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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훈 첫시집 : 종소리 저편

2015.05.18 16:18

오연희 조회 수: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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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부


간이역에서
별빛을 읽다

액자
가을잠
여백에 대하여
열린 괄호
호두를 까다
뼛속은 왜 비어있는가
기상예보
수박
보리수 나뭇잎
가을비
Jellyfish
청바지
태평양


2부


바람의 사회
강물처럼
생명보험
인턴 자전거
검정 양복
사선의 이유
덤을 위한 노래
고집
나무/아내에게
악수
낮달
새로 생긴 버릇
시간의 몸
입덧하는 남자
데칼코마니
거미
겨울나무


3부


괜찮다 꿈!
눈동자
겨울강
다리
흑백사진
방향의 미학
바다 이야기
객관적으로
하루살이
금강산
물의 노래
얼굴
제로섬
바다노래방
아스팔트 바다
모래시계

4부



만년필
시에게
시비를 걸다
장맛비
징소리
초점에 대하여
닭발/핑계
한 뼘의 힘
섬에 갇히다
그물
투신
도마뱀

말리부 해변에서
낙관




열린 자리를 채운 완전한 사랑
- 윤석훈 시집에 부쳐


박덕규
(시인, 문학평론가)


1. 바람의 모국어가 빚는 형상

윤석훈의 시는 그리움의 정서를 주조로 하고 있다, 라고 말하면 윤석훈의 시를 지나치게 일반화했다고 나무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윤석훈의 시는 미주 한인들의 내면의 상처를 잘 형상화하고 있다, 라고 쓰면 더더구나 상투적인 설명이라고 아쉬워할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어쩌랴, 윤석훈은 모국을 떠나 미국의 LA를 거점으로 살아온 지 이십 년 가까우며, 그동안 미국의 이방인으로 살면서 조금씩 밀려드는 모국을 향한 그리움으로 시의 세계 깊이 들어온 게 어김없는 사실일 터인즉.
윤석훈도 처음에는 다른 이주 한인들처럼 “파도를 찢으며 바다를 가르고”(<청바지>) 미국으로 갔을 터. “파랗게 질린 바다의 가슴에 피를 돌게 했을 질긴 호흡”의 ‘한 마리 고래’(<Jellyfish>)로 “거역할 수 없어 닿아야 하는 정신의 바다”(<태평양>)를 헤엄쳤으리. “바다의 꿈 그리고 바다의 힘과 함께”(<흑백사진>) 매일 출퇴근으로 집과 직장을 오가면서 일하고 먹고 놀고 그 속에서 “깊고 푸른 몫”(<몫>)을 찾아내 어느덧 LA의 꽃 ‘자카란다 꽃잎’이 되어 갔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렇게 살아갈수록 실은 그렇게 살아진 게 아니라는 느낌이 마음에 요동을 치고 있었던 것. 애써 “그리움의 주머니”를 봉합했지만 거기에서 “허연 절벽이 삐져”(<별빛을 읽다>) 나오고, 몸은 미주에 있으되 마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남대천의 연어’로 되돌아가 있곤 했던 거다(<입덧하는 남자>). 몸과 마음 사이의 이러한 괴리에서 새어나오는 말, 윤석훈 시는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말은 그러나 LA 말이 아니라 바로 모국어.

(......)
이야기하고 있다
가만히 보니 혼자 하는 대화다
듣는 이 없는 곳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설익은 낙엽 하나 발등에 툭 떨어진다
한글로 가득한 엽서

쩡!
금가는 소리
뼛속으로 달려가는 바람의 모국어로 들린다

우리의 뼛속은 왜 가운데가 비어 있는가
--<뼛속은 왜 비어 있는가>에서

윤석훈은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데서 모국어를 중얼거리는 남자로, 혼자서 “물컹물컹 언어의 늑골을” 만지며 “자꾸만 옆구리가 쑤셔”(<닭발/핑계>)오는 고통에 빠져 버린 거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하는 말은 가 닿는 데 없이 자기 안에서만 머물게 되고, 그렇게 혼자만의 말을 자꾸 하다 보니 그 말이 점점 내면을 울리게 되었다. 절실한데 닿을 대상이 없어 더욱 간절해진 말은 “달려가는 바람”처럼 가속이 붙는다. 그러자 온몸의 뼈가 비어 그 빈 곳을 울리는 듯한 그런 공명음이 일어난다. 윤석훈의 시는 이 ‘바람의 모국어’가 내면을 울리는 동안 빚어지는 다양한 형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내면의 투사 또는 자아의 대상화

윤석훈의 시는 계절로 말하면 봄이나 여름 이미지보다 가을이나 겨울 이미지가 더욱 선연하고, 색깔로 말하면 아무것도 채색되지 않은 무채색에 가깝고, 질감으로 보면 부드럽지 않고 까칠하고 무성하지 않고 메마르다. 시간으로 보면 바쁜 일상의 현실은 드러나지 않고 주로 그로부터 벗어나 침묵하고 혼자 사색하는 시간이 전면에 그려진다. 그 시간은 아침이나 낮이기보다 “모자 벗은 생각이/ 욕망의 지붕을 닫고 가는 저녁(<여백에 대하여>)과

오후 다섯 시가 없는 남자
말도 없고 잠도 없는 남자가

밤에만 운행하는 기차를 타고
새벽 해변으로 간다
--<액자>에서

에서처럼 일상에서 멀리 떠나온 밤, 즉 일과를 마친 저녁부터 다음날 아침 다시 일과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동안이다. ‘오후 다섯 시의 남자’가 아니라 “오후 다섯 시가 없는 남자”가 된 것에 주목하라. 이는 일상을 벗어나고픈 내면의 욕망이 시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린 것. 그 남자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 “밤에만 운행하는 기차”를 타고 먼 사색의 길을 떠난다. 그 길은 마음의 길이기도 하고 실제의 여행이기도 하다. 남자가 어디에 가건 그건 현실의 삶과는 다른 세계, 혼자만의 영역이다. 마음의 사색이든 실제의 여행이든 혼자 영역에서의 일이니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또한 중요한 게 아니다. 화자는 거기서 본 것을 말하기만 할 뿐 그것에 참여하는 일이 없다. 아니, 거기서 본 것 자체도 겉으로 드러나는 외양 이상의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보는 화자’다.

밤새 던져둔 이름 들고
어둠 갓 깨고 나온
짐승과 식물의 씨앗들을
호명하며 산에 오른다
산정에 서서 두 팔 벌리면
이름들의 춤굿을 볼 수 있다
--<바람의 사회>에서

강가에 서 있는 나무라 이름하리라

하얀 목에 떨어지는 바람을 뒤로 하고
탄력의 얼굴이 여울처럼 접혔다 간다
매양 지천명의 그림자는
수많은 입질에 패인 허리 싸안으며
표정 없는 강물에 미소를 뿌려주고 있다
--<시간의 몸>에서

언덕에 오르고 산에 올라가면 보이는 사물은 산이고 강이고 바다이다. 보이는 그것들은 그러나 현상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거기 왔지만 실제 그걸 보려고 온 게 아니니까. “보이는 것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것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모래시계>)으니까. 언덕과 산, 강물과 바다 그 어느 편이든 실체로서의 의미는 관심 밖의 일이 된다. ‘보는 화자’에게는 ‘보는 주체’만이 문제될 뿐이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은 ‘보는 화자’의 눈에 보인 사물이 그냥 대상이기만 한 게 아니라 어느덧 주체, 즉 시적 화자이자 시적 자아가 투사(投射, Projection)된 대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화자는 보이는 사물을 ‘호명하고 이름하는데’ 이는 이를테면 김춘수가 일찍이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한 것처럼 ‘보이는 대상에 자기 뜻을 투사하는 일’이 된다. 화자가 보는 사물은 어느덧 내면을 투사한 대상으로 자리한다.
화자가 사물에 내면을 투사해 그 대상을 보는 것은 저녁과 밤 사이 동안에 일상의 현실로부터 멀리 떠나온 공간에서다. 그런데 보통은 그처럼 멀리 벗어나지 않고도 일상 가까운 곳에서도 틈틈이 다양한 사물을 만나기도 한다.

춥고 쓸쓸한 모닥불 앞에 서서
타들어가는 나무의 가슴을 만져본다

쩡쩡 울면서도 바알간 숯불이 되는
그의 마음 읽다가
고개 들어 밤하늘 쳐다본다

허공을 날았던 불씨들 별이 되었구나
세상 어느 사랑도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는구나

나는 지금 태울 것 많은 겨울나무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겨울나무> 전문

소득 없이 굽은 남자의 등 하얗다

그의 배는 이슬을 닮았고
두 눈은 사통팔달이나 추려서 본다

몸으로 가슴으로
그리움 흠뻑 머금었으나
바람의 통로에만 그물을 치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손과 발이 많은 남자

지상의 방 한 칸 짓지 못해
하늘이 집인 사내가

만만한 배짱으로 허공을 지키고 있다
--<거미> 전문

바쁜 일상, 분주한 하루 중에도 비는 내리고 새는 가까운 숲에 와 있고 곤충은 유리창에 부딪치곤 한다. 대화할 대상을 잃은 화자는 대신 이 일상 가까이 와 있는 자연을 그 대상으로 삼아 본다.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자연의 변화에 내면을 투사하기도 한다. ‘나비를 내 사물함 속에 집어넣고’(<간이역에서>), 서툴게나마 ‘휘파람새’와 소통하기를 꿈꾼다(<가을잠>). 저무는 시간 속에 몸은 절로 진달래가 되고 개나리가 된다(<데칼코마니>).
내면을 대상에 투사하는 윤석훈의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이 ‘자아의 대상화’라는 시적 기법이다. <겨울나무>는 ‘숯불’에서 ‘별’로의 물질적 전이를 통해 “모닥불 앞에 서서 타들어가는 나무의 가슴을 만져” 보던 ‘나’가 “세상 어느 사랑도/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는구나”라는 깨달음에 이르고 마침내 스스로 겨울나무가 되어 “봄을 기다리”는 과정을 보여준다. ‘나’(자아)가 곧 ‘겨울나무’(대상)가 된 것이다. <거미>는 이보다 더 직접적으로 대상화된 상태를 드러낸다. 거미의 외양에서 “몸으로 가슴으로” ‘흠뻑 머금은 그리움’을 알아채고 스스로(자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손과 발이 많은 남자” 즉 ‘거미’(대상)가 된 것이다. 이 두 편의 시는 겨울나무나 거미 등 일상 가까이에 자리한 사물을 통해 자아의 대상화를 실현한 좋은 예가 된다. 이 점 “상단 오른편에는 주름이라는 사진이 붙어 있고/ 약력으로는 손과 발이 그려져 있다”(<얼굴>)에서와 같이, 또는 윤동주가 ‘구리거울 속의 욕된 얼굴’(<참회록>)이나 ‘깊은 숲속 우물에 비친 사나이’(자화상)로 자아를 직접 대상화한 예와 비교해 봐도 재미있다.
윤석훈 시의 좋은 시는 대개 이 자아의 대상화의 연장선에서 얻어진다.

아침 마당은

달팽이의 기도실이다

시멘트 바닥에 온몸으로 쓰는 기도문,

생략 부호……

달팽이의 오체투지다

시간을 먹으며 배설하는 말줄임표

저 느린 움직임에도

줄일 말 있구나

맨몸의 체액를 다해

찍어대는 흔적들

세 번 가기도 전에

첫 번째 것은 말라 버리는

극한의 생략들……

그랬었구나

그 절명의 발자국 남기면서도

맨살은 유유히 속도를 내고 있었구나
--<달팽이> 전문

이 시에는 일상의 틈새에 끼어든 달팽이의 움직임이 관찰된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곳은 시멘트 바닥이다. 그곳은 ‘보는 화자’가 하루종일 갇혀 사는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처음에 보이는 대상에 머물러 있던 달팽이는 어느덧 ‘보는 화자’의 내면과 동일시될 상황에 놓인 게 된다. 오체투지로 이동하는 달팽이는 들어줄 사람 없는데 말을 하고 있는 화자 모습과 다를 바 없다. 혼자 하는 말이라 말수가 줄고 말투는 느린 화자의 말은 곧 달팽이의 온몸 바친 보행이 되는 거다. 들어줄 대상이 없어 말라 버린 화자의 말들은 달팽이의 체액이 “말라 버리는 극한의 생략”이 된다. 아무리 말해도 대상이 없으므로 그것은 결국 달팽이가 남긴 “절명의 발자국”과 같은 것. 달팽이의 맨살 걸음은 그러니까 화자의 삶이자 나아가 이주 한인의 삶이며 모국어를 쓸 수 없는 땅에 와 사는 디아스포라 시인의 삶이다. 디아스포라 시인의 삶이라는 윤석훈 시의 자아는 이렇듯 뚜렷하게 달팽이가 ‘절명의 발자국’을 남기면서도 ‘유유히 속도를 내는’ 모양으로 대상화되어 있다.

마른 눈물에 앉아서 호두를 깐다
몸 밖의 일

무작정 믿을 수만은 없는 것이어서
아예 겹겹이 제 몸을 두른 것일까

겁없이 사랑한다고 말하다가
즙이 다 말라 버린 것일까

그럼에도 무작정 고맙다는 말씀을
눈물 밖으로 던진다

서로에게 가 닿는 맨살이
놀라운 위로가 되는 곳

파고들어 가는 손끝마다 자꾸만 물집이 부풀어 오른다
--<호두를 깎다> 전문

이 시는 내면을 ‘호두’라는 사물로 대상화한 예다. 다른 점은 호두라는 대상을 묘사하는 데 주력하기보다 호두라는 실체를 지닌 대상과의 소통을 통해 화자의 내면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 시에서 호두는 일차적으로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으로부터 제 몸을 둘러 사랑의 감정도 제어하면서 스스로 즙이 말라 버린 존재’로 그려져 있다. 이런 호두에 대해 호두 깎는 사람은 “서로에게 가 닿는 맨살이 놀라운 위로가 되는” 존재이다. 호두의 마른 눈물과 호두 깎는 사람의 ‘손끝마다 부풀어 오르는 물집’의 교감, 이 둘의 소통되는 정서에 시적 화자(자아)의 내면이 배어들어 있다. 화자(자아)가 호두(1차 대상화)로, 다시 ‘호두 깎는 사람’(2차 대상화)으로 ‘겹대상화’되는 독특한 시적 기법이 특별한 감흥을 낳게 해 준 것이다.


3. 열린 괄호의 저편에서 채워주기

윤석훈 시에서 내면을 사물에 투사하기, 자아의 대상화 등의 시적 방법으로 드러낸 내면의 실상을 우리는 실은 모르고 있지 않다. 거기에는 몸이 있는 곳에서 마음이 가닿는 곳을 그리워하는 마음, 그리고 그 몸과 마음 사이의 괴리에서 생기는 외로움의 감정이 채색돼 있다. 그 채색은 때로 너무 침울해서 모호해 보이기까지 한다. 윤석훈의 시가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측면이 나타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 그리움과 외로움의 내면이 다른 사물로 대상화되면서 독특한 형상이 나타났고 또한 독창적인 시편들이 얻어졌다. 여기서 달리 주목할 것은 그리움과 외로움 그 자체의 상태로 참고 기다리며 속을 다지는 내향적 이미지가 윤석훈 시의 또 다른 미적 지향이 열었다는 점이다. 그 내향적 이미지는 편하게 “나가는 곳 없어도 한가하다/ 들어오는 곳 없어도 넉넉하다”(<수박>) 할 정도로 자족(自足)의 풍요를 낳기도 한다. 이런 자족의 풍요는 그러나 진정한 위안이나 치유가 될 수 없는 법. 마음이 가닿을 곳으로 향하는 말들은 대개

내리는 비를 가만히 보니 알겠다
수많은 언어를 가슴에 품고 떨어지는 것을
--<가을비>에서

에서처럼 ‘가슴에 가득 품은 수많은 언어’가 되어 속에 오래 품어 ‘뼈가 되고 비수가 된 언어’로서의 시를 낳고 있다. 오래 참다가 절로 ‘비수’가 되었으니 그 비수의 언어들이 그대로 묻혀 있을 리 없다. 그것들은

어금니를 깨물며 버티다가, 견디다가
헐거워진 삶의 나사를 조이는 순간
헛돌던 밤의 소리에 무심코 가슴이 휠 때
-<시간의 몸>에서

에서처럼 버티고 견디다 ‘밤의 소리에 가슴이 휘어지는’ 전기(轉機)를 만난다. 이럴 때 그동안 가슴 속에서 참고 기다린 것들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견딘다는 것은 아름답다
참다가 터뜨리는 것도 고맙고
참다가 날이 새는 것도 시원하다
시로도 터지고
사랑으로도 터지고
그러다가
세월을 꽃 대궁에 달고 달려도 보고
산정에서 바라보는 세상도 노래하고
개미의 허리같이 연약한
길도 때로는 강하게 밟아 보면서
오래된 친구처럼
그렇게 참다가
그렇게 사랑하다가
그렇게 시를 쓰다가
그대와 하나가 되고 싶다
온몸으로 바다에 닿는 강물처럼
--<강물처럼> 전문

참고 기다리다 그리움과 외로움이 깊어가는 세월이 삶의 겉이라면 그 삶의 안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그 세월 동안 말할 대상 없는 혼잣말의 언어로 버티는 과정에서 사물에 내면을 투사해 대상화하는 미적 방법과 성취를 얻은 것이 한 가지 일이다. 그런데 위 시에서처럼 더 이상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절로 안에서 밖으로 분출되는 형상이 그려질 때도 있다. 참다가 터뜨리고 참다가 터지는 그것은 때로는 시로 때로는 사랑으로 펼쳐졌다. 이때 시와 사랑은 “우리 사이 고삐 풀려서는 안 돼”(<시에게>)로 일심동체를 지향한다. 바로 이 사랑의 시 쓰기가 두 번째 일이다.
사랑과 시, 시와 사랑이 진정 하나의 몸이 되기를 원하면서 나타나는 대표적인 이미지가 ‘물’이다. 위 시에서도 그리움과 외로움을 견디게 하는 시 쓰기가 곧 사랑의 다른 행위라는 사실이 ‘온몸으로 바다에 닿는 강물’로 치환되면서 드러나 있다. ‘내가 그대에게 흐르고 그대가 내게로 흘러 정갈한 영혼의 시냇물로 함께 흐르자는’(<물의 노래>) 사랑노래도 있다. 그 사랑노래는 물론 온전한 사랑을 노래한 게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이 마침내 시가 될’<괜찮다 시!>) 그때를 기다리는 노래다. 그래서 그것은 “닫을 수 없는 괄호”로 늘 “열려 있다”(<열린 괄호>). 열린 괄호라니! 이런 부호는 일찍이 본 적 없는 이미지다!
하지만 괄호의 그 열린 자리에는 “넉넉한 호흡으로 부서질 줄 아는 파도”(<흑백사진>)와 ‘강물을 쓸어 담을 바다의 가슴’(<바다 이야기>)이 출렁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오후 세 시가 지나도
울려 퍼질
종소리 저편에 서서

언제나 기다려 줄 당신
--<나무/아내에게>에서

에서처럼 ‘언제나 함께 하는 당신’이 거기 있다. 그러니, 윤석훈이 이 지상에서 부른 미완성의 사랑노래는 열린 괄호 한쪽을 채우는 ‘당신’과 더불어 함으로써 완전한 사랑노래로 울려 퍼질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