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분실하고 딱 한장 남은 편지
키다리
金秀映
이민 올 때 보물이라도 되듯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 사진들을 싸가지고 왔다. 요즈음 시간을 내어서 오래된 사진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어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진 첩에 넣어두기 위해 서였다. 그중에 육십년이 넘은 초등학교 졸업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흑백 사진인데 오랜 세월동안 빛이 바랬지만 얼굴들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제일 키가 큰 순서대로 제일 뒤 한복판에 남녀 둘을 세우고 여자는 왼 쪽 남자는 오른 쪽으로 한 줄 세우고 두번 째 세번 째 이런 순서대로 줄을 서서 찍은 사진이다.
초등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는데 나는 남여 합해서 우리 반에서 키가 제일 컸다. 그래서 제일 뒷줄 한복판에 남자 학생과 처음 시작하는 줄로 서서 찍은 사진이다. 나는 사진에도 키가 크게 찍혀 나타 나는 것이 싫어서 옆에 선 남학생보다 키를 적게 할려고 한쪽 다리를 꺽고 한쪽 어깨를 축 내려오게 해서 사진을 찍은 것이 어찌나 웃으꽝 스럽게 보이는지 누가 보아도 웃지 않을수 없다.
지금은 여자가 키가 큰 것이 자랑이고 모두가 키가 크기를 바라지만 육이오 전쟁 직후라 모두 영양실조에 걸렸는지 남녀 모두가 키가 별로 크지 않고 작은 키 들이었다. 그래서 여자가 키가 큰 것이 부끄럽게 생각할 때였다. 그래서 나는 키가 큰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약간 숙이고 허리도 굽히면서 학교 복도를 지나 다녔다. 남학생들은 내가 자기들보다 키가 더 크니까 심통이 났는지 모르지만 나만 보면 놀려대고 히히닥 거리며 킥킥 웃어댔다.
수업이 끝날 때마다 노는 시간에 남학생들이 여러 명이 복도에 일렬로 줄을 서서 내가 복도를 지나 갈때면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부르며 놀려대기 시작했다.
“놀란 토끼 키다리 서발 장대야 ….랄 라 랄 라 랄 라 라 랄라라라……”
나는 육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 노래 가사가 잊히지 않고 생생하게 귀에 들려오는 듯하다.
나 바로 옆에 섰던 남학생은 피부 색깔이 유난히 검어서 혼혈아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생김새도 한국사람 토종하고는 다르게 이목구비가 뚜렸하고 크게 보였다. 옆에 서 있던 그 남학생이 어찌나 무서웠던지 얼굴을 삐딱하게 여학생 쪽으로 돌리고 찍은 모습이 어찌나 재미 있게 보이는 지 한 참을 들여다보며 나는 웃고 또 웃었다.
나는 키가 클 뿐만 아니라 얼굴도 희고 머리카락도 갈색이여서 집안에서도 부모 형제들이 다리 밑에서 줏어와서 길렀다고 놀려 대고 밖에서도 튀기같이 생겼다며 놀려서 어린 시절은 수모를 받으며 자랐다. 어린 마음에는 키가 큰 것이 망신스럽고 얼굴이 희고 머리카락이 검지 않고 갈색인 것 모두가 창피하게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십 년쯤 지나서 키 큰 것이 흉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하는 시대가 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의 큰 키를 높이 평가 해준 분이 김영태 화가 겸 시인이었다. 김영태 시인은 큰 오 라버니와 친한 사이로 우리 집에 가족처럼 드나 들면서 흉 허물없이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언제 부터인지 몰라도 이분이 나를 좋아해서 인지 나에게 화가로서 아름다운 그림을 직접 그려넣은 도화지 종이에다 예쁜 글씨로 시를 써서 보내기 시작했다. 이분은 초상화(커리커쳐)를 그리는 화가인 동시 시인이며 무용 평론가이며 음악 평론가 이다.
이분이 쓴 시 가운데 나의 큰 키를 미인이 되는 조건 중의 하나라고 해서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나의 큰 키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말 할 수 없이 고마웠으나 그 많은 편지 가운데 한 번도 답신을 못해 미안하기 그지없다. 임종하기 몇 달 전에 동생이 서울 가서 만났는 데 나에게 주라며 그분이 쓴 시집과 무용자료집 을 자필로 사인해서 보내와서 고맙고 미안한 마음 금할 길 없지만, 임종하기전 끝내 만나지를 못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그가 쓴 책들을 그를 기억하며 잘 보관하고 있다.
그분은 나를 볼 때마다 하이 힐을 신고 다니라고 권유했다. 그러지 않아도 키가 큰데 그기다 키가 더 커 보이게 하이 힐을 신으라고 하니 나는 난색을 하면서 안된다고 고개를 저은 생각이 난다. 다리가 길고 각선미가 좋아서 하이 힐을 신으면 정말 멋 있을 거라며 적극 권유했지만 나는 끝내 한번도 하이 힐을 신지 않고 청춘울 보냈다. 키가 큰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처럼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멋쟁이였던 내가 왜 하이힐을신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 지금 생각하면 철부지가 아니였나 생각해 본다.
그러나 어린시절엔 부모 형제들이나 친구들이 무심코 웃으려고 던진 말이지만 어린 마음에는 연한 순과 같아서 모두가 나에겐 상처가 되었다. 하나님은 무심치않아서 나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셨던 것이다. 미국 이민 올 때였다. 부모형제, 친구, 친척, 교회 성도들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참 좋겠습니다. 미국사람처럼 키가 크고 피부가 희고 머리 색갈이 갈색이니 동양사람처럼 안 보여 인종차별 안 받고 서양 사람처럼 대접받고 살겠습니다.”
나는 이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지 어릴 때 놀림당하였던 소외감이 삭 가시고 이제 내 세상 만나서 미국생활이 신바람 나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처음 미국 와서 직장생활을 했다. 미국사람들이 태반이었고 필리핀, 일본, 태국, 중국, 베트남 등 다민족이 문화를 이루며 직장 생활을 했다. 소수민족인 아시아인들 사이에도 내가 유독 키가 크고 피부 색깔이 희니까 대우 받으며 떳떳하게 직장생활 할 수가 있어서 여간 기쁘지가 않았다. 게 중에는 질투하는 아시아인도 있었지만 ….
한국에서 어린 시절 놀림당하였던 아픈 추억들이 말끔히 가시고 당당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가 있어서 퍽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즐거운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다. 기혼인 나를 미혼으로 착각하고 십 년이상 젊게 보면서 미국사람들이 데이트하자며 접근해 오는 통에 진 땀을 뺀 적이 있다. 나이를 사실대로 고백하면 도저히 믿을수 없다며 내 운전면허를 본 후 입을 모두가 벌렸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젊게 보일 수가 있냐며 믿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나는 답변을 조리 있게 했다.
“특히 너희 미국여자들은 어릴 때부터 피부에 좋지 않은 술, 담배, 마약 등 을 하고 해수욕을 많이 해서 피부가 일광욕으로 타서 피부가 망가져 늙게 보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없어서 그러니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까지 하는 일조 이석의 효과를 보았다.
졸업사진에 옆에서 함께 찍었던 남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나를 복도에서 노래를 불러가며 손뼉을 치면서 놀려대든 남학생들도 소식이 몹시 궁금하다.
이제 고희를 넘긴 이 나이에 오래된 빛바랜 사진을 들여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는 즐거움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준다. 갈색의 머리칼에도 살구꽃이 피고 그 곱던 피부도 주름살이 생기기 시작하고 키도 척추뼈 사이 물렁뼈가 줄어들면서 그 큰 키가 작아지고……
그 옛날 놀림 받던 시절이 그래도 좋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추억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행복하게 살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