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2-2011 '이 아침에'  


세월을 염색하는 어머니                                          
                                                          조옥동/시인

  매월 한 번씩 어머니는 머리에 염색을 하신다. 이때는 이마 위에 시커먼 두건을 쓰고 있듯 얼굴까지 검게 보여 오직 두개의 눈동자만 반짝이는 좀 낯선 모습이다. 저편 침실 화장대 거울 앞에서 안경 너머로 이쪽을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조용하다. 그는 무엇을 하시던  미소뿐인데 어머니는 꼭 등 뒤에 놓인 사진 속의 남편을 배경으로 앉아 머리염색 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
94세의 노인, 검은 머리로 조금이라도 지난 세월을 덮으시려는 안타까운 마음을 노인의 대열에 들어선 딸은 이해하면서도 안쓰럽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도 화로에 숯불을 피우고 부젓가락으로 머리를 돌돌 말아 고대를 하셨다.

17세에 종가집의 맏며느리로 시집 와 위세 당당했던 모습은 활처럼 굽은 등허리 넘어 사라지고 손가락 하나로 밀어도 쓸어질듯 가볍다. 어머니에게서 잔인할 만큼 온갖 진을 뺏어가 버린 그 세월은 무엇일가.

세월은 쏜살같이 눈 깜작할 사이 저만큼 날아갔다. 희망의 촛불을 켜고 행복에 겨웠을 때도 밖에는 비바람 서리치고 있었지. 사랑은 가고 가슴에 회오리치던 날, 장미는 지고 가시만 끌어안고 피 흘리던 날. 아침 이슬과 저녁노을, 빛과 그림자, 밤과 낮, 마르고 적시며 어디로 사라졌나. 변함없는 속도로 또박또박 진행하는데 사람들은 50마일 아니 60마일 70마일 가속을 느낀다. 때로는 광풍처럼 노도처럼 달려가는 수레바퀴를 뉘가 어찌할 수 있는가.

세월은 모순의 언어로 인생을 자라게 한다. 삶의 기본방정식에서 만남은 헤어짐을 의미한다.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빈손으로 돌아온 포수는 좌절의 몸짓에서 쾌감을 느낀다. 진정한 기쁨은 눈물 없이 얻을 수 없음을 깨닫는 자에게 뼈를 꺾어 무릎 꿇는 겸손을 선물로 준다. 사랑하는 일이 사랑받는 일보다 행복한 것임을, 평화는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 할 때 받는 보너스임을 알려준다.
홀로 연가를 부르며 내일을 바라보는 자는 미련치 않은 자임을, 큰 것을 잃고서야 작은 것도 소중함을, 심지 않고 거둘 수 있는 열매는 없다고 수고한 대로만 거두는 추수의 원리를 써준다. 불행은 바로 행복의 뿌리였음을알아차린 자에게 전화위복의 파노라마를 눈감고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뜨게 한다. 상전벽해, 세상은 늘 변하고 영원한 것이 없다고.

가장 정밀하고 믿을 수 있는 저울은 그대 양심이라 세월은 속삭인다. 양심이 있는 자는 자신의 자화상을 양심의 명징한 거울에 비춰 마음을 다스리라 한다. 자신의 겨울이 길고 길어도 기다린 자는 찾아 온 새봄을 감사하며 초조하지 않는다고.
앞을 콱 막고 있는 고통의 그 너머 그 너머엔 기도의 학교가 있고,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이명처럼 잠속에조차 들리는 날이 되면 세상의 잡다한 소리들은 들리지 않고 절대자의 음성에 귀 기울이게 된다고.

옛 선지자의 말대로 이 시대의 사람들도 미래를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꿀 수 있으니 우리는 아직 어린 아이들일까 아니면 젊은이일까 노인일까. 아무도 모른다 시간의 작용을.
오직 세월은 지혜로운 자까지 부끄럽게 하여 생명이 있는 자의 영원한 스승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