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여섯 해
이 월란
이젠
그녀의 이름보다, 수액이 다 흘러내려 쪼그라든 그녀의 키보다
여든 여섯이라는 숫자가 그녀의 모든 신상기록을 대변해 주게 된 지금
버려진 이력서같은 그녀의 구겨진 몸뚱이가 침대 위에 엎드러져 있었다
장성같은 아들이 넷이나 되어도
그들을 위해 평생을 허리 굽혀 밥을 지었던 그녀의 휘어진 등을
어느 한 아들도 펴줄 순 없단다
그녀의 부고장이 당장 날아들어도 아무도 놀라지 않을 늙어버린 두 자리 숫자
이제 남겨진 모퉁이 하나 마저 돌면 절벽같은 미말의 휘장
그녀는 이제 정신이 먼저 놓아버린 목숨을 배로 기어 건널 것이다
피안의 담장 너머로 버려져도 억울타 할 수도 없는 여든 여섯 해
그녀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고된 발목을 내리고
질긴 육신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깔끔했던 그녀는 치매에 걸려서도 실수할까 늘 두려워 온종일 보챈단다
<오줌 마려워요, 저 좀 데려다 주세요. 녜?>
양반댁 규수시절의 연분홍 아씨로 돌아가 버린 것일까
그녀의 말투는 시종일관 고운 존대말이다
덧없는 세상이 더욱 덧없어 마음이 먼저 떠나가버린 그녀의 작고 둥근 몸은
만지면 오그라드는 쥐며느리같다
강보에 싸여 그대로 늙어버린 아기같다
그녀의 딸이 볼을 비벼주며 <엄마, 이쁜 시계도 찼네? 지금 몇 시야?> 물으니
<녜, 7시 5분이에요> 하신다
첫사랑과의 약속 시간이었을까, 어미의 자궁같은 고국을 훨훨 떠나온 시간이었을까
주저 없이 대답하던 그 7시 5분이란 시각은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이젠 쓸모없는 시간의 바닥을 꿈틀꿈틀 기어다니는
그녀의 작은 몸을 쓰다듬고
마디 굵은 그녀의 목질같은 두 손을 꼭 잡았다 놓고
값싼 눈물 몇 방울 떨어뜨려 두고 집으로 오는 길
버텨낼 수 없을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저 질긴 목숨의 길
그녀의 목소리가 자꾸만 따라온다
<오줌이 마려워요. 눈물이 마려워요...>
2008-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