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전사

2010.06.12 05:29

이월란 조회 수:47



붉은 전사


이월란(10/06/10)


중년의 위기를 넘기지 못하고 떡하니 퇴직을 해버리자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남편이 서서히, 아니 교묘히 돌변했다
이건 울 엄마가 만든 거니까 내가 먹을거야
넌 친정김치나, 하선정김치나, 전주김치 같은 걸 먹어
저 간사한 화상을 보겠나
내 입맛일랑은 열녀문 아래 고이 묻어두고
저 늙은 마마보이의 입맛을 죽여줘야 한다
마늘 내 푹푹 나는 명동 칼국수집 김치 같은 붉은 전사들로
땡스기빙 휴가철이면 연중행사로 김장을 하시던 시어머니
유타의 매서운 겨울 날씨 속에서 손을 호호 불며 장화를 신고
소금에 절인 배추와 하루 종일 전투를 치렀던 나였다
만삭의 배로 쪼그리고 앉아
산더미 같은 무채 앞에서 강판을 휘두르던 나였다
무는 왜 그렇게 무겁고 미끄럽던지
엄마, 맛있네, 맛만 봐드려도 오냐, 우리 새끼, 하시던 엄마를 그리며
옛 조선여자들의 애환까지 끌어안고 삶의 투지를 불태우던 나였다  
머리에 붉은 띠를 동여매고 나는 붉은 전사가 되었다
견뎌낸 강 훈련은 과연 헛되지 않았다
이건 내가 만든 거니까 나만 먹을거야, 맘에도 없는 유세를 떠는데
맛을 보더니, 울 엄마가 만든 건 니가 다 먹어, 찌개를 끓이든지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6699 신선하고 재미있는 문화 오연희 2012.09.04 60
6698 이민의 삶이 어때서요? 오연희 2012.09.04 51
6697 이런 생각 정용진 2012.09.02 60
6696 물고기 정용진 2012.09.01 65
6695 그 남자 정국희 2012.08.30 37
6694 풍차 성백군 2012.08.29 51
6693 Hole In One 정용진 2012.09.07 69
6692 달팽이.3 정용진 2012.08.27 69
6691 영혼의 기도 / 석정희 석정희 2012.08.25 59
6690 < 미주문협 창립 30주년 기념 축사> 好文木으로 청청히 자라는 美洲文協 정용진 2012.08.24 67
6689 산중문답(山中問答) 정용진 2009.03.02 57
6688 역설 박정순 2009.03.01 60
6687 클레멘타인 이월란 2010.06.12 59
» 붉은 전사 이월란 2010.06.12 47
6685 외숙모님 권태성 2009.02.23 49
6684 추석 날 김명선 2009.02.23 62
6683 고난, 위장된 축복 이영숙 2009.02.22 59
6682 어머니의 끈 김명선 2009.02.23 60
6681 믿음과 불신사이 박성춘 2009.02.21 53
6680 눈물도 언어다 장정자 2009.12.06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