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이다. 그러므로 다른 문학보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이며(마음의 거울 같으며) 경험적이다. 우리는 오늘까지의 위대한 수필문학이 그 어느 것이나 비록 객관적 사실을 다룬 것이라 할지라도 심경에 부딪치지 않은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렬하게 짜내는 심경적이라기보다 자연히 유로되는 심경적인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수필은 시에 가깝다. 그러나 시 그것은 아니다.




우리는 시를 쓰려 한다. 소설을 지어 보려 한다. 혹은 희곡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때 그 어느 것이나 함부로 달려들려는 무모한은 아니다. 동일한 작자이면서도 그 태도가 서로 다르다. 시는 심령이나 감각의 전율된 상태에서, 희곡과 소설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이 무심히 생활 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되는 형식이다.

제작이라고 하나, 수필에 있어서는 의식적 동기에서가 아니요, 결과적 현상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논리적 의도에서 제작된 일은 없다. 수필은 써 보려는 데서 시작되어 써진 것이다. 어느 작가가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를 써 보려는 한가로운 마음에서 쓸 것인가. 그것들은 작가에게서 의식적으로 제작되었다. 진실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試筆_시험 삼아 붓대를 놀림)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필은 수필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희곡이 조직적 ‧ 활동적이요, 시가 운율적 ‧ 정서적이라면, 수필은 진실한 태도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격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걷잡을 수 없으면서, 그래도 어딘가 한 줄기의 맥이 있다. 그것이 위대한 정도에 따라서 더욱 그렇다. 우리는 사람의 기분이란 어딘가 무책임하게 기복하는 듯함을 느끼면서 그 이면에 인격이라는 그림자가 숨어 있음을 본다. 한 개의 영혼 위에 얼마나 많은 기분이 노는가? 이 기분을 무시하여 버리면 수필은 또한 같은 운명에서 무시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기분의 배면에 있는 영혼의 존재를 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기분에서 살 필요를 느낀다. 또한 살고자 희구도 한다. 그것은 영혼의 환경인 까닭이다. 이와 같이 수필에는 기분 가운데서 고백되고, 어둠 속에서 흐르는 광선 같은 맥이 있다. 여기에 소설이나 희곡같이 짜이지 못하면서도 빛나는 경지가 있는 것이다.




문학의 형식에서 보면 수필에는 소설이나 시나 희곡에서 보는 바와 같은 어떤 완성된 폼이 없다. 단편소설을 제작하려면 적어도 에드거 앨런 포우나 안톤 체홉이나 혹은 모파상에게 잠시라도 사숙하야야 하겠고, 시나 희곡을 지으려면 괴테나 셰익스피어나 혹은 입센 등에게서 그 완성된 폼을, 비록 모델로 삼지 않는다 할지라도 한번 살펴 볼 아량쯤은 있어야 하겠지만, 수필에 있어서는 그 형식을 구하거나 참고하려고 찰스 램이나 해즐리트를 찾을 필요성까지는 없을 것 같다. 가장 아름다운 수필을 찾아 우리의 문학적 항심(恒心_늘 지니고 있는 떳떳한 마음)을 만족시키며 영양(營養)시키려는 점은 찬하여 마지아니할 바이나, 그 형식의 섭취에 구속될 바는 없는 것이다. 오직 우리는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에서 마치 먼 곳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려는 듯한, 그러한 한가로운 듯한 붓을 움직여서 무의식한 가운데서의 단성(丹誠)으로 한 편의 문장을 써내면, 그것은 수필이 될 것이다. 잘 되었으면 훌륭한 창작으로서의 문학에까지, 못 되면 잡문에까지 상하의 단계가 지어질 것이니, 그것은 문학으로서의 소설 ‧ 시가 있음에 비하여, 흔히 문학 아닌 소설이 있고 시가 있음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므로 형식으로서의 수필문학은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다. 이것은 수필의 운명이요, 또한 성격이다.



한 시대나 한 세기의 소설, 시, 희곡은 내용이나 형식으로 보아 객관적으로 몇 가지의 주류에 분류하여 논할 수 있다. 그것은 시대사조나 사회의식에 연결되어 발전 쇠퇴하는 특징을 가진 문학 형식인 까닭이지만, 수필에 있어서는 그 성쇠기복이 시대적 제약에 의거한다고 간주하기보다 오히려 생활 단면에 부딪치는 까닭에 그렇게 커다란 조류와는 비교적 관련이 적게 자라간다고 할 수 있다.
일시에 준비된 의식이나 사상의 눈을 떠나서, 가을 밤 무심히 잡은 펜이 그 유래와 아름다운 가지가지의 서정을 느끼는 대로 쓸 수도 있겠고, 어색한 악수의 풍경에 나타난 세정을, 혹은 사소하나마 매력 있는 제목을 붙잡고 시종이 없을 듯한 기분으로 표현 향락할 수도 있겠고, 혹은 야시의 풍경에서도 흥미진진한 글 한 구절 쓸 수 있을 것이니, 참고서를 구하거나 지식의 정돈을 요할 바는 아니나 어딘가 탁마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이 있어야 함은 문학의 그 어느 분야에서나 공통될 것이다.



이렇게 잡다한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는 수필은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이 샘과 같다. 이 천연스러운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같이 인식되어 일대의 수필가 램이나 해즐리트에게 있어서 빛나고 있다. 그렇지 않았던들 건조로운 생활적 심경적 기록에 우리는 매혹되지 않고 소설이나 희곡에만 경도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유머와 위트가 수필의 속성이라고 판정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설이나 희곡에도 솜씨 좋게 짜여서 섬광하는 까닭이다. 그 이외의 만화적 특징이나 역사적, 전기적 혹은 기상적 성벽으로도 수필은 또한 찬란하게 시험된다. 그러나 오늘까지 위대한 문학으로서의 수필에는 유머와 위트가 혼연히 숨어 있어 우리를 매혹하는 마치 수필의 본질같이 되어 있다.



모든 문학과 예술은 결국 사람에게서 생겨서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소설이나 희곡이라는 이름에 사로잡혀서, 그것이 수필보다 우월하며 향상성이 많다거나 혹은 수필이라는 산만하여 보이는 어의에서 오는 선입견 때문에 그것이 발전성이 적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어떤 사회이건 그곳이 인간의 사회요, 인간으로 구성되는 이상 수필은 전인격적 문학 표현으로 어느 사회에나 존재할 것이다.
사람은 이데올로기적 상태에서만 사람이 아니요, 훌륭한 사람이면 그 어느 정신적 심적 상태에서도 인간일 것이며, 그것은 또한 수필을 통하여서는 허식 없이 표현된다. 그러므로 수필이란 개성적 심경과 기분에 싸여서 어떠한 대상이나 또는 문제를 간단하게 단편적으로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붓 가는 대로 써내려는 심정에서의 제작일 것이다. 그 심정이 정치, 경제로 향하든지 사회 문제나 생활개선으로 향하든지 그것은 평론에 미치지 못하는, 그러면서도 평론이 가질 수 없는 영역을 가지는, 따라서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완성을 기다리지 않으면서 완성되는 점에 문학적 특수한 위상이 있다.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 인간에 있다면, 수필같이 자연스럽게 인간성을 띤 문학 형식은 서정시 이외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맛은 결국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문제나 어떠한 대상에 작가의 기분이 부딪쳐서 표현되는 인간미에 있다. 그 인간미를 보여 줄 흥미나 부질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평론이나 소설은 만들 수 있을지언정 수필은 쓸 수 없다.




인간의 생활이란 요컨대 수필의 심경에서 성숙된다. 그러므로 수필을 써 보지 못하고 문필을 끝마친 문인이 있다면, 나는 그를 인간성으로 보아 불행하다 하고 싶고 또한 문학 성격의 전면으로 보아 불행하다 하고 싶다. 생활은 시와 산문의 조화에서 성숙된다. 그것이 문학으로 볼 때 곧 수필이다. 그러므로 수필의 성격은 인간의 성격이라 하면 가장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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