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생각하면

2020.07.20 00:31

곽창선 조회 수:1

지금 생각하면

                                  신아문예대학 수필 창작 수요반 곽 창 선

 

 

 

  불가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는데 차라리 만나지 말 걸 그랬나? 그 골목 끝에서 못 본 체하고 돌아 섰다면 이렇게 아린 추억은 없었을 텐데 말이다. 

 

 정치적 격동기에 학원소요는 꼬리를 물고 물리며 지속되고, 대학 캠퍼스는 신음하고 있었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과 잠재우려는 경찰의 저지는 필사적이었다. 회색빛 연기와 함성이 범벅되여 앞뒤 분간이 어려웠다. 경찰의 포위망을 피해 골목 안으로 숨었다가 그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연일 머리띠 동여매고, 정의의 사자인 양 사자후를 토해가며 마시는 막걸리 한 잔 한 잔에 인연의 가교는 튼튼해지고 있었다. 갓 피어오른 새내기들, 새봄을 맘껏 즐겨 보지도 못하고 쫒고 쫒기는 서툰 이념의 회오리 속에서 예상치 못한 이성이 꿈틀 대는 줄 모르고 어울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혼란 속에 엉키던 중 갑자기 열이 없는데도 몸이 떨리고 먹어도 허기지는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가슴이 뛰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그저 생각 없이 망연히 처다만 볼 뿐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내 안에 그녀가 들어 왔다는 신호였다.

 

 분수도 모르는 촌뜨기인 나는 여유로운 자들의 사치를 흉내 내면서, 매일 왕자인 양 성 안에 잠든 공주를 찾아가는 행복한 나날이었고, 야무진 꿈을 안고 거리를 휩쓸기도 했었다. 그것은 고달픈 객지 생활의 힘이자 희망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녀가, 오르지 넘보지 못할 금단의 과일이라는 사실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순간 회색빛 먹구름이 내 주위에 짙게 드리워졌다. 가로 놓인 장애물에 좌절하기를 여러 차례, 부질없는 꿈에서 깨어나려 몸부림쳐도 몸이 따르지 않아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어두운 그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그의 곁에서 머물고 싶은 내 마음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별의 아픔 때문이 아니라 혼자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해진 이별을 억지로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꿈이 내 곁에서 떠나지 말기를 바라는 이중성 때문이었다.

 

 서로 이별을 두려워하며 새벽 별이 영원히 빛나기를 빌었으나 현실은 더욱 꼬여 풀 수 없는 실타래로 변하고 있었다. 자정 넘어 새벽을 울리는 닭울음소리에 빛은 어둠을 뚫고 우리를 깨우고 말았다.

 

 거리에 함성과 최류탄가스가 사라지고 학원이 안정화되던 7월 어느 날, 날아든 메모 한 장. 얼룩진 노랑 종이에 ‘미안하다’며 아듀(adieu)라 쓰여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첫 서울의 봄은 바람 빠진 풍선이 되어 곤두박질치고, 갈대처럼 외로이 나부끼고 있었다. 예견된 시련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황혼에 목마름을 달래주는 옹달샘이 되었구나 싶기도 하다.

                                                                    (2020.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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