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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지성 30년, 한국문학 30년

2008.06.30 23:48

미문이 조회 수:1046 추천:9

문단 소식/문학과 지성 30년, 한국문학 30년



 「창비」에 맞서 열린문학 추구
한글세대의 문학과 사회를 고민


金炳翼·金玄이 주도한 「1세대 편집진」이 權五龍·정과리 등 「2세대 편집진」을 거쳐 3세대 편집진으로 이어져



朴海鉉 朝鮮日報 문화부 기자



1975년 청진동에서 출발

『「문학과 지성사」가 창사된 1970년대 중반은 유신시대의 춥고 캄캄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엄혹한 시절에 문학적·정신적으로 마음 맞는 친구끼리 모여 작품을 읽고, 비평하고, 글쓰고, 책 만드는 것은 분명 따뜻하고 정겨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벌써 한 세대가 지났군요』

2005년 12월12일 창사 30주년을 맞은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약칭 「문지」) 초대 대표를 지낸 문학평론가 金炳翼(김병익·現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씨는 깊은 감회를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1975년 서울 청진동의 한 건물에서 출범한 문지는 창립 1세대에서 현재 시인 蔡好基(채호기)씨를 대표로 하는 2세대 동인들에게 경영과 편집이 넘어간 가운데, 30~40代의 3세대 동인까지 거느리고 있다.

창사 30주년 직전 어느 목요일, 서울 동교동 문지 사옥에서는 金炳翼씨를 중심으로 한 문지 1세대의 모임이 열렸다. 문지 1세대가 모이는 매주 목요일이 늘 그렇듯이 이날도 바둑판이 벌어졌다.

金炳翼씨와 소설가 金源一(김원일)씨, 시인 鄭玄宗(정현종)씨와 소설가 洪盛原(홍성원)씨, 평론가 金治洙(김치수)씨와 소설가 卜鉅一(복거일)씨가 각각 한 조를 이뤄 심각한 표정으로 바둑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각기 다른 장르에서 활동해 온 문인들이지만, 어느덧 銀髮(은발)을 감추지 못하는 生의 길목에 들어섰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문지 4K」

그런데 문지 1세대 중에서 유난히 黑髮(흑발)에 童顔(동안)을 유지하는 평론가 金柱演(김주연)씨가 바둑판을 훑어보면서 슬쩍 한마디 던졌다.

『주로 머리 허연 사람들이 바둑을 두는구먼』

그는 문지 동인들 중에서 유난히 바둑에 관심이 없다.

가만히 보니, 바둑에 심취한 金炳翼과 金治洙씨 그리고 바둑을 멀리하는 金柱演씨와 함께 있어야 할 또 다른 金씨가 보이지 않았다. 1990년 48세로 아깝게 작고한 평론가 金玄(김현)씨다. 그 네 명의 金씨는 한때 「문지 4K」로 불리면서 1970년대 이후 한국 문학에 「창작과 비평」(약칭 「창비」)과 함께 계간지 시대를 열었던 계간 「문학과 지성」의 편집 동인이었다.

그리고 문학 동인은 아니었지만, 문지 창간에 재정적 후원을 했던 黃仁喆(황인철·1993년 작고) 변호사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단지 벽에 걸린 사진 속에서 친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늘날 한국 문학 출판의 名家(명가)로 손꼽히는 문지의 역사는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金炳翼·金治洙·金柱演·金玄씨 등이 계간 「문학과 지성」을 가을호로 창간했고, 이것이 토대가 돼 1975년 12월12일 문지 동인들의 합자로 출판사가 차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간 「문지」는 1979년 12·12로 권력을 잡은 新군부에 의해 1980년 「발행 목적을 어겼다」는 이유로 계간 「창비」와 함께 강제 폐간됐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민주화 바람을 타고 계간지 복간이 가능해졌지만, 문지 1세대 동인들은 새로운 젊은 비평가들에게 잡지 창간의 길을 열어 주었다.

문학평론가 權五龍(권오룡)·秦炯俊(진형준)·洪廷善(홍정선)·成民燁(성민엽)·林友基(임우기)·정과리씨가 계간 「문학과 사회」라는 새로운 제호로 문지 2세대 비평의 시대를 열었다.

문지 창간 30주년을 맞아 단행본으로 출간된 社史(사사)에 실린 문지 1세대 金治洙씨의 회상을 따라가 보면 이렇다.


4·19와 한글세대

『1970년 여름에 문지를 만들자는 이야기가 처음 나오긴 했지만, 「문학과 지성」 이전에도 동인지 운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1962년 金玄씨가 주동해 「산문시대」라는 동인지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다섯 호를 내고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동인지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金玄씨는 「우리 세대가 우리 세대의 표현 기관을 가져야 된다」는 주장을 늘 했고, 그것을 꿈꿔 왔습니다. 우리 세대가 특별히 다른 점이 있는데 그것은, 첫째 4·19이고, 둘째 한글세대라고 강조했죠. 우리는 역사적으로 처음 한글로 공부하고, 한글로 사유하고, 한글로 표현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이전 세대와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산문 시대」에는 시인 崔夏林(최하림), 소설가 姜好武(강호무)·金承鈺(김승옥)·徐廷仁(서정인), 평론가 郭光秀(곽광수)·廉武雄(염무웅)·金玄씨 등이 참여했고, 1964년 5호를 끝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뒤이어 1966년 시인 黃東奎(황동규)·朴利道(박이도)·鄭玄宗, 평론가 金華榮(김화영)·金柱演씨 등이 만든 詩 전문 동인지 「사계」가 나왔고, 1969년 金承鈺·金柱演·金治洙·金玄·朴泰洵(박태순)·廉武雄·李淸俊(이청준)씨 등이 참여한 동인지 「68 문학」이 나오면서 戰後(전후) 1950년대 문학에 반기를 든 1960년대 4·19 세대의 문학적 역량이 집단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계간 「문지」는 이런 젊은 문학 동인지 세대가 문학적 통과제의를 거쳐 이합집산한 끝에 태어난 것이다.

특히 金玄씨는 계간지 창간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소설가 金承鈺, 평론가 金治洙씨와 거의 매일 만나 계간지 창간을 구상했고, 제호는 「현대비평」으로 결정했다. 그는 당시 동아일보 문화부 기자로 있던 金炳翼씨를 포함해 계간지를 창간하자고 나섰다.

결국 세 명의 金씨들은 당시 독일 유학 중이었던 金柱演씨가 귀국하면 동인에 포함시키기로 하고 이른바 「문지 4K」를 결성했다. 그런데 문제는 잡지를 펴낼 돈이었다. 金炳翼씨는 절친한 친구인 변호사 黃仁喆씨를 찾아갔다. 黃변호사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계간지 원고료를 부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金玄씨가 구상했던 「현대비평」이란 제호는 문공부에서 거절당했다. 『「비평」이나 「평론」이란 표현이 들어간 제호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시인 金芝河(김지하)씨가 담시 「오적」 등으로 필화사건에 휘말리고, 「사상계」마저 정권의 탄압으로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는 가운데, 「창비」가 정부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문공부 담당자는 지식인들이 비평이니 평론이니 하면서 내는 잡지에 거부감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金玄씨가 즉석에서 기지를 발휘해 「문학과 지성」이란 제호를 내놓았고, 문공부도 등록 신청을 받아들였다.

계간 「문지」 동인들은 독자적 출판사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일조각 출판사에서 책을 내야 했다. 동인들이 원고를 기획해서 청탁하고 받아서 넘겨주면 일조각 출판사가 인쇄와 판매를 책임지는 형식이었다. 「문지」 창간호 창간사는 金玄씨가 썼다.


「문학과 지성」이 추구한 것들

〈이 시대의 병폐는 무엇인가? 무엇이 이 시대를 사는 한국인의 의식을 참담하게 만들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이 패배주의와 샤머니즘에서 연유하는 정신적 복합체라고 생각한다. 심리적 패배주의는 한국 현실의 후진성과 분단된 한국 현실의 기이성 때문에 얻어진 허무주의의 한 측면이다. 그것은 문화·사회·정치 전반에 걸쳐서 한국인을 억누르고 있는 억압체이다.

정신의 샤머니즘은 심리적 패배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것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정확히 파악해 그것의 분석을 토대로 어떠한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중략)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하나는 폐쇄된 국수주의를 지양하기 위하여, 한국 이외의 여러 나라에서 성실하게 탐구되고 있는 인간 정신의 확대의 여러 징후들을 정확하게 소개·제시하고, 그것이 한국의 문화 풍토에 어떠한 자극을 줄 것인지를 탐구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폐쇄된 상황에서 문학 외적인 압력만을 받았을 때 문학을 지키려고 애를 쓴 노력이 순수 문학이라는 토속적인 문학을 산출한 것을 아는 이상, 한국 문학을 「한국적인 것」이라고 알려져 온 것에만 한정시킬 수 없다는 것, 다시 말하자면 한국 문학은, 한국적이라고 알려진 것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보편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추구하려는 노력마저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태도는 한국의 문화 풍토 혹은 사회·정치 풍토를 정확한 사관의 도움을 받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우리가 취할 또 하나의 태도는 한국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의 제반 분야에 관한 탐구의 결과를 조심스럽게 주시하겠다는 것이다. 「조심스럽게」라고 우리는 썼는데, 그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그것에 쉽게 빨려 들어가 한국우위주의란 패배주의 가면을 쓰지 않기 위해서이다〉

「문지」 창간사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그 이전까지 金東里(김동리)의 소설과 徐廷柱(서정주)의 詩로 대표되는 한국적 토속 문학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한국문인협회로 대표되는 문단의 보수주의를 질타하는 젊은 비평가들의 목소리를 토해 냈다. 주로 서구 문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최신 문학 이론의 수용에도 적극적 의사를 표명했고, 동시에 한국 문학과 역사에 대한 젊은 인문사회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최대한 반영해 새로운 한국학의 논리를 세우겠다는 야심도 감추지 않았다.

문학 창작 면에서 문지 작가들의 한국 현실에 대한 知的(지적) 고민이 돋보였다. 한반도 분단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성찰한 崔仁勳(최인훈)씨의 관념 소설을 적극 옹호했고, 李淸俊·洪盛原·金源一·趙海一(조해일)·趙世熙(조세희)·崔仁浩(최인호)씨 등에게 지면을 제공했다.

詩에서는 黃東奎·鄭玄宗·吳圭原(오규원) 시인 등이 체념과 비애의 개인적 서정에 빠졌던 한국적 전통시에서 벗어나 개인적 삶과 당대 현실의 긴장 관계 속에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실험하는 詩를 선보여 詩人 지망생들에게 참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문지는 불문학자 金玄·金治洙, 독문학자 金柱演씨 주도로 유럽의 현대 비평 이론을 소개하고 한국 문학에 적용하는 데 적극적이면서, 관련 도서들을 대거 번역했다.

한국사에서는 한국 근대사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연구를 주목했고, 나중에 金玄씨는 국문학자 金允植(김윤식)씨와 함께 「18~19세기 영정조 시대에서 한국 근대 문학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학설을 담은 「한국문학사」를 공동 집필했다.


리얼리즘 지향하는 「창비」와 양립

다시 「문지」 창간 시절로 되돌아가면, 먼저 창간돼 리얼리즘 문학을 지향하는 계간지 「창비」가 이미 상당한 파워를 형성하고 있을 때였다. 신생 계간지 「문지」가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은 「창비」와 구별되는 독자적 문학 이념과 창작 필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金治洙 씨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사실 그 당시 「창비」가 사회에서 아주 좋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창비」의 역할에 대해 굉장한 외경심을 가졌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창비」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 아쉽게 생각하는 점도 있었습니다. 「창비」는 군사정부와의 격렬한 싸움 때문에 문학작품을 정치와 사회에 종속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를 떨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문학 작품이 거의 그런 잣대로 평가되는 경향이 많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문학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부터 문학을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고민했습니다. 즉 정치와 사회 제도가 바뀌어도 존속할 수 있는 문학, 우리가 살기 좋은 사회가 되어도 읽을 수 있는 문학, 이러한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학을 지켜 나가는 것이 바로 「문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문지」는 「경직된 사고를 거부하고 반성적 사유와 열린 지성을 옹호한다」는 입장을 표방했다. 「정신을 안일하게 하는 모든 힘에 대하여 성실하게 저항해 나갈 것」이란 입장은 현실 참여 문학론이 민중 중심의 역사 진보를 맹신하고, 투쟁을 위한 구호주의에 안이하게 매몰되는 것에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창비」가 실천적 이성에 비중을 두고 문학의 현실 참여를 주장한 반면에 「문지」는 이론적 지성으로 넓은 의미의 현실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고 문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다』는 문지 내부의 설명이 나왔다.

이와 관련, 문지 4K는 1974년 「한국문학의 이론」이란 共著 머리말에서 그들의 문학적 충동이 1960년대 초기의 열기와 갈등, 4·19 열기의 거센 흥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면서, 4·19를 통해 만난 역사의 의미와 자유의 의미를 탐구하고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식과 언어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찾겠다고 밝혔다.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金炳翼씨, 출판사 「문학과 지성사」 차려

그러나 현실은 문지 4K가 계간지만으로 자기 발언을 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75년 金炳翼씨가 동아일보에서 해직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번에도 아이디어는 金玄씨에게서 나왔다. 그는 「어차피 독자적 출판사를 차려야 하고, 앞으로 동인 중에서 金炳翼씨처럼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나올 수 있으니, 생계유지 차원에서도 출판사를 만드는 게 낫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신문기자 외에 다른 일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金炳翼씨는 처음에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결국 동인들의 뜻을 받아들여 「문학과 지성사」 대표 자리에 앉았다. 金炳翼씨는 열화당 출판사(대표 李起雄)와 공동 사무실을 쓰면서 출범할 당시의 문지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7평의 좁디좁은 공간 안에 낡은 응접 세트와 책을 쌓아 둘 약간의 자리, 그리고 책상 세 개로 꽉 차는 사무실, 그것도 사장 둘에 사환 하나라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몰골 속에서 문학과 지성사가 출범했고, 열화당이 독립한 것이었다. 꼴은 그래도 동인들은 대견해하면서 의욕적이었고, 친구들은 장래를 격려하며 축하를 보내 주었다.

나도 그때쯤에는 체념을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의욕이 불어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책임감에 차 있어서, 이제 무언가 우리 일, 아니 내 일을 해볼 만하게 되었다고 자신감을 북돋고 있는 중이었다. 개업 고사에는 高銀(고은)씨가 와서 축문을 읽어 주었고, 우리는 자리를 옮겨 사무실 바로 뒤에 있는 「경주집」에서 거나하게 술을 마시며 희망에 겨워했다』

문지 출판사의 본격적 활동에 이어 계간 「문지」는 1977년 평론가 吳生根(오생근)씨와 金鍾哲(김종철)씨를 편집 동인으로 영입했지만, 金鍾哲씨는 곧이어 동인을 탈퇴했고, 현재 「녹색 평론」을 발행하고 있다.

지식인 문학과 인문주의의 결합을 지향했던 문지 출판사의 활동은 평론가 白樂晴(백낙청)씨의 평론집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黃晳暎(황석영)씨의 소설 「객지」 등을 통해 민족 민중 문학론의 산실이었던 「창비」와 경쟁 관계를 형성하면서 서서히 한국 문학의 양대 산맥을 구축했다.

「창비」의 편집위원인 평론가 崔元埴씨는 「문지」 30주년 社史에 실린 좌담회에서 「문지」의 특징을 이렇게 풀이했다.

『「창비」와 「문지」는 4월 혁명이라는 공통의 근원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순수 문학을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삼았던 문협과는 차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상상력의 근원을 같이했던 「창비」와 「문지」 그룹 사이의 분화는, 말하자면 문학의 자율성이라고 할까 그런 점에서 나타났지요.(중략)

1970년대 문학사를 이렇게 보면 전통적인 문협의 순수 문학 진영이 있었고(사실은 말로만 순수했습니다만) 또 거기에 저항했던 그룹인 「창비」가 있었고, 그 사이에 「문지」 그룹이 일종의 중도적인 영역으로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가 꼭 非생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이 당연하고, 이러한 차이에서 오는 생산적 긴장이 1970년대 문학을 더 풍요롭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난쏘공」 200쇄의 기록

문지 출판사는 1978년과 1979년에 발전기를 맞이했다. 黃東奎씨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 鄭玄宗씨의 「나는 별아저씨」, 吳圭原씨의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을 통해 詩集(시집) 출간에 본격적으로 나섰고, 이 시리즈는 「문지 시인선」으로 바뀌었다.

이 시집 시리즈를 바탕으로 계간 「문지」는 金光圭(김광규), 李晟馥(이성복), 文忠誠(문충성), 朴南喆(박남철), 金惠順(김혜순), 黃芝雨(황지우)씨 등 1980년대 詩를 이끌 詩人들을 대거 배출했다. 소설에서는 尹興吉(윤흥길)씨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趙世熙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金源一씨의 「오늘 부는 바람」 등 화제작들을 출간했다.

「난쏘공」은 1978년 6월 초판을 찍은 뒤 최근 순수 소설 작품집으로는 한국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200쇄까지 찍는 대기록을 수립했다.

작가 趙世熙씨는 200쇄를 맞아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초판이 나왔을 때 평론가 金玄이 8000부는 나가겠다고 했는데, 나는 속으로 「지난 3년 동안 온갖 곤경을 겪으면서 썼으니 그보다는 더 나가야지」 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사랑을 받을 줄은 나나 金玄이나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80년대 들어 계간 「문지」는 폐간됐지만, 출판사 문지는 활발한 단행본 출판을 통해 여전히 한국 문학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동시에 문지 2세대가 서서히 형성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82년 5월부터 문지는 무크지(Mook誌·非정기 간행물) 「우리 세대의 문학」을 펴내면서 새로운 문학 세대의 기관지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 세대의 문학」은 1988년 2월 계간 「문학과 사회」(약칭 「문사」) 창간의 모태가 됐다. 「우리 세대의 문학」이 나올 당시 한국 문단은 무크지 전성기였다.


1980년대 「詩의 시대」를 주도

「실천문학」, 「언어의 세계」,「문학의 시대」, 「지평」, 「전망」, 「삶의 문학」 등 광주의 5월 이후 대거 등장한 젊은 문인들이 소집단 형태로 다양한 노선의 무크지를 통해 작품 활동을 벌였다. 「반시」, 「자유시」, 「목요시」, 「시운동」, 「5월시」, 「시와 경제」 등 詩 동인지들이 우후죽순격으로 태어나 1980년대를 「詩의 시대」로 만들었다.

문지가 탄생시킨 무크지 「우리 세대의 문학」을 이끌었던 소설가 李仁星(이인성)씨는 『우리의 입장은 문학 역시 역사적이며 사회적인 제도이자 생산물이지만 그 생산 동력이 상상력임으로 인해 독특한 자율성과 특수한 사회적 기능을 갖는 문화 양식이라는 것으로 수렴된다』며 『이후 이 명제는 동인 각자 마다 미세한 관점의 차이를 나타내고 변모해 나가기도 하지만, 「문사」 1세대이자 「문지」 2세대인 우리들을 묶고 유지시켜 나가는 문학관의 밑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계간 「문사」 창간 멤버인 평론가 成民燁(성민엽)씨는 창간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이와 같은 일종의 세대교체는 한국 문학사에서 아마 전례가 없는 듯한데, 「문학과 지성」이라는 옛 계간지의 이름이 선배 세대에게는 아쉬움으로 남았고, 후배 세대에게는 부담감으로 남았다. (중략)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잘해야 본전」이라는 속언에 딱 들어맞는 처지라고 할 수 있었던 후배 세대는 스스로의 이름을 「문학과 사회」라고 지었다.

「문지」 2세대라는, 듣기에 따라, 그리고 말하기에 따라 불명예스러운 뜻이 될 수도 있는 세칭은 어차피 감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면 계간지의 지명도를 위해서는 옛 이름을 그대로 쓰는 편이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후배 세대로서는 이러한 개명이 꼭 필요했다. 지금 보기에는 지극히 범상하고 멋없는(멋없기야 당시에도 그랬다) 이름이지만 당시로서는 「지성」을 「사회」로 바꾸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선배 세대 중에는 이 새로운 이름에 대해 걱정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었다. 1980년대의 문학판이 사회학적 상상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고, 심지어는 사회과학이라는 제국의 지배 아래 놓였던 식민지 같은 양상을 보였기 때문에 「사회」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물론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 후배 세대가 생각하는 「문학과 사회」는 어디까지나 긍정적 의미에서의 「문학주의」에 입각한 「문학과 사회」였던 것이다』


「문사」 창간, 2세대 체제 확립

계간 「문사」의 창간으로 2세대 체제를 마련한 문지는 소설가 李仁星·林哲佑(임철우)·崔秀哲(최수철), 시인 黃芝雨·李晟馥·崔勝子(최승자)·金惠順씨 등의 작품집으로 1980년대 문학을 주도했다. 또한 卜鉅一씨가 1980년대 말 장편 「비명을 찾아서」를 문지에서 내면서 작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신춘문예나 문예지의 단편 소설 추천으로 등단해야만 했던 한국 문단의 관행을 파격적으로 깬 사건이었다.

386세대의 문학 청년들에게 문지의 책들은 경전에 가까웠다. 1980년대가 「詩의 시대」로 불렸으니 만큼, 문지가 펴낸 詩集 시리즈의 한 단면에 대해 평론가 이광호씨는 이렇게 정리했다.

『예컨대 1980년대의 앞자리에서 李晟馥은 우상 파괴적인 상상력으로 기성 詩의 체계를 충격하며 우리의 삶이 병든 세계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것을 깊이 있게 드러냈다.

李晟馥과 더불어 한국 詩의 위선적 교양주의를 파괴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黃芝雨는 형태 파괴의 방법으로 거둘 수 있었던 詩的(시적) 성과의 최대치를 보여 주면서 1980년대적 정치 의식의 민감성 속에서 고통의 제스처, 낭만주의적 선언, 자학의 포즈, 냉소, 풍자, 비극적 서정 등 다채로운 문체로 고통과 부정의 언어를 찾아 꽃피워 냈다. 1980년대의 끝자리에서 이 세계의 부정성과 부정성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기형도는 그 부정성에 대한 절망과 공포에 관해 섬뜩하게 읊조렸다』

문지는 1970년대부터 한국 여성 소설의 새 장을 연 吳貞嬉(오정희)씨의 「불의 강」 등 작품집들을 꾸준히 펴낸 데 이어 1990년대에 들어와 만개한 여성 소설의 시대에서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동인문학상 수상작가인 崔奫(최윤)씨의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소설가 申京淑(신경숙)씨의 「풍금이 있던 자리」 등 화제작을 낳았다.

2000년대 들어와 문지는 본격적인 세대교체를 이룬다. 金炳翼 대표는 1993년에 문지를 株式(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고 주식을 문지 2세대인 「문사」 동인들에게 물려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2000년 문지 편집주간을 지낸 시인 蔡好基씨에게 대표 자리를 물려주면서, 蔡씨를 정점으로 「문사」 초기 동인들이 편집과 경영을 책임지게 된다.


3세대의 등장

문지는 세대교체에 앞서 뒷세대를 키우는 관행에 따라, 1996년부터 디지털 시대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각종 영상 매체와 사이버 문화가 문학과 결합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김동식·김태환·成耆完(성기완)·주일우·윤병무·최성씨 등 젊은 詩人과 평론가들이 만드는 무크지 「이다」를 창간하면서 21세기를 대비했다.

따라서 오늘날 「문사」 편집 동인들은 평론가 朴惠涇(박혜경)·禹燦濟(우찬제)·이광호·최성실·김동식·김태환씨 등 30~40代의 문지 3세대 비평가들로 재편됐다. 문지의 단행본 출간 방침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문지 1세대는 외국 소설을 번역해서 내지 않는다는 것과 어린이물을 출간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 왔다.

두 분야 모두 출판사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보장되는 것이었지만, 문지 1세대는 완고하게 그 원칙을 지키면서 순수 창작 문학과 인문사회학 전문 출판사의 위상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문지 2세대는 그 원칙을 모두 깼다. 외국 소설 번역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세계문학전집을 내고 있고, 「문지 아이들」이란 아동·청소년 문학 작품 시리즈도 내고 있다.

蔡好基 대표는 『2000년대 들어서면서 과거의 문지-창비 경쟁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출판사들이 많이 생기면서 문학 출판 시장은 큰 변화를 겪었다』라며 『기획과 영업 등에서도 문지가 예전과 같은 태도로 적응하기 힘들게 됐고, 문지 1세대가 새 세대에게 경영권을 물려준 것은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라는 주문을 담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국 문학 독자가 감소하면서 문지도 적잖은 타격을 받고 있다. 蔡대표는 『대중 문화가 문화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문학의 영웅들이 죽고, 문학은 문화의 주변부로 밀려났다』며 『문학의 힘이 축소됐다는 점에서 문학 전문 출판사들이 공동으로 반성하고 서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蔡대표는 『과거 문지의 인문학 총서 중에는 100권이 넘는 대형물이 많았지만, 이것도 차차 정리할 때가 됐다』며 『문지는 앞으로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서 15권 정도의 주제별 시리즈를 낼 계획』이라고 변화 방향을 밝혔다.

그런데 문지가 30년을 맞았지만, 문단 일각에서는 여전히 문지의 폐쇄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적잖다. 동인 내부의 결속이야 당연하겠지만, 문지 출신의 詩人과 작가만 너무 감싸면서, 그곳에서 책 내기를 갈망하는 문인들에게 좌절과 소외감을 안겨 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金柱演씨는 문지 특유의 공동협의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비판이라고 해명했다.

『비판과 불만은 표면상 「사장인 金炳翼이 항상 바둑만 두고 있어 손님을 홀대하고 술자리 접대도 잘 안 한다」는 투(金炳翼은 술을 못 한다)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이같은 공동협의체 운영구조의 산물이다. 무엇보다 「사안 결정이 늦고, 의견이 다양해서 누구의 말을 믿고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그 불평의 핵심인데, 그 원인이 바로 이 구조인 것이다.

그러나 「귀족적」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던 이러한 문제가 사실은 가장 민주적인 절차의 결과임을 어쩌랴. 나중에는 대부분 문단 인사들이 그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으나, 이해는 이해고, 불만은 불만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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