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밭

2019.12.18 12:57

김세명 조회 수:12

보리밭

   신아문예대학 수필창작 수요반 김세명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가곡을 듣노라면 옛 생각이 난다. 예전에는 유월 장마 전에 보리타작을 하고, 그 자리에 콩을 심어야 했다. 시기를 놓쳐 장마가 오면 보리에서 싹이 나기에 비 오기 전에 거두고 콩은 장마에 잘 자라기에 그 시기가 되면 바쁘다. 보리 베는 날 아버지는 숫돌에 잘 간 낫으로 보리를 베어서 볏짚으로 보릿단을 묶었다. 아버지는 내가 중, 고등학교 다닐 때 해마다 마당에서 보리타작을 했었다. 보리타작은 *잘개질(태질)로 탯돌에다가 보릿단을 내리쳐서 보리 낱알을 터는 방법이었다. 새끼로 보릿단을 한 바퀴 감아 양 끝을 두 손으로 잡고 어깨너머로 들어 올려 내리쳤다. 이쪽저쪽 돌려가면서 여러 번을 내리쳐서 보리 낱알을 털어낸다. 보릿단을 마당에 널어놓고 도리깨로 두드려서 보리 이삭까지 모두 털어낸다. 그 일을 더운 6월의 날씨에 보리 까끄래기가 찌르는 힘든 일을 참고 견뎠다. 도리깨질이 끝나면 보릿대를 거두고 보리 낱알을 쓸어 모아서 풍구로 북데기(검부러기)를 날려 보낸다. 반들반들한 맑은 보리를 가마니에 퍼 담으면 힘든 보리타작이 마무리된다. 보리가 담긴 가마니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흐뭇해 하셨지만 나는 보리는 심기도 타작도 먹기도 힘들어 보리가 싫지만 내색을 할 수 없어 묵묵히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가을이면 이랑을 파고 퇴비를 넣은 다음 보리씨를 뿌리고 곰배로 다듬으면 싹이 나서 겨울을 난다. 해도 짧은 늦가을날, 아버지는 호미와 고무래로 흙을 부숴 가며 추위에 얼지 않도록 땅 속에 묻어 놓았었다. 겨울 짧은 해는 서산을 넘은지 오래고, 희망의 봄을 보리에 간직하며, 추위와 허기도 잊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맑고 높던 하늘도 겨울에 찌푸리는데, 보리는 차가운 대기 속에서 솔잎 같은 새파란 머리를 들고 솟아오른다. 나는 아버지와 겨울 새벽이면 인분을 지고 가 보리밭에 웃거름을 준 뒤 학교에 갔었다. 봄이 되면 겨울에 얼은 보리를 밟아주어야 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보리는 논과 밭 산등성이까지, 이미 푸른 물결로 온 누리를 덮는다. 봄바람은 아지랑이와 함께 푸른 봄 물결이고, 들에도 언덕 위에도 산등성이에도 봄의 춤이 벌어진다. 나는 보리밭에서 사랑을 꿈꾸고 저녁노을 보며 행복을 알았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새날이 빛날 때는, 종달새는 짝을 지어, 보리밭에서 봄의 노래를 불러 대고, 보리밭 품속에 깃을 들이고 사랑의 보금자리를 틀어놓는다.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이겨 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갯가에 수양버들이 그늘을 드리운다. 나비와 꿀벌들이 꽃을 찾아 넘나들고 장미꽃 향기가 바람에 풍길 때면, 보리는 머리를 숙이기 시작한다. 보리는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하고 고요히 머리를 숙인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 나는 꿈 많은 청년기를 보릿고개를 거치며 지났다. 보리는 그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아버지와 함께 우리가족들을 구했으니 거룩한 성자가 아닌가?  우리가족은 그 억센 보리밥을 먹고 자랐다. 나는 그 밭 윗머리에 영면하신 아버지의 산소에 들러 ‘아버지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아버지는 어려운 시기에 나와 동생들을 보리처럼 거두신 거룩한 분이시다. 삶과 죽음이 넘나드는 육이오와 보릿고개를 거치며 가족을 지키셨으니 그 은공을 어찌 필설로 다할까? 보리밭은 내 아버지의 애환과 내 꿈이 서렸던 곳이다. 가곡 보리밭은 그 때의 애환을 달래주었다. 아버지 무덤가에서 바라보니 그 시절이 그립고 눈에 보이는 듯하다.

                                                                                           (2019.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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