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 흐릿한 사진

2023.01.17 13:59

서경 조회 수:69


  바람 때문이었을까. 흔들리는 뱃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기술 때문이었을까. 찍혀진 사진이 실루엣처럼 희미하다.
  처음엔 아쉽다가,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은 또렷했던 이목구비도 지우고 기억도 지운다. 지금쯤의 내 나이엔 외려 걸맞는 사진이다. 그 날의 추억을 되새김하기에는 분위기만으로도 족하다.
  바람이 불고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뜬 사람들의 표정은 따스했다. 찬 바람을 맞으며 뱃전에서 밤바다를 구경하던 그 기억. 스치는 뱃전에서 서로 손을 흔들던 그 따스한 온기. 오색영롱한 물그림자가 일렁이던 환상적  풍경과 먼 산마을의 조을 듯 깜빡이던 불빛들. 그래, 그 기억만으로도 행복하다.
  행복은 현재진행형이 없다고 했던가. 때문에, 행복은 늘 찰나에 불과하다. 하지만, 1분이 영원이 될 수 있다는 영화의 한 대사처럼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찰나는 영원이 된다. 딸과 함께 보냈던 뉴포트 비치의 크리스마스 밤은 내게 영원으로 이어질 찰나의 순간이다.
  시간은 양과 질로 나뉜다. 그냥 무의미하게 흘려 보내는 시간 크로노스와 양질의 시간 카이로스. 행복이란 불행 중에서도 한 순간에 가졌던 그 카이로스의 시간을 붙들고 사는 거다. ‘행복하고 있어요’라고 말할 순 없어도 ‘행복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아름다운 기억. 그 기억을 붙들고 사는 한, 시간은 깊이와 두께를 지닌 카이로스로 흐른다.
  흐릿하게 나온 사진이 사유를 깊게 한다. 몇 장의 사진에서 석 장을 뽑았다. 마치, 석 장의 사진이 내 일생을 함축미 있게 표현해 주는 자서전 같다. 첫번 째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모습, 두번 째는 미소 짓고 있는 모습, 세번 째는 건너 편 뱃전 사람을 위해 손을 흔드는 모습이다.
  첫번 째 사진을 들여다 보며 생각에 잠긴다. 난 사는 동안, 보고 듣고 하는 모든 일상이 흥미로왔다. 어려서는 말로써 어머니께 보고 올렸고, 좀 커서는 연인에게 재잘됐다. 글을 쓰게 되면서 부터는 어줍잖은 물건이나 사실 하나도 눈 여겨 보면서 글로 증언하려 했다. 언젠가부터는 필력의 부족을 사진으로 메꾸고 있다.
  이 모든 행위가 기억의 보고 속에 추억으로 새겨두려는 마음에서다. 삶을 사랑하는 여인은 추억을 사랑한다. 추억에 매달려 사는 게 아니라, 추억을 만들며 살고 싶기에 늘 삶에 열정적이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유야무야한 삶과는 거리가 먼 태도다.
  첫번 째 고른 사진은 이런 내 속성을 반영해 주는 은유다. 화려하게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수 십 채의 배가 밤바다를 수 놓는 이 광경을 어찌 놓칠까 보냐. 검은 밤바다에 일렁이는 오색빛 물그림자, 그 찰나의 순간을 어찌 그냥 보낼까 보냐. 난 감탄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늘 그래 왔듯이, 세상에 대해 사물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각별히 애정을 가지며 살고 싶다.
  두 번 째 사진은 미소 띤 내 모습이다. 내 웃음 속엔 간혹 하회탈 같은 은유가 숨어 있다. 웃는 듯 우는 듯 묘한 표정. 삶이 희비의 쌍곡선이라면 하회탈 표정보다 더 심도 깊게 인생을 표현하는 방법은 없으리라.
  나의 환한 웃음 속에도 눈물이 스며 있고 잔잔한 미소 속에도 슬픔이 고여 있다. 그러나, 날 진정으로 사랑했던 나의 정인들은 그저 나의 해맑은 미소만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 흐릿한 사진처럼 세월 속에 내 얼굴은 희미해 갈지라도 마주 보며 내가 보냈던 그 따스한 미소와 마음의 온기만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 난 잘 웃고 잘 울었다. 그게 내가 가진 대표적 속성 중 하나다.
  세 번 째 사진은 스치는 뱃전 사람들과 작별하며 손을 팔랑이는 내 모습이다. 우리는 삶의 강을 지나며 무수한 사람을 만난다. 오늘 건너 편 배에 탄 사람처럼 다시는 못 볼 사람도 있고 먼 길 돌아 와 다시 만나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귀한 인연이다. 한 순간이나마,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있었다는 게 예사 인연인가.
  난 영어 단어 중에 ‘precious(귀중한)‘란 말을 제일 좋아한다. Precious time, precious friend, precious love, precious… 어떤 명사가 뒤에 붙어도 행복해지는 말이다. 모든 게 귀하고 소중하다. 유형무형의 보석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다. 난 이들과 이별할 때, 가벼운 마음으로 손 팔랑이며 안녕을 하고 싶다. 너가 있어 내가 행복했고 내가 있어 너가 행복했다면 잘 살다 가는 거 아닐까.
  인생은 역시 반전의 묘미가 있다. 위기가 챤스가 되고 불행이 행복으로 바뀌는 새옹지마다. 환난이 극복의 시기가 되고 실패가 성공의 결과물을 내기도 한다. 흐릿하게 나와 아쉬웠던 사진도 결국은 수필 한 꼭지 던져 주지 않는가. 인생은 생각하기 나름이요 마음 먹기에 따라 그 질이 달라진다.
  만날 때마다 유머 있는 말투로 좋은 말을 많이 들려 주던 외삼촌이 떠오른다. 일본 와세다 유학 시절, 그는 ‘호리 가다‘로 땅 파는 알바를 했다고 한다. 정수리에 뜨거운 태양이 내려 꽂히는 한여름 곡괭이로 땅을 파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가난한 고학생으로서는 그 일도 감지덕지였다. 어느 날, 그는 땅을 파며 외쳤다. “그래, 나는 단순한 호리 가다가 아니야! 나는 대지의 조각가야!” 대지의 조각가! 그때부터 그의 노동은 놀이로 환원되었다고 한다.
 유명한 인명록에 이름 석 자 새기고 가지 못하면 어떠랴. 제 처한 곳에서 늘 긍정적인 사고로 이웃과 정스레 살다 가면 그 뿐. 마음의 부자야말로 지상 최고의 갑부가 아닐까. 경상도 말로 ‘나는 마아~ 그리 생각한다.‘ 이제껏 그렇게 살아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런 마음으로 살아 가고 싶다.
  비가 귀한 남가주에 며칠 째 비가 내린다. 빗줄기도 제법 굵고 빗소리도 생각보다 세차다. 빗소리에 눈을 뜨고 귀를 열어 난 또 이 새벽을 사유의 시간으로 보낸다. 흐릿하게 찍힌 얼굴 사진이 희미해질 기억과 맞물려 내 자서전같은 넋두리로 이어졌다.
  나의 정인들이여!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늘 안녕들 하시게. 흐르는 세월 속에 내 얼굴도 이름도 희미해져 가겠지만 내가 그대에게 건넸던 그 미소만은 부디 기억해 주길 이 한 해 또 빌어 본다네. (011523)

뉴포트 비치 얼굴.jpg

뉴포트 비치 1'.jpg

뉴포트 비치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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