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아내
2009.09.02 08:49
지난 봄의 일이다. 학교로 미주 한국문인협회에서 전화가 왔다. 시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고. 한동안 시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집으로 가 저녁을 먹으면서 "마누라. 나 시인이 되었대" 라고 말했다. "뭔 시인?" "어어. 내가 시를 쓰거든..." "뭐? 언제부터?" "옛날부터… 작년에 몇 개 미주문학에 보냈더니 신인상 받았다네" "왜 나한텐 이야기도 안했어?" "뭐 될 줄 몰랐지" "어떤 시인데?" "나중에 보여줄게. 근데 시상식에 오라는데..." "뭐 주는데?" "상패랑 상금이랑" "얼마나?" "쪼끔" "비행기 값은?" "......" "또 돈 드는 취미가 하나 늘었구나 당신은 좌우간 못 말려." "시 쓰는 거 취미로 쓰는 거 아닌데..." 심각하게 나오는 나. "당신 정말 시인되는 거 아냐? 가난하다는 시인이" "나 벌써 됐다는데..."
좌우간 이것저것 하는 것이 많아 유지비가 많이 드는 남편으로 불리는 내 입장이 더 난처하게 되고 말았던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이 끝났다. "당신이 시인이면그럼 난 뭐가 되지?" "시인의 아내" "우리 집은?""시인의 집""우리 아들은?" "시인의 아들" "우리 동네는?" "시인의 마을" "어라 무슨 노래 제목 같은데... 좌우간 멋있게 들리네.."
이렇게 마누라는 졸지에 시인의 아내가 되었다. 맨날 내 글에서 주연을 빛나기 위한 조연으로 등장하여 뭇 사람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던 마누라가 말이다.
내가 코미디를 썼다면 마누라를 비롯해서 날 아는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끄떡이며 그럴 거야 라고 할 텐데. 아니면 하다 못해 두레저널에 구어체로 말하듯 써대는 수필이라면 몰라도 시? 시인? 하며 놀라는 눈치다. 교회월보나 신문에 매달 나오는 재미있는 내 칼럼을 보면서도 전혀 감동(?)하거나 놀라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왜 그런가 물었더니 내가 평소에 하는 말투와 내용이 이런 코믹한 글과 전혀 다르지 않아서 그렇단다. 허기사 "좀 심각해 보세요" 라는 말이 내가 결혼하고 지금까지 마누라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시인이라뇨, 고 선생님과 시는 전혀 안 어울리는데요" 하던 사람까지 있고 보면 평소에 내가 얼마나 이미지 관리에 소홀히 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쓰는 글을 열심히 읽고 맞춤법을 교정해주는 마누라도 내가 시를 쓰는 것은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아니 내가 시를 좋아하고 많이 외는 것은 안다. 한번은 밀밭이 끝간데를 모르고 파랗게 펼쳐져 있는 들판을 가로지르며 "흠- 시가 생각나는 풍경이군." 이라고 했더니 시 하나 읊어보란다. 창 밖을 멀리 보면서 "저어 푸으른 초오원" 하고 길게 뽑았더니 눈을 좀 크게 뜨는 마누라. 이때를 놓칠 새라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궁따라랏닷 삐약삐약" 했더니 "어유 이젠 그만 좀 심각해봐요" 라는 마누라. 예쁜 꽃을 보고 "어머나 이뻐라 눈같이 하얗네. 이거 무슨 꽃이죠?' 라고 물으면 화초 박사인 난 심각하게 "음 이거 말이지" 하며 뜸 좀 들이다 "하아얀 꽃" 이라고 대답하곤 했으니 우리 집 '심각'이는 장가간지 오래 나와 상관없는 말 인줄 안다. 그런데 심각하게 시인이 되다니. 나이도 생각하셔야지. 아랫배가 나오는 나이에. 똥배 나온 시인이 어디 있어. 어? 그건 뭔 배가 아니라 인격이라 부른다던데. ㅋㅋ.
그래도 시인이 되니 좋은 것이 있다. 문학를 좋아하는 분들을 많이 알게된 것이다. 나도 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혹은 시를 좋아합니다 하고 수줍은 듯이 고백하는 분들을. 아 김동지! 라고 하며 우린 반갑게 이야기한다. 시를 써서 경제적으로 부자가 된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마음은 모두 부자가 된다. 글 친구가 생기는 것 때문에. 한국에도 또 미국에도 시카고에서 엘에이까지.
누군가 내 글을 읽어준다는 것처럼 흐뭇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신문에 실린 글 <고대진 글마당>을 열심히 읽던 마누라에게 "재미있어? 잘 썼어?" 하고 물었다. "응 재미있게 잘 썼네" 하며 선선히 대답하는 마누라. 뭔가 낌새가 이상한데.. 생각하는데 "이 최 진희라는 분 -한국남자가 알아야 할 것- 내 생각을 그대로 써 주셨네. 참 잘 썼다." 하는 마누라. 지난달 내가 쓴 '한국 여자가 알아야 할 것'에 대한 비판의 글인데...그러면 그렇지....
독자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거다. 내 글을 읽으면서 나의 친구가 되는 거니까 친구가 생기는 거다. 시인의 친구가. 친구가 있다는 것은 사는 폭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누구나 조금은 시인이 되게 만드는 가을에 내 글을 읽는 친구들(시인의 친구?)에게 내가 시로서 만난 L.A. 의 한 시인의 시를 소개한다. 특히 시인의 아내를 혹은 시인의 낭군을 만들고 싶은 분들에게 드리고 싶다.
<위 내시경>
내가 내 위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처음인 나는/ 마치/ 내 정말 속마음이라도 보는 것처럼/ 가슴이 콩당 콩당 뛰었다// 아직/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들도 있고/ 보여서는 안될 감춰둔 속마음이 있는데/ 이것들이 자칫/ 사진으로 찍혀 나오는 날/ 나의 위선은/ 대자보로 나 붙을 터이니/ 이 일을 어쩐다요, 하나님!// 빨리 용서하시고/ 싹싹 도려내시고/ 아예/ 상처까지 아물어 주시고/ 그래서/ 제 가슴이 새것을 바라는 기대로/ 콩당 콩당 뛰게/ 얼른 바꿔주십시오. //
문인귀 시집 <눈 하나로 남는 가슴이 되어서: 베드로 서원> 에서
병원에 드나들 때마다 혹시 내가 큰 병에 걸린 건 아닐까 조마조마 하다. 뭔 조사가 그리 복잡한지 이리 가고 저리 가고 수도 없이 피도 뽑는데도 시원한 결과도 안 나타난다. 기계가 겁이 난다. 그런데 이 시인은 위 내시경 (위 속에 카메라를 집어넣고 속을 들여다보는 기구)앞에서 시심을 가꾼다. 만일 이 기계가 마음속을 찍는다면? 누구에게나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는 내가 있는 법.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사연 한 두어 개는 가슴 깊이 숨겨두었을 터. 그런데 그게 사진에 찍혀 나타난다면. 아이구 하나님. 용서하실 것이면 사진 나오기 전에 빨리 용서해 주세요. 새 가슴으로 병도 마음도 낫게 해 주세요 하고 시인은 기도한다.
이 시를 읽고 나서 병원에 가면 기계가 무섭지 않을 것 같다. 친밀하게 기계와도 이야기하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지? 혹시 위내시경을 찍으실 분이나 초음파로 뱃속을 보실 분 CT scan을 하시는 분들 조사하기 전에 이 시 한번 읽고 가시길...
2000년 11월 두레저널 <고대진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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