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끈
2009.02.23 04:42
어머니의 끈
김명선
몇 달 만에 왔더니 화병이 풀잎에 가려 찾을 수가 없다. 처음 1년은 한 달이 멀다하고 찾아왔었다. 이름 있는 날이나 불현 듯 생각나면 꽃 한 묶음 들고 찾아 온 언덕인데. 세월이 약이라고 소월이 읊던 시가 생각난다.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 지나요‘
애틋하던 마음도 흐려지고 세월 따라 잊혀져 가는 야박함을 노래한 시 한 구절...
온 세상 천하에 하나뿐인 딸, ‘너와 나는 죽음밖엔 갈라놓을 수가 없다’ 하시던 어머니,
영겁의 깊은 잠에 혼자 누워 사랑의 분신의 목소리에도 눈감고 귀 막고 모른척하신다. 오늘이 바쁜 딸자식은 나 살기에 하루하루가 꼴까닥 꼴까닥 지워져가고, 그렇게 그리움도 살뜰함도 엷어져가고 있다.
어머니는 수없이 똑같은 비석 사이에 숨어계셔서 올 때마다 찾느라 헤맨다. 파란 융단 같은 풀담요 덮고 누워계신 분들의 얼굴을 짓밟는 게 송구하여 발목이 비틀거렸다. 그러다가 만난 어머니 당신의 이름 석 자가 생전에 낯익던 고운 눈으로 반짝 빛나 온 전신에 찌르르 전류가 흐른다.
유난히 속눈썹이 길고 크던 눈 지금은 그런 눈을 만들겠다고 멀쩡한 가죽을 찢고 꿰매지만, 그 옛날 어머니는 반달 같은 실눈이 아니라고 시댁 식구들이 쑤군덕거렸다, 한다. 그 큰 눈에서 반가워도 슬퍼도 혹은 감격을 해도 뚝뚝 떨어지던 눈물의 흔적이 이렇게 노란색 들꽃으로 잔잔하게 피어날 반기는 것 같다.
안고 간 꽃바구니를 풀어 꽂으니 어머니가 하늘에서 땅 속에서 동시에 활짝 웃으시는 듯 주변이 화려해졌다.
“어머니 이젠 우리 걱정은 안하셔도 돼요.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우릴 이렇게 잘 살게 하는 것 아시지요, ”
어머니는 우리보다 생각이 앞서신 분이셨다. 손녀딸이 이민족과 결혼을 한다고 할 때 우리 내외는 기함을 하듯 놀라 가슴을 치며 이민 잘못 왔다고 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도 안 통하는 사위 감을 껴안고 등을 두드리시며 ‘괜찮아 사랑해’ 하셨다.
한국 비디오보다 채널 4나 7의 연속 극을 눈치코치로 이해하시고 즐기시던 분, 저녁때 일터에서 돌아 온 딸에게 설명까지 해 주셨다.
나는 오랜 세월 어머니와 함께 사랑과 미움의 틈바귀에서 티격태격 사랑을 쌓고 미움을 흘리고 살아왔다. 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어머니와 나는 좀 더 살뜰히 아껴주고 그리워도 하던 모녀였을 텐데...
눈만 뜨면 곁에 계셨기에 어머니 소중한 줄 몰랐고, 이민의 삶이 너무 힘겨워 투정만 했었다.
어제는 김치를 담갔다. 곁에서 바라보시며 ‘고춧가루가 원수니 그렇게 퍼붓게...’ 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나 가슴이 고추 맛처럼 얼얼했다. 어머니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셨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에 들어오면 밥상 끝에 앉으셔 종일 겪어낸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셨다. 모녀는 두런두런 하루 이야기로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풀었고, 같이 웃고 함께 울던 분이셨다.
어머니의 한쪽 발은 나의 오른발과 묶이고 나의 왼발과 애 아빠의 한쪽 발에 감겨 우리는 3인 4각의 인생길을 엎어졌다 자빠졌다 하면서 용케도 살아왔었다. 이제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빼 가셨고 우리의 2인 3각의 삶은 어머니 가신 길을 부리나케 따라 가고 있다.
아-아 그리운 어머니
당신의 형상은 공중에 사라지고 찾아와 통곡해도 그 소리 바람만 찢는다.
아직도 나는 어머니의 끈을 풀러놓고 우리만의 춤을 추기엔 철이 덜 들었나보다.
지금도 내 마음에는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끈이 깊이깊이 감겨져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붙잡고 계신 듯하다.
“이젠 네 마음대로 춤을 추어라” 하시던 말씀이 입관예배 때 꼭 다문 입술사이로 달싹 달싹 흘러나왔건만...
( 어머니 날 산소에 갔다가)
김명선
몇 달 만에 왔더니 화병이 풀잎에 가려 찾을 수가 없다. 처음 1년은 한 달이 멀다하고 찾아왔었다. 이름 있는 날이나 불현 듯 생각나면 꽃 한 묶음 들고 찾아 온 언덕인데. 세월이 약이라고 소월이 읊던 시가 생각난다.
‘그리워 살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 지나요‘
애틋하던 마음도 흐려지고 세월 따라 잊혀져 가는 야박함을 노래한 시 한 구절...
온 세상 천하에 하나뿐인 딸, ‘너와 나는 죽음밖엔 갈라놓을 수가 없다’ 하시던 어머니,
영겁의 깊은 잠에 혼자 누워 사랑의 분신의 목소리에도 눈감고 귀 막고 모른척하신다. 오늘이 바쁜 딸자식은 나 살기에 하루하루가 꼴까닥 꼴까닥 지워져가고, 그렇게 그리움도 살뜰함도 엷어져가고 있다.
어머니는 수없이 똑같은 비석 사이에 숨어계셔서 올 때마다 찾느라 헤맨다. 파란 융단 같은 풀담요 덮고 누워계신 분들의 얼굴을 짓밟는 게 송구하여 발목이 비틀거렸다. 그러다가 만난 어머니 당신의 이름 석 자가 생전에 낯익던 고운 눈으로 반짝 빛나 온 전신에 찌르르 전류가 흐른다.
유난히 속눈썹이 길고 크던 눈 지금은 그런 눈을 만들겠다고 멀쩡한 가죽을 찢고 꿰매지만, 그 옛날 어머니는 반달 같은 실눈이 아니라고 시댁 식구들이 쑤군덕거렸다, 한다. 그 큰 눈에서 반가워도 슬퍼도 혹은 감격을 해도 뚝뚝 떨어지던 눈물의 흔적이 이렇게 노란색 들꽃으로 잔잔하게 피어날 반기는 것 같다.
안고 간 꽃바구니를 풀어 꽂으니 어머니가 하늘에서 땅 속에서 동시에 활짝 웃으시는 듯 주변이 화려해졌다.
“어머니 이젠 우리 걱정은 안하셔도 돼요.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우릴 이렇게 잘 살게 하는 것 아시지요, ”
어머니는 우리보다 생각이 앞서신 분이셨다. 손녀딸이 이민족과 결혼을 한다고 할 때 우리 내외는 기함을 하듯 놀라 가슴을 치며 이민 잘못 왔다고 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말도 안 통하는 사위 감을 껴안고 등을 두드리시며 ‘괜찮아 사랑해’ 하셨다.
한국 비디오보다 채널 4나 7의 연속 극을 눈치코치로 이해하시고 즐기시던 분, 저녁때 일터에서 돌아 온 딸에게 설명까지 해 주셨다.
나는 오랜 세월 어머니와 함께 사랑과 미움의 틈바귀에서 티격태격 사랑을 쌓고 미움을 흘리고 살아왔다. 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 어머니와 나는 좀 더 살뜰히 아껴주고 그리워도 하던 모녀였을 텐데...
눈만 뜨면 곁에 계셨기에 어머니 소중한 줄 몰랐고, 이민의 삶이 너무 힘겨워 투정만 했었다.
어제는 김치를 담갔다. 곁에서 바라보시며 ‘고춧가루가 원수니 그렇게 퍼붓게...’ 하시던 어머니가 생각나 가슴이 고추 맛처럼 얼얼했다. 어머니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셨다. 하루 일을 마치고, 저녁에 들어오면 밥상 끝에 앉으셔 종일 겪어낸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셨다. 모녀는 두런두런 하루 이야기로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풀었고, 같이 웃고 함께 울던 분이셨다.
어머니의 한쪽 발은 나의 오른발과 묶이고 나의 왼발과 애 아빠의 한쪽 발에 감겨 우리는 3인 4각의 인생길을 엎어졌다 자빠졌다 하면서 용케도 살아왔었다. 이제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빼 가셨고 우리의 2인 3각의 삶은 어머니 가신 길을 부리나케 따라 가고 있다.
아-아 그리운 어머니
당신의 형상은 공중에 사라지고 찾아와 통곡해도 그 소리 바람만 찢는다.
아직도 나는 어머니의 끈을 풀러놓고 우리만의 춤을 추기엔 철이 덜 들었나보다.
지금도 내 마음에는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끈이 깊이깊이 감겨져 시도 때도 없이 나를 붙잡고 계신 듯하다.
“이젠 네 마음대로 춤을 추어라” 하시던 말씀이 입관예배 때 꼭 다문 입술사이로 달싹 달싹 흘러나왔건만...
( 어머니 날 산소에 갔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