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01 05:18

갈치를 구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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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치를 구우며


어느덧 구혼의 단꿈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후부터 이 아줌마가 슬슬 나를 부려먹기 시작한다. 이제는 쓰레기 가져다 바깥으로 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빨래 걷기, 장 볼 때 카트끌기 등 온갖 잡스러운 일들을 안 시키는 것이 없다. 한때 열 받아서 “나 싱글로 다시 돌아갈래. 넘 재미없어.”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오다가도 가진 것은 두 쪽 밖에 없는 나와 살려고 1200마일을 날아온 이 아줌마, 좋은 직장 때려치우고 엘에이에 와 힘든 직장생활하며 어깨가 아프다고 주물러 달라할 때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단단한 어깨를 만지면 나도 모르게 뭉클하며 깨깨갱 볼멘 소리가 쏙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오늘 아침 반찬은 뭔데?” 모처럼 주말 아침부터 부산을 떠는 아줌마에게 물으니 된장찌개와 쌈 그리고 갈치구이라고 한다. 다행히 아줌마와 나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된장찌개와 생선을 엄청 좋아한다는 점에서 식성이 같아 식사할 때만큼은 행복이 넘쳐흘렀다. 그런데 아줌마가 오늘은 나보고 마당에 나가 갈치를 구우라는 것이 아닌가?

내일 모레면 50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집 한 채 가진 것이 없어 그간 아줌마가 내려와 처음에는 아파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이 아파트라는 것이 내게는 너무 맞지 않았다. 어느 날 밤중에 자다가 잠이 깨어 내가 마치 성냥갑처럼 갇혀진 공간에서 닭처럼 웅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쪼그라들어 발기가 안 되는 것이다. 그간 이사하는 것을 싫어하던 아줌마는 이 중차대한 사건에 직면하여 깜짝 놀라 그 다음 날 바로 이곳 한인타운의 비교적 조용한 하우스의 별채를 계약해 버렸다. 작지만 침실이 하나 있고 주방과 거실 그리고 내 공부방이 하나 있는 지은 지 오래 안 된 깨끗한 별채이다. 더욱 맘에 드는 것은 주인집은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동생 할머니 세 분이 사는데 모두 곱게 늙으신 좋으신 분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할머니는 뒷마당 구석구석에 깻잎과 부추 등 채소를 심었는데 이것들을 할머니 몰래 살짝 뜯어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올 가을에는 마당에 주렁주렁 열릴 대추와 감도 서리해 먹을 생각을 하니 절로 기분이 삼삼해지는 것이다.

갈치가 담긴 프라이팬을 받아들고 야외용 버너에 올려놓고 쭈그리고 앉으니 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이다. 서정주의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 같은 꽃이여’라는 유명한 ‘국화 옆에서’가 떠오르는 한편 ‘이제는 돌아와 프라이팬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갈치를 굽는’      내 자신의 지난 2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어느덧 갈치가 타들어가는 비릿한 생선 냄새가 코를 자극하여 상념에 깨어 뚜껑을 여니 아니 아줌마처럼 통통히 살이 오른 갈치가 다섯 토막이나 들어있지 않은가? 나는 순간 대박이 터진 사람처럼 기쁨을 감 출 수가 없었다. 다섯 토막이면 아줌마가 두 토막 내가 두 토막, 내가 최소한 두 토막은 먹을 수 있고 내 오늘은 기필코 싸워 나머지 한 토막도 내가 먹고 말리라. 이렇게 결심을 하는 차에 갑자기 외할머니 생각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할머니가 연탄불에 갈치 한 마리를 구우면 내 기억에 다섯이나 여섯 토막이었다. 가장 살이 많은 가운데 토막은 아버지가 드시고 그 다음 큰 것은 할머니가 평생을 당신보다 사랑하셨던 무남독녀 외동딸인 우리 엄마, 그리고 형이 하나 나 하나. 할머니는 주둥이가 칼처럼 삐죽 나온 갈치 대가리나 기다란 꼬랑지를 드셨는데 그것도 밥상에 올리지 않고 방바닥에 놓고 드셨다. 아버지가 “어머니. 상에 올려놓고 드세요.”하시면 할머니는 “신경 쓰지 마소. 난 이렇게 먹는 것이 편안께.”라고 말씀하셨다. 평생을 딸 하나 밖에 못 낳은 죄로 외할아버지에게 소박맞고 사위에게 얹혀사신 외할머니. 올해 벌써 아흔이 되었다.
며칠 전 반년 만에 할머니에게 전화하였다.

“소식 들었다. 잘했다. 잘했어. 내 니 생각만 하면 짠해서 죽겠더니 이제 구천에서도 편하게 됐다. 이제 뿔뚝 성질 버리고 알콩달콩 잘 사소 잉.”

갈치 타는 매운 연기에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데 갑자기 파리란 놈이 나타나 내 상념을 깨운다. 냄새를 맡고 달려든 것이다. 이놈이 냄새가 나는 곳으로 돌진하려 했으나 그 뜨거운 열기에 주춤하고 연기를 맴돌고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래. 내 오늘은 너를 쫒아내지 않으리라. 내 갈치에 혀를 대지는 못할진대 냄새라도 실컷 맡다 가게나.”
파리들이 나타나 프라이팬 주변을 맴돌며 춤을 추자 나도 갑자기 춤이 치고 싶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나 마치 ‘늑대와의 춤을’이라는 영화에서 나오는 캐빈 코스트너처럼 갈치 굽는 프라이팬 앞에서 파리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다. 어쩌면 인생의 행복이란 갈치 한 마리가 주는 행복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고 느끼면서 마냥 행복해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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