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고챠

2007.08.25 01:04

배희경 조회 수:55 추천:6


               하이고챠                  미주문학  2007

    “하이고챠”.  가개 주인헌데서 너무 많은 꽃을 꽂았다고 주위를 받은 그가 중얼거린 말이다. 그는 한참동안 일하던 손을 멈추고 건너편 테이불의 나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안다. 그가 많이 자존심이 상해 있다는 것을.
   꽃 디자이너 후랭크는 항상 온 정성을 다해 꽃을 꽂는다. 그러나 그는 주문 꽃값만치의 꽃으로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하는 때가 많다. 자기가 만족 될 때 까지, 꽃을 더 넣으며 성의를 다한다. 그래서 손님을 더 만들기는 하지만, 주인으로서는 남지 못하는 장사 하나 마나다. 몇 달 전에 들어온 이 디자이너에게 이제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주인은 주의를 준다.

   “후랭크! 너 뭐라 했지?”  잠시 후, 나는 그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궁금해서 되물었다. 그는 굳어있던 표정을 약간 풀며, 또 “하이고챠”라 말하고 멋적게 웃었다. 나는 입 속에서 그의 말을 되풀이 했다. 그리고 알았다.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어의 절묘한 미국식 구어음이었다.  
   아이구 골치야, “아이 골챠”구나.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며 동조를 구했다. 겨우 몇 가지 배운 말을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써먹은 그가 대견해서 나는 하이고챠, 하이고챠를 되풀이하며 쿡쿡쿡 쿡쿡 자꾸 웃었다. 그리고 왜 아이가 아니고 하이라 했을까 도 생각했다. 그 ‘아이’ 하는 아 속에는 히읏 음이 섞여 있다는 것도 알았다. 물론 주인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도 미국에서 살면서 이런 식의 영어를 얼마나 많이 쓰고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웃지도 고쳐주지도 않으며 답답해 할 뿐이다. 우리말을 진지하게 배우려하는 일은 거의 없고, 가끔 애교로 몇 마디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쓰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삼십 여 년 전이다. 친 조카가 수퍼마켓에서 일하고 있었다. 강도가 나타나 장 보고 있는 사람들을 엎드리라 하고 돈을 털려고 했다. 그러나 조카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대걸레로 열심히 바닥만 닦고 있었다. 저놈은 어찌된 놈인가 고 강도가 물었고, 계산대 옆 직원이 영어를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했다. 만일 그 날, 직원의 설명이 없었다면, 하이텍 엔지니어가 되어 대걸래 질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이 된 조카는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숨을 걸고 쓴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지 않는가.
   이 나라에 왔으면 이 나라말을 써야 하는 것이 당연한 사실인데도 가끔은 거역하고 싶은 때가 있었다. 그들이 말 잘 한다는 이유로 우리의 상위에 있다고 항상 생각되었던 것은 자격지심에서였을까. 이것은 우리 일세들이 뼈를 깎으며 산 것 외에 또 하나의 비애였다. 우리의 1.5세, 2세들이 그것을 씻어 주리라는 믿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를 지탱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곳에 온 우리 세대의 영어에 대해서라면 쓸 말이 너무도 많다. 우선 나에 대한 얘기만 해도 수도 없다.
   삼십 여 년 전이다. 내 막내아들(그때 열두 살)과 미국에서 난 어린 조카 녀석 둘이 헌 자전거를 만지면서 많은 말들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 중에서 내 귀에 들어오는 말은 ‘후랫타이어’ 뿐이었다. 나는 낑낑거리고 있는 조카녀석이 가엾어서 형편도 못되면서 선심 쓰기로 마음먹었다. 녀석을 제 집에 떨어뜨리려 가는 차 속에서 “I'ill buy you a 후랫트 타이어”라 했다. 그랬더니 그 녀석은 거의 우는 소리로 “no, no, not flat tire, new tire.”라고 하지 않는가. 나도 어찌나 당황했던지 아니 그럼 새 바퀴지 헌 바퀴겠냐?  바삐 “yes, yes, new tire. new tire." 거의 우는 소리였다. 어제 일 같이 귀에 쟁 하다. 그 때 어찌 빵꾸난 자전거바퀴와 flat tire가 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내게 후랫타이어는 자전거 바퀴 이름이었다.

   같은 때의 일이다. 무슨 일이 생겼던지 flat tire의 조카는 연신 Oh, brother를 연발하고 있었다. 나는 그 때 또 생각했다. 동생은 미국에 온지 오래 됐어도 아들을 잘 가르쳤구나. 여기에선 늙으나 새나 다 이름을 부르는데 암 그래야지, 제 키의 두 배나 되는 형이니 마땅히 brother, 형이어야지.
   그런 후 동생에게 아들을 잘 키웠다고 친찬했다. 동생은 내 말을 듣고 내 무식을 웃지도 답답해하지도 않고 “누나 그것은 감탄사에요” 라고 어루만지듯 말 해 주었다. 성질이 급하고 화도 잘 내는 동생이지만 이런 난감할 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동생인 것이 기뻤다.

  이번은 친구 남편의 얘기다. 친구도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이민 해 왔고, 이 땅에 발을 딛자 남편에게 물을 것이 너무 많았다. 고등학교 영여교사로 있다가 온 남편에게 또 물었다. 모두들 body shop이라 하는데 그게 어떤 곳인가요? 영어교사님은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겠지. “응. 시체를 보관하는 곳이야.” 이상 했지만 친구는 오랫동안 그런 줄로 믿었다.
    
    하이고챠를 들은 같은 날이다. 나는 후랭크가 우리말을 써 준 것이 흐뭇해서 점심으로 싸온 만두의 거의를 건네주었다. 그랬더니 그는 파랑 눈을 더 파랗게 뜨고 이렇게 말했다. “pen man seemed”라고. 그 말을 또 나는 잠깐 삭혀야 했다.
   가라앉았던 그의 기분은 가신듯 했고, 방안은 새로 피어나듯 꽃내음으로  가득 차 갔다. 머리 안에서 찰각 소리가 났다. 알았다 그 말을-. 그것은 폐가 많습니다, “폐 많 심 더.” 그가 월남전에 나갔다가 한국군에게서 배운 말이란다. 아마도 경상도 분이었을까. 그렇게 써서 외우니 쉬웠다고도 했다.
   지금 우리도 쓰지 않고 있는 이런 존대 말을 외국 사람이 쓰고 있다니 너무 기뻤다. 얼마 전 신문기사에서 짓궂은 사람들이 욕을 가르쳐서 듣기에 난감했다는 글을 읽고 난 후다. 내 나라 번영을 위해 목숨을 건 그 때 그 젊은이들! 목숨만 건 것이 아니었구나. 지금은 중년이 훨씬 넘었겠다. 아디서 어떻게들 사는지, 그들의 일이 가슴 속 깊은데서 물결쳤다.

    나도 한 마디 우리말을... 하고 후랭크를 건너다보았다. 그의 양 볼은 만두로 불룩했고 행복해 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의식했던지 꽃 속에서 고개를 들어 빙긋이 웃으며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맛있다는 표시일 것이다.

   사람은 가끔 별치도 않는 일에 뿌듯하게 기쁘다. 우리말을 남이 써 주었다는 사실 하나로 갑자기 일등국민이 된 것 같은 느낌은, 힘들었던 지난날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인 짬에 끼어 주눅이 들대로 들어 있었던 이민 초기의 일들이 진드러미 같이 붙어 다닌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나쁘지 만은 않았다. 이 나라 사람들의 옛 노랫말대로 Good Old Day 이기도 한 날들이었다. 그날은 눈 깜박 할 사이에 지나간 여덟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