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국화

2019.12.17 12:23

곽창선 조회 수:7

들 국 화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곽창선




국화가 돌아 왔다. 옛모습 그대로다. 모두 떠나는 자리 끝에 변함없이 찾아와 말미를 장식하여 주는 의연한 모습이 참하다. 모든 꽃은 따뜻한 시절에 피고지고 진다는 것이 일반적인 개념인데, 거르지 않고 찾아온 국화는 믿음의 꽃이다. 종종 국화꽃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시던 어머니 모습이 어른거리는 마음의 화신花神이다.

...

초겨울 이맘때면 시골집 양지바른 장독대 곁에서 자라던 국화가 생각난다. 탐스럽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어도 어머니가 장독대에 오가시며 시름을 달래던 꽃이다. 해방 후 이웃에 살던 아끼꼬 상이 남기고 간 국화라며 지낸 정을 떠올리며 못내 아쉬워하셨다. 가꾸지 않아서 볼품은 없었지만 꽃이 유난히 희고 향이 진해서 모두의 사랑을 받았었다. 별다른 거름이 없던 시절 부엌에서 나오는 재나 오줌을 주는 게 전부였지만 엄동설한에도 잘 자라 장독대에서 어머니를 기다리던 꽃이었다. 종종 산소에 들를 때면 들국화에 안개꽃을 곁들여 어머니 곁에 놓아 드렸다.

TV에 비치는 수 만 송이 꽃들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저마다 다양한 자태로 변신한 그 고운 모습은 보는 사람마다 탄성이다. 국화들의 화려한 변신은 인간의 재능이 신의 경지에 다다른 느낌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국화의 마력에 빠진 이웃들은 모두 행복한 군상들이다. 즐기다 보면 한편으로는 무언가 섭섭한 마음이 든다. 너무 인위적으로 변형되어 신선한 맛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개량종 국화에서는 야트막한 야산 노지에서 싱그럽고 청초하게 피고 지는 들국화의 단아함을 볼 수가 없다. 야하지 않고 수수하게 핀 들국화를 보면 청초하고 신선하다. 그들은 엄동설한에 새싹을 잉태하고, 이글거리는 태양 빛 아래 향기를 안고서, 말미에 찾아주는 신실한 꽃이다. 자태는 고우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그윽하면서도 쌀쌀맞지 않다. 우리 민족의 참하고 꿋꿋한 기풍을 쏙 빼닮은 민족혼이다.

지난 구절초축제 때 섬진강변을 달려 보았다. 산과 강을 끼고 고즈넉하게 자리한 축제장은 인산인해였다. 병풍처럼 둘러진 지형에 따라 구색을 맞추어 가꾼 구절초 사이사이에 들꽃들이 이색적으로 연출되었다. 들풀과 코스모스, 박꽃을 넘어 가을꽃들이 싱그럽게 자리한 정상 소나무 그늘 벤치에서, 저물어 가는 늦가을에 마음을 묻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대자연에 아늑함이 밀려들었다. 산 아래 해바라기의 손길 따라 축제장을 휘감아도는 강물이 퍽 여유로웠다.

감국, 쑥부쟁이, 산국 등 여러 종이 산과 들에 자생하며 잎과 줄기가 떠난 자리에서 뿌리로 겨울을 난다. 그 중 구절초는 음력 오월에는 다섯 마디로 자라다가 음력 구월 구일이 되면 아홉 마디로 진화한다. 은은한 향과 약효를 듬뿍 품어 조상 전래로 귀히 쓰이던 단방약이었다. 어머니는 늦가을에 생기를 잃고 말라가는 국화를 가지채 베어 바람이 잘 통하던 음지에 말리셨다가, 완전하게 마른 것을 포대에 담아 안방 사랑방에 걸어 두시곤 하셨다. 당시 별다른 향료가 없던 시절이라 국화 향기가 겨우내 방안을 감싸고돌았다. 종종 화로에 꽃술 몇 잎과 고추 모과를 끊여 차 대신으로 마시곤 하였다.

올해 동아리 마지막 수업 시간이다. 모두 해냈다는 뿌듯함에 쌓인 듯 서로를 칭찬하는 모습들이 정겨웠다. 마지막 수필 발표가 막 끝날 무렵 격려와 함께 울리는 요란한 소리에 놀랐다. 창가에 앉은 Y문우가 커튼을 벗기자 밖은 비바람이 몰아치며 물 폭탄을 쏟아 붓고 있었다. 집을 나서며 검붉게 찡그린 하늘이라서 혹 눈이 내리지 않을까하는 바람이 있었건만 웬 날벼락인가? 우산도 없이 왔는데 귀가할 일이 걱정이었다. 잠시 후 비가 그치고 세찬 바람이 낙엽의 잔재들을 매몰차게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파트 오솔길에 접어드니 바람에 쫒기는 낙엽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농구장 공터에 이르러 회오리바람에 낙엽들이 둘둘 감겨 오르는 멋진 모습을 휴대폰에 담으려고 서두르는데 낙엽은 기다려주지 않고 홀연히 땅위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주위엔 비에 젖은 국화들이 지난한 나날을 지새며 맺힌 향을 품고서 지천을 떠도는 낙엽들의 마지막을 배웅하고 있었다.

국화는 원래 일본에서 번식시킨 개량종이 대세다. 언젠가부터 국화는 경사 때보다는 애사나 추모의 자리를 지키는 보은의 꽃이 되였다. 이승을 떠나는 자리를 빛내주는 도우미다. 장례식장을 지키는 국화를 볼 때면 산야에 듬성듬성 피고 지는 들국화로 대신하면 어떨까 싶다. 숱한 환난을 극복하며 삭여온 선조들의 혼을 지키고 혼이 서린 꽃이기 때문이다.

모든 꽃들을 보면 며칠간 화려하게 피고 지며 지저분한 뒷맛을 남기고 떠난다. 특히 봄꽃들 거의 모두가 지저분한 모습을 남긴다. 그러나 국화의 마무리를 보라. 전혀 지저분하지 않고 산뜻하게 떠나는 모습은 큰 가르침으로 돌아온다. 그런 모습을 보며 마음에 다짐을 해 본다. 국화처럼 아름답게 떠나자고. 보릿고개를 넘기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타 오르는 목마름을 견디며 만물의 결실을 지켜본 국화들, 인고의 세월 끝에 빚어낸 한 해의 갈무리 꽃이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화신花神이다. 청초하고 그윽한 국화는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꽃이다.

(2019,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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