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오늘은 내 생일

2018.02.04 23:51

서경 조회 수:17016

오늘은 내 생일 2.jpg

오늘은 내 생일 2.jpg


연초록 님의 이름
언 하늘에 새겨두고 
 
하나 뿐인 심장이라
하나 뿐인 사랑으로 
 
노오란
산수유 엽서
그대에게 띄웁니다   ('봄을 위한 연서' 졸시) 
 
오늘은 내 생일.
꽁꽁 언 섣달 스무 여드렛날!
나는 겨울 아이로 태어났다.
스물 두 살의 어린 엄마는 외할머니댁에서 나를 낳으셨다.
천식을 심하게 앓던 외할머니는, 산모와 아기를 위해 부엌에서 부지런히 군불을 떼셨다.
아이는 으앵으앵 힘차게 울었다.
아마도, 외할머니는 건강한 조짐이라 생각하셨나 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뜨끈뜨끈한 온기는 열기를 더해 이불을 뚫고 아이의 뒷발꿈치도 데웠다.
아기는 열기를 견디다 못해 이불까지 차 버린 것일까.
지금껏 남아 있는 도장만한 크기의 발뒤꿈치 흉터.
그건 외할머님이 내게 남겨주신 사랑의 증표다.
멈추지 않는 기침을 달래 가면서 부지런히 군불을 떼 주던 외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지 꼭 한 달 열흘만에 돌아가셨다.
아기를 품에 안고 어루던 어린 엄마는, 그 품으로 숨을 거두어가는 당신의 어머니를 끌어 안고 소리쳐 울었다.
"어무이! 어무이! 정신 차려요!"
" 어무이! 어무이! 가면 안 돼요!"
그러나, 외할머니는 어머니 품에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갔다.
'미안하다...'
'먼저 가서 미안하다...'
어머니가 하신 것처럼, 외할머니도 눈빛으로 그렇게 유언을 남기고 떠나셨겠지.
한 사람은 미끄러져 내려가고 또 한 사람은 추스리는 사이, 육십 여 년 전 어느 한 겨울밤은 그렇게 시간의 물이랑으로 사라져 갔다.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장독을 열어 본 어머니는 또 한 번 목놓아 우셨다.
장독에 가득 채워진 쌀과 미역.
그것은 외할머니가 해산할 막내딸을 위해 차곡차곡 모아 놓고 가신 사랑의 유산이었다.
아직도 포화 소리 요란한 전쟁 와중에 어떻게 그 귀한 물건들을 구해 놓으신 것일까.
사랑의 위대한 힘이다.
위대한 사랑은 상황에 대한 이유나 구차한 변명을 대기 전에, 방법을 찾아 행동으로 옮긴다.
빛도 이름도 없이 살다간 외할머니.
그는 비록 '유명한 인명록'에 끼이진 못했어도, 언제나 삶에 충실하고 엄마로서의 소임을 다 하고 가신 분이다.
외할머니는 내게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에 없지만, 전해 들은 말만으로도 늘 온기를 주는 겨울 밤 아랫목이다.
다시는 오지 않을 그 날, 그 시간, 그 장소.
그리고 그 주인공들.
둘은 가고 이제 나만 남았다.
뿐인가.
내 생일만 되면, 늘 몇 살인가 다시 묻곤 당신의 어머니 돌아가신 주기를 헤어보던 이모님도 떠나신 지 오래다.
두 세대가 지나고 저물어가는 한 세대가 남았다.
시간이 그들을 데려가고, 그 시간이 날 여기까지 데려 왔다.
그들이 남기고 떠난 사랑을 새삼 떠올리며 까끌까끌한 발뒤꿈치 흉터를 어루만져 본다.
나의 생일 아침은 미역국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늘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떠올리는 회억으로 시작 된다.
오늘은 일마저 쉰다고 한 날,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다.
창문 밖 하늘을 보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긴다.
생각에 잠겨 멀그니 보는 하늘마저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멀겋다.
저도 오늘은 생각이 많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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