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체주의, 그것은 곧 자연주의였다
-나체생활 200分 체험기
이태 전에, 서울 사는 C박사로 부터 자신의 저서 1권이 배달되었다.
제호는 ‘東유럽紀行’인데 자신이 수 년에 걸쳐 폴란드, 유고, 헝가리를
다녀온 기행문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 낸 것이었다.
나는 꼭 20년 전인 ‘83년 8월에 그와 함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UEA국제대회에 참석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
읽어 내려가다가 276쪽에 이르러서는 눈이 크게 뜨여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엔 <나체촌 방문>이란 소제목이 있고 그 내용 중에 나의 이름이
자신을 포함한 다른 일행 2명의 이름과 함께 당시의 직함과 더불어
고스란히 실명으로 거론되어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에 좀 당황했지만
이의를 달지는 않았다. 그리고 왜 실명을 넣었느냐고 항의를 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그 내용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나는 20년 전의 유럽 기행을 추억하면서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2편의 수필을 문학포탈사이트인 ‘문학의
즐거움’에 발표한 일이 있다.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 헝가리의 여행
얘기도 빼 놓을 수 없겠다 싶어 무엇을 쓸까 생각하다가 바로 내가
겪은 200분 간의 나체생활에 대하여 떠올리게 되었거니와 아내에게도
여행직후 이실직고한 일이기도하고 또 지금보다 훨씬 팽팽했던 40대
초반의 20년 전의 일인지라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해
가면서 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간추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나체주의라는 표현은 자연
주의로, 나체생활은 자연생활로 이해하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스런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찾아갔던 우리들은 실제로 나체생활
체험을 통해서 완전히 선입관과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UEA세계대회가 열렸던 부다페스트 시내의 원형경기장 게시판에서 ‘
자연주의자들의 만남’이란 포스터를 발견한 것은 대회가 시작된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전세계에서 4천여명의 동지들이 참석하여 모두가 같은
언어로 대회를 치루면서 자연스럽게 개개인들의 취미나 관심사에 따라
소그룹으로 모여서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돈독히 하기도 하는데 바로
위의 포스타에는 세계에스페란토자연주의자연맹이 개최하는 자연주의자
모임이 시내에서 120킬로 떨어진 어느 호수에서 갖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연주의자도 나체주의자도 아니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C박사가
저들의 모임에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멀리서 구경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와 그날은 특별한 일정도 마침 없는 시간인지라 문공부 K과장,
동아일보 L기자, 한의사인 C박사,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서 택시를
대절하여 현지로 향하였다.
당시 나는 여행업자였기 때문에 많이 보고 많이 들어두는 것은 해가 될
것이 없겠다 싶었고 또 호기심도 없지 않아서 참가는 하였으나 어쩐지
떳떳하지 못한 일 같아서 한 편으로는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택시는
이미 나체촌 가까이에 이르렀다. 큰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촬영금지’라는 글씨였다.
우리가 닿은 나체촌은 마을과 동떨어진 큰 호수로 울타리가 따로 없고
어떤 쪽에서도 호수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8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남녀 젊은이들이, 모두가 벌거숭이로 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들도 보였다. 언제까지 옷을 입고 그냥 바라볼 수
만은 없는지라 우리 일행도 걸친 옷가지들을 벗어 던지고 호수 속으로
뛰어 들었다. 저들과 하나가 된 것이다. 보트를 빌려서 발로 저어
호숫가를 돌아다니며 자연스런 저들의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바라
보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의 모습도 저들이 보는데에 조금도 제약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다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은 사라
졌다. 그런데 200여분간 저들과 어울려 자연스런 나체생활을 즐기는(?)
동안 우리들이 공통으로 느낀 것은 그저 아름답고 극히 자연스러웠던
것 뿐 어떤 성적인 마음은 따로 생기지 않았다는 것과 나체생활 동안
건장한 우리의 신체상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체생활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도
되었다.
우리가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에는 좀 어색하지만 일단 입욕을 하면서는
이내 자연스런 감정으로 바뀌듯, 바로 그런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모두가 자연의 일부분으로 사람들은 그저 움직이는 자연일 뿐 어느
누구도 성적인 상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오래 머물 수 없는 입장이라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니
좀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촬영금지’라는 경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얘깃거리를 만든다고 차에 돌아가 카메라로 줌을 이용하여
나체생활 장면을 몇장 찍은 것이 그만 발각되었는데 미모의 여성
감독관 2명이 역시 나체의 모습으로 당당히 다가와 아직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우리들에게 ‘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니 더 이상 촬영은
금한다’는 주의를 환기시켰고 우리는 알았다고 하였지만 기왕에
찍은 필름은 압수하지 않았다.
부다페스트로 다시 돌아오는 차안에서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고 아직
카메라 속에 담긴 필름에 생생한 자료들이 있으므로 네 사람은 누구도
변명의 여지가 없게끔 되었는데 정말 우리가 많이 보고 돌아가는건지
많이 보이고 돌아가는건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뒷날 우리 일행은 서울에 돌아와 사진이 인화된 뒤에 강남 어느 근사한
집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사진들을 돌려보며 실컷 웃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나체생활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의심이 가는 독자들은
실제로 체험을 해보라는 말밖에, 문장으로는 더 이상 다른얘기를 쓸 수가
없다.
가면을 벗으면 진실이 나타나고 그 진실이 곧 자연임을 새삼 되새겨
본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자연의 본색을 어떻게 바로 읽을
수가 있겠는가? 색안경을 벗어야만 비로소 자연 그대로를 볼 수 있다.
<2003. 8. 27>
-나체생활 200分 체험기
이태 전에, 서울 사는 C박사로 부터 자신의 저서 1권이 배달되었다.
제호는 ‘東유럽紀行’인데 자신이 수 년에 걸쳐 폴란드, 유고, 헝가리를
다녀온 기행문을 한 권의 책으로 담아 낸 것이었다.
나는 꼭 20년 전인 ‘83년 8월에 그와 함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UEA국제대회에 참석한 인연이 있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으로 받아
읽어 내려가다가 276쪽에 이르러서는 눈이 크게 뜨여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엔 <나체촌 방문>이란 소제목이 있고 그 내용 중에 나의 이름이
자신을 포함한 다른 일행 2명의 이름과 함께 당시의 직함과 더불어
고스란히 실명으로 거론되어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에 좀 당황했지만
이의를 달지는 않았다. 그리고 왜 실명을 넣었느냐고 항의를 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그 내용이 모두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나는 20년 전의 유럽 기행을 추억하면서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겠다고 2편의 수필을 문학포탈사이트인 ‘문학의
즐거움’에 발표한 일이 있다.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 헝가리의 여행
얘기도 빼 놓을 수 없겠다 싶어 무엇을 쓸까 생각하다가 바로 내가
겪은 200분 간의 나체생활에 대하여 떠올리게 되었거니와 아내에게도
여행직후 이실직고한 일이기도하고 또 지금보다 훨씬 팽팽했던 40대
초반의 20년 전의 일인지라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스스로 위로해
가면서 좀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간추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말해두어야 할 것은 나체주의라는 표현은 자연
주의로, 나체생활은 자연생활로 이해하는 마음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스런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찾아갔던 우리들은 실제로 나체생활
체험을 통해서 완전히 선입관과 편견을 불식시킬 수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UEA세계대회가 열렸던 부다페스트 시내의 원형경기장 게시판에서 ‘
자연주의자들의 만남’이란 포스터를 발견한 것은 대회가 시작된지 며칠
뒤의 일이었다. 전세계에서 4천여명의 동지들이 참석하여 모두가 같은
언어로 대회를 치루면서 자연스럽게 개개인들의 취미나 관심사에 따라
소그룹으로 모여서 대화를 나누며 우정을 돈독히 하기도 하는데 바로
위의 포스타에는 세계에스페란토자연주의자연맹이 개최하는 자연주의자
모임이 시내에서 120킬로 떨어진 어느 호수에서 갖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자연주의자도 나체주의자도 아니어서 그냥 지나치려는데 C박사가
저들의 모임에 동참하지는 않더라도 멀리서 구경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들어와 그날은 특별한 일정도 마침 없는 시간인지라 문공부 K과장,
동아일보 L기자, 한의사인 C박사, 그리고 나 이렇게 4명이서 택시를
대절하여 현지로 향하였다.
당시 나는 여행업자였기 때문에 많이 보고 많이 들어두는 것은 해가 될
것이 없겠다 싶었고 또 호기심도 없지 않아서 참가는 하였으나 어쩐지
떳떳하지 못한 일 같아서 한 편으로는 망설여지기도 하였지만 택시는
이미 나체촌 가까이에 이르렀다. 큰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촬영금지’라는 글씨였다.
우리가 닿은 나체촌은 마을과 동떨어진 큰 호수로 울타리가 따로 없고
어떤 쪽에서도 호수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8월의 따가운
햇살 아래 남녀 젊은이들이, 모두가 벌거숭이로 자연을 즐기고 있었다.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들도 보였다. 언제까지 옷을 입고 그냥 바라볼 수
만은 없는지라 우리 일행도 걸친 옷가지들을 벗어 던지고 호수 속으로
뛰어 들었다. 저들과 하나가 된 것이다. 보트를 빌려서 발로 저어
호숫가를 돌아다니며 자연스런 저들의 모습을 아주 자연스럽게 바라
보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의 모습도 저들이 보는데에 조금도 제약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다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은 사라
졌다. 그런데 200여분간 저들과 어울려 자연스런 나체생활을 즐기는(?)
동안 우리들이 공통으로 느낀 것은 그저 아름답고 극히 자연스러웠던
것 뿐 어떤 성적인 마음은 따로 생기지 않았다는 것과 나체생활 동안
건장한 우리의 신체상에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체생활이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도
되었다.
우리가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에는 좀 어색하지만 일단 입욕을 하면서는
이내 자연스런 감정으로 바뀌듯, 바로 그런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모두가 자연의 일부분으로 사람들은 그저 움직이는 자연일 뿐 어느
누구도 성적인 상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은 오래 머물 수 없는 입장이라 돌아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니
좀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촬영금지’라는 경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얘깃거리를 만든다고 차에 돌아가 카메라로 줌을 이용하여
나체생활 장면을 몇장 찍은 것이 그만 발각되었는데 미모의 여성
감독관 2명이 역시 나체의 모습으로 당당히 다가와 아직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우리들에게 ‘촬영은 금지되어 있으니 더 이상 촬영은
금한다’는 주의를 환기시켰고 우리는 알았다고 하였지만 기왕에
찍은 필름은 압수하지 않았다.
부다페스트로 다시 돌아오는 차안에서 많은 얘기들을 나누었고 아직
카메라 속에 담긴 필름에 생생한 자료들이 있으므로 네 사람은 누구도
변명의 여지가 없게끔 되었는데 정말 우리가 많이 보고 돌아가는건지
많이 보이고 돌아가는건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뒷날 우리 일행은 서울에 돌아와 사진이 인화된 뒤에 강남 어느 근사한
집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사진들을 돌려보며 실컷 웃은 적이 있었는데
정말 나체생활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의심이 가는 독자들은
실제로 체험을 해보라는 말밖에, 문장으로는 더 이상 다른얘기를 쓸 수가
없다.
가면을 벗으면 진실이 나타나고 그 진실이 곧 자연임을 새삼 되새겨
본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자연의 본색을 어떻게 바로 읽을
수가 있겠는가? 색안경을 벗어야만 비로소 자연 그대로를 볼 수 있다.
<2003.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