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無題)
2008.05.10 10:38
무제(無題)
이 월란
먼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했다
또 다시 가야 할 멀고도 험한 길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마디 쯤에선 참지 못하고 먼저 달려갔다 온 길도 있었는데
생의 관절이 꺾이던, 우두둑 소리낸 그 지점에서
달려간 길 끄트머리, 미완의 조각상으로 서 있는,
때론 엎드려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
나의 알몸을 만져보고 온다
내 걸친 누더기라도 벗어 덮어주고 오는 길
꽃의 언어로 휘감아도, 수목의 푸르름으로 감추어도
하늘의 맑음으로 덧칠해도, 먼산의 드높은 관대함 속에 파묻혀도
내 하루의 자궁으로 돌아와
손끝에 섬뜩하게 만져지는 나의 몸은 늘 벗고 있다
다라니같은 생의 주문이 새겨진
탯줄에 걸려 출렁이는 귀천 없는 몸의 하소연
작고 여린 혼들의 은폐되지 못하는 비틀거림이 있다 해서
생의 마디가 살짝 굽어지는 이 저녁
또다시 노을이 부른다고 여행가방을 주섬주섬 챙길 것인가
노을 아래 물든 고결한 나의 넋이 애벌레가 되어
꿈틀꿈틀 뼈가 비치도록 허물 벗어던지고 있다고
가문 여름 내내 버티어오던 하늘도
우듬지에 찔린 듯 성긴 빗방울을 불현듯 뿌려대면
보도 위에 즐비하게 나뒹굴던
터지지도 곪지도 못하는 정지된 화농들
움찔, 돌아 눕는 이 저녁
2007-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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