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의 득음 / 정임옥 시인

2007.06.30 08:57

박경숙 조회 수:500 추천:47

                 감꽃의 득음

  -득음의 경지는 동굴이나 폭포수 옆에서 목청을 틔운 음보다

한의 경지에서 나온 음이 최고다



                                        정임옥



내 집 앞마당의 감나무를 키운 건

고통의 한 정점으로 타들어가던 청산가리의 유혹

마른번개가 성호를 긋는

천둥이 어둠을 피해간 아침,

감꽃은 소리도 없이 떨어졌다

한때는 잎이었다가

한때는 꽃이었다가

추운 겨울날 맨몸으로 서 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지

꽃망울 맺힌 자리에 바람이 한 차례 몸을 비벼대자

나무는 밭은기침을 몰아내고 잠잠해졌다


눈 내리는 겨울 밤

흙 속에 청산가리를 들이붓는다

화기로 얼얼해진 부리마다

혹처럼 부풀어 오르는 나무의 전생,

그 위로 초승달이 뜬다

모진 바람에 살 다 파먹힌 저 통점 많은 감나무도

청산가리의 위력이 부럽기만 했다

잔부리까지 짓눌리고 나면

나무라고 그깟 명창이 되지 말란 법 있냐고

대들고도 싶엇다


숨 쉴 수도 없는 날들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이듬해 봄

감나무는 밤새 성을 냈다

감꽃 목걸이가 고열에 시달릴 때마다

나무 밑둥이 뽑혔지만

이제는 한이 뿌리를 내린다


세상을 향해 두 귀를 열어둔 채

나무는 숲이 보고 싶어 담장 밖을 기웃거린다

나무 뒤척이는 소리에

감꽃이

툭!

떨어진다



정임옥 시집"꽃에 덴 자국"[문학사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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