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紅高粱)



최용현(수필가)



   북경영화학교를 졸업한 30대 중반의 장이모가 1987년 처음으로 감독한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粱)’은 일제 침략기에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한 여인이 겪은 기구한 인생역정을 담은 작품이다. 여주인공은 북경희극학원에 재학 중인 22살짜리 신인 공리를 발탁했다. 영화의 사활이 걸린 모험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붉은 수수밭’은 1988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그랑프리인 금곰상을 수상했고, 중국의 유력한 두 영화제인 백화상과 금계상의 작품상을 동시에 석권했다. 또 캐나다 몬트리올영화제 특별상, 이탈리아 듀브린영화제 최우수상, 프랑스 낭트영화제 촬영상을 휩쓸어 단숨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아울러 장이모 공리 콤비의 탄생을 강렬한 임팩트로 세상에 알렸다.

   9월 9일 9번째로 태어난 아이 ‘주얼(九兒, 공리 扮)’이 시집가는 날이다. 가난 때문에 18리 고개 너머 쉰 살이 넘은 문둥병 환자인 양조장 주인에게 나귀 한 마리를 받고 팔려가는 것이다. 가마꾼들은 신부를 희롱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가마를 흔들어댄다. 방년 18세인 주얼은 가마 틈새로 웃옷을 벗은 가마꾼들, 특히 바로 앞에 보이는 위찬아오(강문 扮)의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우람한 등 근육을 보며 야릇한 기분을 느낀다.

   결혼 3일째, 그 지방 풍습대로 친정나들이를 가던 주얼은 괴한에게 납치되어 수수밭으로 끌려간다. 저항하던 주얼은 그가 위찬아오임을 알자 순순히 몸을 허락한다. 시댁에 돌아오니 남편은 살해되었고 범인이 위찬아오라는 소문이 돈다. 의기소침해있는 주얼대신 왕고참 로한이 일꾼들을 다독이며 양조장을 꾸려나간다. 심기일전한 주얼은 문둥병 남편이 쓰던 세간을 불태우고, 온 마을에 고량주를 뿌려 소독하고 새 출발한다.

   그 무렵, 위찬아오가 양조장으로 찾아와 주얼과 수수밭에서 나눈 정사(情事)를 일꾼들에게 떠벌리다가 쫓겨난다. 새로 빚은 고량주를 뜨는 날, 위찬아오가 또다시 나타나 새 고량주통에 오줌을 누는 등 말썽을 피우다가 주얼을 덥석 안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위찬아오가 오줌을 눈 고량주는 맛이 뛰어나 ‘18리 홍고량’이라는 이름으로 히트상품이 된다. 이제 주얼의 남편이 된(?) 위찬아오가 양조장 일을 맡게 되고, 로한은 양조장을 떠난다.

   세월이 흘러 주얼이 낳은 아들 두관이 10살이 되던 해, 일본군이 들이닥쳐 마을은 풍비박산이 난다. 일본군의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한 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마을 앞 수수밭은 모조리 짓뭉개진다. 또 항일 게릴라활동을 하던 사람들은 일본군에 잡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는데, 전에 헌신적으로 주얼을 도와준 로한도 잡혀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진다.

   로한의 비참한 죽음을 본 마을 사람들은 분노한다. 주얼은 로한의 영혼을 위무하는 제사를 지내고, 위찬아오와 양조장 일꾼들은 고량주통에 심지를 달아 수수밭에 매설한다. 일꾼들에게 줄 먹거리를 가져오던 주얼은 갑자기 나타난 일본군 트럭에서 쏜 기관총에 맞아 쓰러진다. 이를 본 일꾼들은 이성을 잃고 고량주를 담은 통에 불을 붙여 트럭을 향해 돌진한다.

   잠시 후, 지축을 흔드는 굉음과 함께 매설한 고량주 폭탄이 터져 일본군 트럭은 화염에 휩싸인다. 양조장 일꾼들은 모두 장렬하게 산화(散華)하지만, 주얼의 시신 옆에 있던 위찬아오 부자(父子)는 불사조처럼 일어선다. 장엄한 일식(日蝕)이 지나가고, 수수밭 위로 이글거리는 붉은 해를 마주하고 선 어린 두관이 어머니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송사(頌辭)를 외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엄마, 천국으로 가세요! 넓은 길 위의 큰 배처럼

               엄마, 천국으로 가세요! 잘 생긴 말(馬)과 함께...

               엄마, 천국으로 가세요! 고생 모두 잊고 푹 쉬세요



   이 영화의 원작은 중국 산동성 출신의 소설가 모옌이 1930년대 고향 마을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써서 1986년에 발표한 소설 ‘홍고량 가족’이다. 중국 민초들이 겪은 근대사의 아픈 궤적을 실감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아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어 다시 주목을 받았다.

   주얼의 손자이자 두관의 아들의 내레이션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첫 장면에서부터 붉은 옷을 입고 붉은 가마를 탄 어린 신부 주얼의 때 묻지 않은 순박한 매력과, 뙤약볕 아래에서 웃옷을 벗어젖힌 가마꾼들의 마초적인 매력이 묘하게 대비된다. 의표를 찌르며 등장하는 강렬한 비트의 중국 전통음악도 짜릿한 충격으로 폐부를 찌른다.

   이 영화로 데뷔한 공리는 약간 촌스러우면서도 은근히 섹시한 매력을 또렷하게 각인시켰다. 이후 장이모가 남자주인공으로 나오는 ‘진용’을 비롯하여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패왕별희’ ‘서초패왕’ ‘인생’ ‘황후화’ ‘상하이’ 등에서 열연, 중국 최고의 여배우가 되었고 할리우드에도 진출했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을 맡는 등 아시아를 대표하는 배우로 우뚝 섰다. 결혼과 이혼, 그리고 잦은 염문설은 좀 안타깝지만….

   장이모는 1980년대 개혁개방시대를 이끈 제5세대 영화감독의 선두주자로, ‘국두’ ‘홍등’ ‘귀주이야기’ ‘인생’, 그리고 장쯔이의 데뷔작이기도 한 ‘집으로 가는 길’과 ‘영웅’ ‘황후화’ 등의 수작을 줄줄이 내놓으며 현란한 색채감각을 독특한 영상미학으로 유감없이 발휘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개폐막식 총감독을 맡아 청사(靑史)에 남을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사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자신이 발탁한 공리와 불륜에 빠져 부인과 이혼했고, 그 후에도 여배우들과의 스캔들은 끊이지 않았다. 장예모의 딸이 어느 인터뷰에서 ‘공리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토로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일터가 화원(?)인 탓이겠지만 이제 그도 나이가 들었으니…. 최근에 ‘동양적인 가치를 영상화하여 세계문화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단국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영화를 중국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고 극찬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온통 때리고 부수는 홍콩영화들 속에서 중국영화의 품격을 고고히 지켜낸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데는 전혀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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