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호의 문학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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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작가

산문 그리운 엄마

2018.05.01 14:32

최선호 조회 수:125

 

그리운 엄마 



 엄마가 그리울 때면 고향 냇가에 앉아 빨래하시는 옛날의 모습이 떠오른다. 갈 봄 여름 없이 며칠걸이로 물빨래를 하셨지만 겨울철엔 푹한 날씨를 골라 번번이 냇가로 나가셔서 얼음을 걷어내시고 빨래를 하시곤 하셨다.

 

 엄마의 손때 묻은 가정용품으로는 장롱을 비롯해서 처녀 때부터 쓰셨다던 나물바구니와 시집오신 후는 호미, 삽, 낫, 물동이, 도리깨 그리고 반지그릇의 내용물 등이 거의 전부였다. 이런 것들에서는 현대문명의 냄새조차 맡기 어려웠다. 엄마의 주변에는 자연 그대로의 햇볕, 바람, 눈, 비, 풀, 나무, 곡식 등의 자연물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집을 나서면 뒤에는 산이요, 앞에는 냇물이 흐르고 논과 밭이 들을 이었으니, 엄마에게는 풀 냄새, 나무 냄새, 빨래에서 풍기는 신선한 냄새들로 그득할 뿐, 도회풍이라곤 한 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엄마는 분명한 촌부(村婦)요, 엄마의 아들인 나도 촌동(村童)이 분명했다. 아니, 우리 식구 모두가 그랬다.

 

 극장엘 가서 연극이나 영화를 감상하는 일도 없고, 버스나 기차를 타는 일도 없고…, 문화생활이란 기껏해야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리는 그 순간만이 문화면을 가장 많이 접하는 편인데, 시골 예배당은 문화시설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쇠붙이로 만든 종과 풍금이 전부였다, 당시에는 마이크나 영상시설이나 피아노 등이 아주 귀하던 때이었으니 우리는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다.

 

 겨울철이면 엄마의 손가락은 새 주둥이모양으로 끝이 터져 있었다. 살이 억세어서 그렇다고 하시지만 빨래며 설거지며 집안 청소를 겨울철에도 찬물로 하시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설거지용 고무장갑이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그렇다고 손에 크림 한 방울 바르시지 않으셨으니 엄마의 손은 겨울이 시작되면서부터 봄철이 지나기까지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손으로 못하시는 일 없이 거의 다 해 내셨다. 농사는 물론 집안 일, 할머니 모시고 아버지 내조, 그리고 우리 사남매를 키우시면서 교회생활도 열심이셨다.

 

 나는 모태에서부터 예배 참석을 하였다. 갈 적 올 적 삼십 리 길이었다. 새벽이나 낮이나 저녁이나 나를 안고 업고 다니셨다. 우리 동네 삼십여 가구 중에 온 식구가 교회에 다닌 가정은 우리뿐이었다. 지금 우리 집 벽에는 백년이 훨씬 넘은 십자가가 걸려 있다. 할머니 처녀 적에 교회에서 받으셨다니 아마도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그 즈음에 우리의 것이 되었을 터이다.

 

 엄마의 장 담그시는 솜씨는 일품이었다. 동네에서 자자하게 이름이 나 있었다. 해마다 여러 항아리의 장을 담갔다. 우리 식구가 먹는 양보다 훨씬 많은 대여섯 개의 큰 독에 그득 담가서 맛이 들기를 기다려 동네 분들이 우리 장독간에 와서 넉넉히 퍼 가곤 했다. 해마다 텃밭에 김장배추를 많이 갈아서 우리와 함께 동네 분들이 나누어 뽑아다가 김장을 담갔다.  

 

 걸인을 불러들여 밥상을 차려 주시거나 잠을 재워 주시거나 옷가지며 양말 등을 챙겨 주시는 일도 종종 하셨다. 아버지와 엄마는 이런 일들을 매우 즐겨 하셨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베푸는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내 아내와 함께 집 없는 사람들에게 가끔 나누어 주는 봉지선물로는 턱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빈 방에 혼자 앉아있어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자식 사랑으로 나의 가슴을 달구시는 엄마, 엄마의 모습 중에도 눈빛은 매우 인상적이다.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우리 사남매를 향하신 그 자애로움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맑고 밝았다. 따뜻했다. 언제나 정이 가는 눈빛이었다. 매섭게 눈살을 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막내 동생이 몹시 아플 때 엄마는 하시던 일손을 멈추시고 불덩어리가 된 막내 동생을 덥석 끌어안고 곧장 병원으로 헐레벌떡 달리셨다. 졸래졸래 따라가면서 엄마와 동생을 번갈아 살피던 나의 눈에서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아픈 동생도 동생이지만 동생 때문에 흘린 눈물이 아니었다. 품에 안겨 있는 동생을 내려 보시는 엄마의 눈빛, 그 모습  때문이었다. 분명 기도의 눈빛이었다. 진실이란 진실을 다 모아 놓은 눈빛이었다. 그토록 간절한 어마의 뜨거운 눈빛은 지금도 피할 수 없는 사랑의 포승으로 나의 평생을 사로잡고 있다.    

 

 나의 엄마는 문화인이 아니다. 산골에서 나시어 자연에 묻혀 사신 촌부이다. 이렇다 할 문명이나 문화적인 혜택 없이 사신 분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는 문화인보다 자연인, 향수는커녕 분 냄새도 아닌 풀 냄새, 나무 냄새의 그 신선하고 뜨거운 사랑의 엄마가 오늘따라 더욱 그립고 자랑스럽다.   


 <'어머니'로 썼었으나 2-6-2020에 "엄마"로 바꿨음.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