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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인의 고백/이향아

2008.05.22 01:13

미문이 조회 수:1006 추천:9

‘시인’이라는 말이 ‘바보’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릴 때가 있다. 때로는 ‘광대’라는 말처럼 슬프게 들릴 때도 있다. 보통 사람들이 시인을 ‘시인’이라고 부르는 어조에는 왜 하필 시 따위를 쓰는가하는 의혹이 숨어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살기에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서 겨우 시나 쓰는 사람이 현실의 무엇 하나 제대로 알겠는가하는, 혹은 얕보고 혹은 연민을 기울이는 눈길도 들어 있는 것 같다. 하기야 우리가 시에 미쳐서 시인을 최상의 존재로 존경하던 시절에도, 시인을 대수롭지 않은 존재로 경시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들은 시인의 언어가 터무니없는 신화이며, 시인들의 눈이 사시(斜視)인 것처럼 생각한다.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시인은 ‘시인’이라고 떳떳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주변의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도 시인임이 부끄러울 때가 많다. 그 부끄러움은 시인되었음이 자랑스럽지 않다는 말과는 다르다. 나는 정말 시인일까? ‘시라고 자랑할 만한 몇 편의 시를 가지고 있는가?’ 수십 년 동안 시를 써왔음에도 풀리지 않는 이 당혹감. “나는 시 같은 것은 몰라요.” “요즘 시는 통 알 수가 없더라구요.” 그럴싸한 문화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좌중의 시선을 모으면서 떳떳하고 당당하게 시와는 무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한다. - 요즘 같은 세상에 누가 시를 쓰나요? 현대는 산문시대입니다. 시는 몇몇 마니아들이나 즐기지요. 시인들이 모여서 저희들끼리 시를 바꿔 읽고 서로 칭찬하면서 도취하는 것입니다. - 이런 말을 듣는 날은 기운이 빠진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시인이 평범한 생활인이 되는 것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시인이 생활에 밝은 것은 곧 타락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떤 경우에도 시인의 인생은 시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하면서 ‘시인답게’, ‘시인이 뭐 저래’라는 말로 시인을 억압한다. ‘시인’ 그는 시인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지키고 간수하기 위하여 몇 끼니쯤 굶는 수는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영혼의 통증을 리듬으로 견디면서 육체의 추위쯤이야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시인인 나는 어떤가? 정직하게 말해서 시인인 내 자신을 지금까지 내 시를 옹호하기 위하여 내 인생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희생해 본 적이 별로 없다. 나는 내게 부관된 인생을 온건히 사랑함으로써 시인의 사명을 완수하려고 하였다. 건강하게 오늘을 생각하고 열렬하게 오늘을 살면서 흥건히 울기도 하고 통절하게 뉘우치려고 하였을 뿐. 내 삶의 어떤 부스러기도 쓰레기가 되어 나가는 것을 아까워하였다. 그래서 나는 조바심하며 앓았다. 내 인생, 내 생활은 내 시가 자랄 자양의 흙이며 모태라고 여기기 때문일까. 나는 시를 빙자한 병적 탈선을 싫어한다. 시가 넘치는 사랑이기는 하지만 불안정한 감정의 실험이나 유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예언의 종을 치는 사람이다. 인간의 고결한 감각과 예지, 순결한 양심과 고독이야말로 세상을 지키는 아름다움이라고, 시는 삶의 기후를 알리는 시계바늘이라고 시인은 끊임없이 종을 울려야 한다. 그러므로 시인, 그가 제 목숨을 어떤 방법으로 계속하고 어떤 방식으로 소모하든지 그 영혼이 사는 곳은 평지가 아니다. 그는 고산식물이다. 설화석고(alabastar)이다. 때로는 따돌림으로 인한 소외감과 세상살이에 대한 열등감, 관외로 물러나 완전히 동참되지 않는, 사계절 계속되는 한기 속에서 고집을 내세우면서 산다. 사치스러운 정신의 귀족이라는 것, 그것 한 가지만을 건지고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돌려준다. 시는 이런 것이라고 분석하고 검토하여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시와 잦은 충돌로 만신창이가 되어 더듬거리며 나는 말한다. 내가 만난 일들에 관한 것, 지나간 일과 사람에 대한 것, 그 고통과 그리움에 대한 것. 독자에게 영합하고 아첨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내 시가 읽는 이를 편안하게 하는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목관악기에서 울려 나오는 저음의 선율, 진실하고 아름다운 감격의 노래였으면 좋겠다. 나는 내 시가 생명과 사랑, 은혜와 공감으로 물오른, 광채가 되기를 열심히 바란다. 시는 때때로 독자를 배반하고 시인 자신까지도 속인다. 몽롱하고 불투명한 언어로 무엇 하나 분명히 지적하지 못하고 다만 기분에 편승하는 일도 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국어를 겸손한 마음으로 헤아려보려 한다. 어린 아이가 되어 말을 새로 배우듯 말을 쓸 때마다 다시 깨달으리라. ‘왜 시를 쓰나?’ ‘누구를 위해서 시를 쓰는가?’ ‘당신 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누가 나에게 이런 종류의 질문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것들은 거의 같은 질문이면서 나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정답은, 정답이 되기에 너무나도 애매모호할 것이 뻔하다. 내가 지금까지 시를 써서 이룩한 일이란, 겨우 내 치부나 드러내 보이고 나를 해체하여서 청천 백일하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폭로한 것밖에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해오고 있는 일은 만장 가운데 표적처럼 세워져서 희고 검은 시선을 받는 일이었다. 그 시선들은 때로 아름다운 조명일 때도 있고 황홀 찬란한 갈채일 때도 있었지만 아니다. 그보다 몇 배나 더 맹렬한 비수가 되어 나를 상처 입히고 나를 쓰러뜨렸다. 아니다. 시가 각광과 갈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시인들만의 과대망상, 가당치않은 희망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시인들은 이미 어떤 종류의 시선도 머무르지 않는 황막한 무관심의 들판으로 쫓겨난 지가 오래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의 시작 활동은 남을 위해서는 말할 것 없는 허무한 짓에 불과하다. 허무하고 허무한 것을 아편처럼 습용하고 산다. 가끔 문학과 무관한 사람들이 묻는다 “요즘도 시를 쓰십니까?” 이 질문은 '요즘도 시를 많이 쓰십니까?', '근래에는 활동이 뜸하시더군요.'. '요즘엔 어떤 시를 쓰십니까?' 등의 질문과 비교할 때 그 뒤 뉘앙스가 매우 다르다. 이 질문을 받을 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난처함에 직면한다. 아무래도 그들은 나의 시작 활동을 일시적 도락이나 취미 정도로 해석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말은 마치 ‘요즘도 계속 흥분하고 계십니까?’ 혹은 ‘아직도 그 일에 재미를 느끼고 계십니까?‘, ’아직 그만 두지 못했습니까?‘ 라고 묻는 것과 같다. 하다가 그만 두어도 그만인 대수롭지 않은 행위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인 것이다. 양식으로 생각하고 운명으로 수용해 들이는 시인의 입장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해석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슬프다. 나는 그와 같은 종류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네’라는 일음절의 말이 너무 무력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면서도 번번이 ‘네’라고 밖에는 달리 대답하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물론이죠’. ‘그럼요’라는 대답은 어리석은 질문과 조화를 이루는 어리석은 대답이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네’라는 일음절의 말은 무력하다. ‘시인’이라는 말만큼이나 무력하다. 그리고 쓸쓸하다. 아니, 노엽다. 나는 ‘네’라는 말에 덧붙여 그를 납득시키고 포섭하며 나아가서 그를 보기 좋게 항복시킬 그럴싸한 말을 속으로 탐색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세상에는 그럴 만한 말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나의 시법, 시론을 어떻게 정립해야 할지 모르겠다. 언어가 먼저 있고 문자가 있으면, 언어와 문자의 오랜 실천이 있은 다음 문법이 정리되었듯, 시가 무르녹은 그 뒷마당에 시론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담소와 같으며 뒷소문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러한 자리의 토론과 응수와 덕담과 그러한 연희를 좋아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을 헤쳐 보는 투명한 의식과 그것을 용해하는 따뜻한 감성이다. “당신은 이 시에서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셨습니까?” 자작시 해설을 청탁하듯 때로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아마 당신이 느낀 것과 비슷한 것을 표현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아무것도 표현하지 못한 셈이지요.”라고 대답하고 싶다. 모든 이론과 해설을 덮기로 한다. 그것이 아무리 친절하다고 할지라도 가면을 쓰지 않은 한 편의 시, 그것만 하겠는가? 그보다 더 감동적이겠는가? 거짓 노래는 거짓 증언이다. 거기엔 혈맥이 통하지 않으므로 생명이 없고 온기도 향기도 없어서 가화(假花) 조각이 마술사의 손에서 피어나듯이 감동 없이 흩날리다가 사라질 것이다. 거짓 증언은 한 가지 일도 해결할 수 없고 그로 인해 나는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져들 듯이 답답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만신창이가 되어 모래밭에 누울지라도 나는 ‘진실’을 깃발처럼 움켜질 것이다. 그런데 ‘진실’이란 것도 태도와 방법의 문제에 따라 달라진다. ‘진실’ 그 자체가 시의 종자는 될 수 있다. 시를 쓸 수 있는 모티브, 부풀어 오르는 감성이 도화선을 만나는 발아의 눈부신 찰라, 시인의 일상은 진실의 이런 얼굴들로 충만 되어 있어야 한다. 나에게 더욱 밝은 시력을, 사물이 아름답게 반사할 수 있는 투명한 거울, 예민한 악기가 되어 공명하는 가슴을, 내 목숨의 순간순간이 눈부신 감격으로 이어지는 은혜를! 그리하여 ‘쓰고 싶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남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하등의 보탬이 되지 못하는 이 명분 없는 작업에 분명한 이름이 붙을 수 있기를! 출처: 한국싸이버문학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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