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7일,2012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봄볕이 나에게 말을 걸다

                                                     조옥동/시인  

급히 도넛 한 박스를 사왔다. 몽당연필 같은 촛불도 하나 켜고 실험실 밖 잔디밭에 나가 풀꽃을 따서 임기응변으로 만든 조그만 꽃다발을 꽃병대신 유리비커에 꽂아 놓았다. 생일 축하노래를 불렀다. 어제 일요일이 닥터 Y의 생일인 것을 깜박 잊고 있다 거의 퇴근시간이 되어서 기억해낸 우리는 도넛파티로 생일을 축하한 것이다. 촛불을 불어 끄며 그는 행복하게 웃었다. 남은 도넛과 받은 풀꽃을 집에 갖고 가서 아내에게 보여주겠단다.  즐겁게 연구실을 나섰다.

3월의 퇴근시간은 거의 땅거미가 내리는 무렵이다. 초저녁은 하루 중 시간이 가장 빠르게 질주하듯이 초조함을 몰고 온다.
아침의 시작은 기대와 희망으로 반죽된 긴장감이 생기를 불러일으키나 만족으로 채우지 못한 하루가 밤이란 장막에 가려지는 시간은 마치 간이역 대합실에서 종점까지 데려다 줄 막차를 기다릴 때처럼 내 몸은 인식의 더듬이들 날카롭게 세운다.

그림자 길게 드리운 가로등 곁에서 사람들은 최면에라도 걸린 듯 교차로의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어둠속에서도 정지 아니면 전진의 동작으로 급히 변한다. 직장의 시간이 귀가하기까지 우리는 많은 교차로를 지나고 시장을 지나 웃음과 슬픔을 몸속에 녹음하며 땀이 밴 어깨를 스치는 군중 속을 빠져 나와 결국 혼자가 된다. 하루를 돌아본다.

실험실 기기가 망가지거나 작동에 이상이 발생하고 주위를 어지럽히거나 사용 후 원상태로 놓여있지 않을 때가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모르는 척 한다. 습관과 성품, 인격의 차이를 발견한다. 작은 일에도 불평하는 사람, 반대로 말없이 바르게 돌려놓고 깨끗이 정리하는 이도 있다. 자신을 과소 또는 과대평가한다. 스태프 중 닥터 N은 시시콜콜 나에게 와서 보고를 한다. 고맙기도 하고 미울 때도 있다.

하루의 생활은 내가 저들을 읽은 것이 아니고 저들에게 나를 읽히는 일이다. 성경을 읽을 때도 성경말씀이 나를 읽고 있음을 깨닫는다. 무리 속에서 나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싫은 점이 있어도 부인하고 혐오하는 대신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까칠한 하루가 기록된 장부는 풍요한 위안과 대립을 이룰지라도 내일의 꿈을 또한 밀쳐내지 못 한다. 이 나이쯤 눈물도 한숨도 아름다운 생명의 힘이 되어 찬란한 꽃을 피우는 일임을 알기에 하루의 사용규칙을 어김없이 지켜내는 일조차 쉽지는 않으나 무수한 발자국 소리와 동행하며 내면의 세계와 감각적 소음의 현실을 비유하며 자기성찰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른 봄, 봄볕이 풀밭을 뒹굴며 보이지도 않는 손가락으로 꼭꼭 찌르면 초목은 마르고 두터운 표피를 열어 싹이 나고 꽃이 핀다. 바람에 마로니에 새잎이 흔들리면 나무 아래는 잎 새 사이로 떨어진 햇빛이 가지각색 모양의 물고기 같이 이리저리 몰리며 헤엄을 친다. 잿빛 허공이 먼데서 푸르게 다가온다.
휴식시간 풀밭에 나앉으면 햇빛이 나를 꼭꼭 찌르며 말을 건다. 너도 꽃을 피워보라고. 아름답게 소생하는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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