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엄마
엄마가 그리울 때면 고향 냇가에 앉아 빨래하시는 옛날의 모습이 떠오른다. 갈 봄 여름 없이 며칠걸이로 물빨래를 하셨지만 겨울철엔 푹한 날씨를 골라 번번이 냇가로 나가셔서 얼음을 걷어내시고 빨래를 하시곤 하셨다.
엄마의 손때 묻은 가정용품으로는 장롱을 비롯해서 처녀 때부터 쓰셨다던 나물바구니와 시집오신 후는 호미, 삽, 낫, 물동이, 도리깨 그리고 반지그릇의 내용물 등이 거의 전부였다. 이런 것들에서는 현대문명의 냄새조차 맡기 어려웠다. 엄마의 주변에는 자연 그대로의 햇볕, 바람, 눈, 비, 풀, 나무, 곡식 등의 자연물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집을 나서면 뒤에는 산이요,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논과 밭이 들을 이었으니, 엄마에게는 풀 냄새, 나무 냄새, 빨래에서 풍기는 신선한 냄새들로 그득할 뿐, 도회풍이라곤 한 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엄마는 분명한 촌부(村婦)요, 엄마의 아들인 나도 촌동(村童)이 분명했다. 아니, 우리 식구 모두가 그랬다.
극장엘 가서 연극이나 영화를 감상하는 일도 없고, 버스나 기차를 타는 일도 없고…, 문화생활이란 기껏해야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는 그 순간만이 문화면을 가장 많이 접하는 편인데, 시골 예배당은 문화시설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쇠붙이로 만든 종과 풍금이 전부였다, 당시에는 마이크나 영상시설이나 피아노 등이 아주 귀하던 때이었으니 우리는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다.
겨울철이면 엄마의 손가락은 새 주둥이모양으로 끝이 터져 있었다. 살이 억세어서 그렇다고 하시지만 빨래며 설거지며 집안 청소를 겨울철에도 찬물로 하시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설거지용 고무장갑이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그렇다고 손에 크림 한 방울 바르시지 않으셨으니 엄마의 손은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 봄철이 지나기까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손으로 못하시는 일 없이 거의 다 해 내셨다. 농사는 물론 집안 일, 할머니 모시고 아버지 내조, 그리고 우리 사남매를 키우시면서 교회생활도 열심이셨다.
나는 모태에서부터 예배 참석을 하였다. 갈 적 올 적 삼십 리 길이었다. 새벽이나 낮이나 저녁이나 나를 안고 업고 다니셨다. 우리 동네 삼십여 가구 중에 온 식구가 교회에 다닌 가정은 우리뿐이었다. 지금 우리 집 벽에는 백년이 훨씬 넘은 십자가가 걸려 있다. 할머니 처녀 적에 교회에서 받으셨다니 아마도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그 즈음에 우리의 것이 되었을 터이다.
엄마의 장 담그시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동네에서 자자하게 이름이 나 있었다. 해마다 여러 항아리의 장을 담갔다. 우리 식구가 먹는 양보다 훨씬 많은 대여섯 개의 큰 독에 그득 담가서 맛이 들기를 기다려 동네 분들이 우리 장독간에 와서 넉넉히 퍼 가곤 했다. 해마다 텃밭에 김장배추를 많이 갈아서 우리와 함께 동네 분들이 나누어 뽑아다가 김장을 담갔다.
걸인을 불러들여 밥상을 차려 주시거나 잠을 재워 주시거나 옷가지며 양말 등을 챙겨 주시는 일도 종종 하셨다. 아버지와 엄마는 이런 일들을 매우 즐겨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베푸는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내 아내와 함께 집 없는 사람들에게 가끔 나누어 주는 봉지선물로는 턱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빈 방에 혼자 앉아있어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식 사랑으로 나의 가슴을 달구시는 엄마, 엄마의 모습 중에도 눈빛은 매우 인상적이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우리 사남매를 향하신 그 자애로움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맑고 밝았다. 따뜻했다. 언제나 정이 가는 눈빛이었다. 매섭게 눈살을 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막내 동생이 몹시 아플 때 엄마는 하시던 일손을 멈추시고 불덩어리가 된 막내 동생을 덥석 끌어안고 곧장 병원으로 헐레벌떡 달리셨다. 졸래졸래 따라가면서 엄마와 동생을 번갈아 살피던 나의 눈에서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아픈 동생도 동생이지만 동생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품에 안겨 있는 동생을 내려 보시는 엄마의 눈빛, 그 모습 때문이었다. 분명 기도의 눈빛이었다. 진실이란 진실을 다 모아 놓은 눈빛이었다. 그토록 간절한 어마의 뜨거운 눈빛은 지금도 피할 수 없는 사랑의 포승으로 나의 평생을 사로잡고 있다.
나의 엄마는 문화인이 아니다. 산골에서 나시어 자연에 묻혀 사신 촌부이다. 이렇다 할 문명이나 문화적인 혜택 없이 사신 분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는 문화인보다 자연인, 향수는커녕 분 냄새도 아닌 풀 냄새, 나무 냄새의 그 신선하고 뜨거운 사랑의 엄마가 오늘따라 더욱 그립고 자랑스럽다.
<'어머니'로 썼었으나 2-6-2020에 "엄마"로 바꿨음. 필자>
2018.05.02 09:31
2018.05.02 12:58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아래 백석 시인의 시가 떠올랐습니다...노을 드림.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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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모교수가 (서울대.연세대.고려대) 대학생을 상대로 부모님에게 원하는것이 무엇인가? 하는 설문조사 결과
약 70% 정도가 "돈을 원한다" 라고 답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부모가 언제쯤 죽으면 가장 적절할 것 같은가?" 하는 설문조사에서는
63세' 라고 답한 학생이 80%라고 합니다.
그 이유로는 은퇴한 후 (퇴직금.재산) 남겨놓고 사망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기 때문이라니
가슴이 답답할 따름입니다.
어쩌다 이 시대 젊은이들이 스스로 잘살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피땀흘려 이루어놓은
부모 재산을 호시탐탐 노리는 강도가 되었는지 한숨만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미 63세가 곧 되어가니 곧 죽었어야 할 나이네요.
"자식을 조심합시다! "
공부 잘하는 것과 효도는 전혀 상관없는 것 같습니다.
지식보다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도덕적으로 바르게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식한테 재산 물려주기 위해 아둥 바둥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일군 재산 자기가 다쓰고 죽어야 합니다.
부모 앞으로 생명보험 많이 들어두면 부모가 언제 죽나~~
기다리게 된다고 합니다.
장례식 치를 돈도 남기지 않으면 민폐가 되니 장례식 비용 정도만 남기면 되겠지요.
그래서 '다 쓰고 죽어라' 하는 책이 나왔을 때 베스트셀러가 되었지요.
그 책을 읽어보니 자기가 죽으면 가족들이 어떻게 살까 걱정하지 말고
마음 푹 놓고
죽으라고 하더군요. 물론 가진 돈 다 쓰고 말이죠.
자식들은 공부만 시켜주면 되지
재산까지 남겨주는 것은 자식을 버리는 지름길이라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남은 애들이나 마누라가 어떻게 살까 걱정 안해도
나 죽고 3년만 지나면 부모 존재 까맣게 잊고 잘 산다고 하네요.
여행도 하고 친구들하고 재미있게 살아야죠.
그리고 돈 다~ 쓰고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