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형식들 - 정한용

2005.04.21 00:57

솔로 조회 수:753 추천:77

봄날의 텃밭

    김동찬  
  
아버지가 생전에 받아놓았던 쑥갓, 상치, 아욱 씨들을 텃밭에 뿌려놓았습니다. 쭈그리고 앉아 잡초도 뽑고 물도 주면서 어린 새싹들이 흙을 밀고 올라오는 걸 하루에도 몇번씩 숨죽이고 들여다봅니다. 그러면 세끼손톱보다 작은 떡잎들 위에 내려앉은 연초록 햇빛들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참새 소리로 재재거리기도 하다가 아버지 굽은 등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식구들이 다 나간 빈 집에서 느리게, 혹은 빠르게 자라나는 새싹들과 얘기도 나누며 저무는 시간을 들여다보던 아버지가 내 곁에 앉아 상치는 봄에 먹는 게 더 맛있다고도 하고 아욱국은 장모님이 막내 사위 왔을 때 끓여 내놓는 국이라며 웃으십니다. 아버지보다 먼저 떠난 세 형님들이 하하하하 웃는 소리 뒷뜰에 가득합니다. 아버지가 만나고 생각하고 들여다보던 것들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봄날의 따뜻함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죽은 것들입니다. 이제사 나는 아버지를 좀 더 자주 만나고 얘기를 나누게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제가 비로소 아버지가 될 것 같습니다.

   * 내가 읽은 이달의 작품

                        죽음의 형식들

                              정 한 용

   낮선 시인 한 분의 작품을 읽는다. 김동찬 시인은, 잡지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목포에서 태어났지만 오래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지금은 LA에 살면서 (글마루) (우리시) 등의 동인활동을 하고 있다. 내가 아는 시인에 대한 정보는 이게 전부다. 미주 한국일보 문예공모에 입상하였다는데, 국내문단과 멀리 떨어졌으니 문학단체 행사 같은 공석에서나, 문인들이 모이는 인사동 술자리에서도 한번 못 만났을,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아득한 시인이다.
   그런데 김동찬 시인이 발표한 몇 편의 작품은 전혀 낮설지 않다. 가까운 곳에 살며 수시로 만나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이웃이거나, 언제든 불러내면 나타날 것 같은 친구의 작품을 읽는 것 같다. 내가 그의 작품을 읽으며 친근감을 느낀 이유는 그 시들이 주는 풍성하고 따스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앞에 인용한 「봄날의 텃밭」은 물론 함께 앞뒤로 놓인 「큰비」 「개똥벌레에게」 등이 읽는 이를 흐뭇하게 만들어 준다.
   또 한가지 이유가 있다면, 앞의 작품이 주는 분위기나 메시지가 전에 내가 쓴 적이 있는 「도라지꽃」이라는 시와 매우 많은 데에서 오는 동질의식 같은 것이다. 물론 두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어조는 다르지만, 나는 「봄날의 텃밭」을 읽으며 내가 「도라지꽃」에서 상상했던 그 장면을 다시 한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시인의 작품을 거론하 는 자리에 필지이 작품을 꺼내놓은 것이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두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도 김시인의 시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길이 될지 모른다는 판단에서 용기를 내본다. 「도라지꽃」은 얼마 전에 발표한 아주 짧은 시이다.

흰꽃이 피었습니다/보라꽃도 덩달아 피었습니다/할미가 가꾼 손바닥만한 뒷터에/꽃들이 화들짝 화들짝 피었습니다/몸은 땅에 묻혀 거름이 되고/하얀 옷깃이 바람에 흔들립니다/무더기로 손 쓸립니다/수년전 길떠난 內子를 여름빛으로 만나/한참을 혼자 바라보던 할애비도/조금씩 보라/물이 듭니다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연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했다. 할머니가 10여년 먼저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90이 넘게 장수하셨지만 말년을 쓸쓸히 보내셨다. 내 고향 텃밭에는 할머니가 가꾸시던 도라지꽃이, 봄마다 새로 심지도 않았는데 땅 속에서 겨울을 나고 해를 넘긴 뿌리들이 봄음을 아름답게 피워올렀다. 도라지 옆에는 새봄에 모종을 한 고추 몇 포기도 무성히 자라고, 상추나 아욱이나 부추도 파릇파
릇 갖가지 싱싱함을 뽐내며 앙증맞게 깔린다. 그 광경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 시에서 그리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 텃밭 가장자리에 물러앉아 도라지꽃을 바라보고 있는 그 모습은, 물론 나의 상상이다.
내가 할아버지의 자리에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김동찬 시인의 작품은 참 묘하게 비슷하다. 모방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연히도 흡사한 분위기를 다루고 있는데, 사실 이런 죽음을 다시 불러내는 인간의 상상력은 늘 우리를 자극하는 좋은 주제 아닐까 싶다. 오
히려 김시인의 시가 내 작품보다 더 넉넉한 것 같아 부럽기도 하다. 「봄날의 텃밭」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등장한다. 아버지는 지금 이 세상에 없지만 남긴 씨앗이 여전히 텃밭에서 박을 내고 봄을 풍성하게만
든다. 그 새 생명들을 아들민 화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숨죽이고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그는 아버지를 죽음 저편의 세계에서 불러내어 <아버지를 좀 더 자주 만나고 얘기를 나누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실재가 <텃밭>이라는 매개상징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라는 이념을 얻는다. 그 새로운생명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식의 지평이 확산되어 새로운 자아를 획득하는 것으로, 마지막에 이르러 화자가 <아버지, 제가 비로소 아버지가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죽음의 아우라는 죽은 자의 것이 아니다. 죽음은 죽은 자의 문제가 아니라 산 자의 문제라는 맥락에서,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세인은 현존재를 그 죽음으로부터 밀어내고 마는 이러한 안온과 동시에 사람은 도대체 죽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하는,그 태도를 취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암묵의 규을을 설정함으로써 권위와 위신의 자리에 자기 물을 두는 것이다‥‥‥‥(중략)‥‥‥ 죽음에 대한 불안에 있어서 현존재는 추월할 수 없는 가능성에 떠맡겨진 자로서의 자기자신에 당면하게 된다>.(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죽음이 규정
하는 모든 의례와 질서라는 외양에서부터, 죽음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포함한 존재에 대한 규정의 권리와 의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다.
   레비나스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죽음으로 인해 그것을 인식하는 자가 자신을 벗어나 타자로 향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한다. 주체의 초월은 결코 물질을 혀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물질로의 <되돌아옴>을 뜻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주체는 물질성을 띠고 물질에 의하여 근거를 마련하므로, 자아의 틀에만 갇혀 있을 수 없게 된다. 레비나스는 죽음의 예를 들면서, 죽음에의 접근은 주체가 자아를 <지배할 수 없는 사건>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이므로, 이 순간 주체는 타자의 영역으로 넘어가며 열린다고 한다. 주체가 진정으로 생성되는 순간은 바로 타자를 향해 주체를 투사할 때이다. 주체의 영역 밖의 세계로 주체가 전이되어 넘어가므로, 그 세계는 주체가 타자를 만나 타자화되는 세계이다. 진정한 타자의 순간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레비나스가 도덕론자로 귀결되는 것도 이해할 만하지만, 그러나 그가 제시한 타자로의 지향은 지금 우리가 잃고 있는 중요한 미덕 중의 하나이다.
   다시 김동찬 시인의 작품으로 돌아가, 좀더 살펴보자. 그 작품의 내용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겠다. 1) 아버지가 남긴 씨앗을 화자인 내가 텃밭에 심는다. 2) 돋아난 싹을 들여다보며 아버지를 만나 대화를 나눈다. 3) 과거의 아버지를 이해하고 드디어 내가 새로운 아버지가 된다. (죽음-소생)이라는 문제도 그렇지만, 또 아버지를 통한, 혹은 <극복한> 새로운 자아의 탄생은 그리스 신화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작품의 중요한 원형 모티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주제는 새롭지는 않지만, 그만큼 다양한 이야기의 가지를 만들면서 풍성하게 변주될 수 있다. 이 작품도 그런 자리에서 살핀다면 여러 유용한 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생명의 순환보다 죽음 자체에 대해 정밀하게 접근해 보고자 한다. 이 문제는 라캉을 원용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라캉정신분석의 핵심은 실재(R), 상징(5), 상상(I)의 관계이다. 라캉을 이렇게 단순화시켜 해석할 때 엄청난 오해가 생기게 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이 그리고 있는 죽음의 전환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죽음은 여기에서 구체적인 사건, 실재이다. 그런데 실재는 언어라는 상징을 통해 실재를 넘어서고 확장되어 나간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그런 매개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버지가 남긴 씨앗이 다시 곽을 내밀고 그 자리에서 화자가 그것을 바라보는 구체적 사건이 대치한다. 하지만 이 구체적 현장성은 그 자체로 상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현현으로 인한 환상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세 형님의 <웃음소리>는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부터 깨달음을 통한 실재의 세계로 투사된다. 상징이 실재가 되면서, 이 실재는 이제 상상의 세계,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까지 데리고 온다. 아니 죽음이 상징과 만날 때부터 상상은 개입해 있다. 실재는 존재의 차원이지만 이데아는 당위의 차원이기 때문에 투사의 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즉 화자 자신이 아버지가 됨으로써 화자는 상상으로부터 다시 실재를 포함하게 된다. 즉 <아버지=나>의 관계가 전환/대치되는 순간이다.
   라캉에 의하면 실재와 상징과 상상은 세 개의 고리가 하나로 연결된 그런 관계이다. 그는 이런 세 개의 동심원이 하나로 연결된 것을 <보르매우스의 매듭>으로 비유한다. 죽음을 존재에서 당위로 전환시키면서 새로 태어난 실재는, 그 자체로 새로운 존재가 아니라 이미 <있던> 것 들로부터 전이된 존재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죽음과 텃밭과 <나>는 독립될 수 없는 한 몸인 것이다. 또 이러한 전이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촉발된 욕망에서 내가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욕구 사이의 미세한, 그러나 중요한 간극을 파악하는 일이다. 아버지와 나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시간을 지운 흔적에도 있지만, 그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된다는 데에 있다. 아버지가 존재를 규정하는 자라면 나는 당위를 이끄는 존재인 것이다. 이 엄격한 틈을 메꾸거나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은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거칠게 듬성듬성 설명해서는 정확한 의미가 잡히지 않을까봐 걱정이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내 능력 부족이고, 자리도 넉넉하지 않다. 죽음은 소멸인 것 같지만, 늘 우리를 긴장 속의 생성으로 몰아넣는 사건이다. 김동찬 시인의 작품을 보며 죽음에서도 마음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감동을 읽는다.

정한용
충북 충주 출생 ·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1985년 『시운동』으로 등단 · 시집 『슬픈 산티핀 『나나 이야긴 · 평론집 『지옥에 대한 두 개의 보고서』 등



    ⊙ 발표문예지 : 현대시학[2002/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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