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역사
이월란
내 어린 날 비는 늘 몸 밖에서 내렸다. 육화되지 못한 관념처럼 음원이 없는 어린 몸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방음된 소리에 불과했다. 가끔 우산 살대를 타고 내려와 깡똥한 치맛자락이 젖기도 했지만 이방인의 눈물처럼, 체액으로 흘러들어오진 못했다. 렘수면* 위로 천진하게 차오르는 무색정의 구슬바다였다. 사람의 일을 알 수 없었으므로, 서러운 장애를 인정할 줄 몰랐으므로. 젖빛 구름이 가슴 속에 멍울처럼 자리잡았을 때쯤에서야 장대비 몇 가닥 오도독 오도독 씹어 삼켰을라나. 키가 다 자라고나니 이젠 비가 몸 속에서 내린다. 방치되었던 오열의 시울이 한 점씩 삭아내리며 봇물처럼 흐른다. 음모를 부추기는 반역자의 속삭거림처럼 내려서도 환자복 아래 흥건히 젖어오던 양수처럼 흐드러지는 빗물. 오랜세월 잉태해온 슬픔의 해산이다. 비의 어린 것들은 알을 깨고나와 맨땅 위에 파닥파닥 엎어지고 억겹으로 쳐지는 물빛의 차일은 문란하게도 불규칙바운드만 일삼는다. 나이테의 발처럼 가지런히 걸어도 분노의 오르가슴으로 젖었다. 지금은 바싹 마른 땅도 흥건히 용서받는 적우의 계절, 빗방울이 자꾸만 굵어진다.
2009-01-07
* 렘수면(REM睡眠) : ꃃ〖심리〗 =역설수면. 잠을 자고 있는 듯이 보이나 뇌파는 깨어 있을 때의 알파파(α波)를 보이는 수면 상태. 보통 안구가 신속하게 움직이고 꿈을 꾸는 경우가 많다. ≒능동적 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