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2018.08.15 06:21

전용창 조회 수:4

태극기

꽃밭정이수필문학회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목요야간반 전 용 창

 

 

 

 

 간밤에 매형의 전화를 받았다.

 “동생?, 지금 우리 집에 와서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무슨 일인데요?  

 “아니, 와 보면 알아.

 

 같은 아파트단지라고는 하지만 늦은 시각에 매형이 나를 부르지는 않는데 급한 일인가 보다 하고 찾아갔다. 응접실 낮은 책상 위에는 쓰다만 종이가 여러 장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몇 장을 집더니만 나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한 줄 한 줄 읽어 가는데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끝내는 목이 메어 눈으로만 읽었다. 서류 제목은 '일제 강제징용 위로금 신청서'였다.

 

 내용은 이러했다. 매형이 어머니 뱃속에서 3개월이던 19413월, 아버지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 용을 당했는데, 그때 아버지 나이는 45세였고 어머니는 30대 중반이었다. 일본의 어느 탄광으로 끌려간 아버지는 탄광촌에서 중노동을 하며 수없이 구타를 당했고, 심지어 턱뼈가 골절되고 앞니가 다 부러져서 틀니를 하고 밥을 먹어야했다. 한국에서 징용자로 간 사람들은 노예로 학대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지옥에서 살았다. 탄광 막장이 무너져서 죽은 사람도 수두룩하고, 얻어맞은 상처가 아물지도 않아서 고름이 흐르는 다리를 절며 작업장에 끌려 나오기도 했다. 처음에는 월급도 준다며 달콤한 말로 데려가서는 돈은 한 푼도 주지 않고, 그나마 맞지 않는 날이 행운이었다.


 


  4년 동안 지옥생활을 하고 일본이 패망하여 해방이 되던 해인 19458월 하순쯤 귀국했는데, 그 당시의 모습은 ‘단고쓰봉’ 바지에 ‘갑바’를 두르고, 머리에는 작업모를 쓰고, 신발은 ‘지까 다비’를 신고 단지 귤감과 책가방 1개만 들고 오셨다. 몸은 이미 골병이 들어 어깨, 허리 통증으로 일을 나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병시중을 하랴, 품삯일을 나가랴, 불철주야로 죽도록 일만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자식들도 낮에는 일하고 밤에 야학을 다니며 어머니를 도왔다.  아버지는 탄광에서 해준 틀니를 보면 지긋 지긋한 일본 놈들이 떠오른다며 절구통에 넣고 빠아버렸다. 40대 청춘을 가족과 생이별하고 이역만리 낯선 일본 땅에서 노예생활로 보내고, 남은 생애는 신경통, 관절염, 진폐증, 간경화 등으로 고생만 하시다가 끝내는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애통하고 원통하여 영혼이 평안이 잠들 수나 있을까? 매형은 이 혹한의 더위에 전날 아버지 산소에 다녀왔다고 한다.

 

 매형은 나에게 말했다. 그동안 강제징용을 당한 사람들을 심사하여 일인당 2천 만 원을 지급했다는데 이번에 누락된 사람들이 모여서 집단소송을 준비한다고 했다. 위로금이 욕심나서가 아니라 국가가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특활비라는 명목의 세금을 대통령은 옷 사 입는데 쓰고, 재판 거래에 쓰고, 집안 생활비로 썼다면서 억울하게 강제징용에 끌려간 사람에게는 그렇게도 인색하니 분통이 난다고 했다. 내용을 정리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지구의 온난화란 천재지변이 생겨서 앞으로는 여름과 겨울만 있다 한다. 강대국 간에는 무역전쟁으로 기름값은 오르고, 그 틈바구니에 끼어있는 우리 국민은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고 있는데, 똘똘 뭉쳐도 어려운 판국에 위정자라는 사람들은 일본의 진솔한 사과는 받지도 못하고 위안부 피해보상이라고 뇌물 같은 부스러기 돈을 덥석 받아오는가 하면, 강제징용 피해보상을 지연토록 사법부에 압력을 행사하고, 야당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건국이념 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내일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이 된 광복절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애국하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게양할지….


 


  아침에 나가서 태극기를 세어 보았다. 너무도 적었다. 혹시나 해서 오후에 다시 나가 세어 보았다. 조금은 늘었다. 우리 아파트 단지는 12동에 1,200여 세대인데 101,034세대를 세어 본 결과 13%133세대에 불과했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서민아파트 단지는 540세대를 세어본 결과 23세대이니 4%이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산다는 연립주택은 56세대에 단 한 집만 태극기를 게양했다. 물론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았다고 해서 애국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나라를 잃은 슬픔에서 다시 찾은 광복절이 일 년 중 가장 큰 기념일이 아닌가? 일본은 태양을 상징하는 일장기에 16줄기의 햇살이 퍼져나가는 전범기를 상품에 도안으로 사용하며 내부 결속을 다진다는데 말이다. 36년간의 식민지 생활을 잊어도 된단 말인가?

 

  오늘 광복절 73주년 기념행사가 114년 만에 우리의 품 안으로 돌아온 용산 미군기지에서 열렸다. 이곳은 1595년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주둔지로, 임오군란 때는 청나라 군대의 주둔지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다시 일본군의 주둔지로 되었다가 2차 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하자 그 뒤로는 미군이 접수했다. 그렇게 한 많은 세월을 보내고 미군이 평택으로 이전하자 우리 품에 돌아온 것이다. 오늘 이곳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의 광복에 공헌한 유공자를 대신하여 후손에게 훈장과 포장을 수여했다. 대통령은 그들에게 먼저 나아가서 절을 했다. 국가를 위하여 젊음을 바친 고인들에게는 국민을 대표하여 진심어린 경의를 표했다. 진정으로 전쟁이 없는 한반도를 이룩하고자 본인의 모든 역량을 바치겠노라고 밝혔다. 너무도 감격스러웠다. 500여 명의 합창단이 태극기를 흔들며 부르는 '광복절 노래'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생략)

2절에 “꿈엔들 잊은 건가/ 지난 일을 잊은 건가~.(생략)

힘써 힘써 나가세/ 힘써 힘써 나가세.

 

 오늘 태극기를 헤아릴 때 왜 세느냐고 묻는 주민에게 대답했다.

 “오늘같이 기쁜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다는지 보려고요.

많은 사람들이 당황했겠지만 집에 가서는 태극기를 달았을 것이다. 이제는 태극기를 액자에 넣어 응접실에 걸어 놓고 365일 바라보면서 매형의 가족처럼 애통하고 원통한 아픔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국 대한민국을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했다.

                                                  (2018.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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