 필요로 하는 소비자를 위해서 더 많은 종류의 농업회사법인이 생겨서 모든 농산품들을 안심하고 사 먹을 수 있고, 농민들은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그래서 도농 간의 격차가 생기지 않고, 어느 곳에서 무슨 일에 종사하든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행복한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김장용 고춧가루와 양념 고춧가루를 사고 보니, 너무 흐뭇하고 느긋한 마음에 이런저런 생각을 적어 보았다.

                                                      (2018.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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