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망각

앙트완 드 고드마르
김화영 옮김

소개의 말

1929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르노(Brno)에서 태어나 그의 첫 저서 『농담 La Plaisanterie』이 불역되는 즉시 프랑스에서 유명작가가 되다. 그 불역판 서문에서 아라공은 “금세기 최대의 소설가들 중 한 사람으로 소설이 빵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소설가”라고 격찬. 1968년 소련의 탱크가 프라하에 침공하다. 『농담』과 『우스운 사랑』 2권만이 쿤데라가 고국 체코에서 발표한 작품이다. 2차대전 후 그는 대학생, 노동자, 바의 피아니스트(그의 아버지는 이미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를 거쳐 문학과 영화에 몰두했다. 그는 시와 극작품들을 썼고 프라하의 고등 영화연구원에서 가르쳤다. 밀로스 포만(Milos Forman), 그리고 장차 체코의 누벨 바그계 영화인들이 될 사람들은 두루 그의 제자들이었다. 소련 침공과 ‘프라하의 봄’ 무렵의 숙청으로 인하여 그의 처지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책들은 도서관에서 제거되었고 그 자신은 글쓰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금지되는 역경을 만났다. 1975년 그가 체코를 떠나 프랑스로 왔을 때 “프라하에서 서양은 그들 스스로가 파괴되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오늘날 프랑스인으로 귀화한 밀란 쿤데라는 그의 고국에서 금지되었던 소설 작품의 창작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해학과 지성, 반어와 철학으로 가득 찬 그의 작품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 중 하나로 군림한다. 사람들은 흔히 오늘날 소설이 쇠퇴기에 이르러 절명상태를 맞고 있다고들 한다. 쿤데라는 말한다. 그렇지 않다. 비록 몇 번의 기회를 놓치기도 했고 상처입기 쉽도록 약한 면이 없지 않지만 소설은 결코 다른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독자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세르반테스, 디드로, 카프카 이래 인간을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켜주고 맹목적인 발전, 기세등등한 기술문명, 그리고 국가의 전횡 등 파괴적 기세에 맞서 싸우는 것은 바로 소설이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그리고 있는 인간은 양면적이고 애매하고 패러독스, 우연, 모순 그 자체일 뿐이다.


그의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작가는 어떤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테레사와 토마스는 우연히 서로 만났다가 사고로 함께 죽는다. 그들의 운명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정들과 우연한 사건들과 어쩌다가 받아들이게 된 구속들의 축적이 낳은 산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죽음을 향한 그 꼬불꼬불한 길,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의 완만한 상호간의 파괴는 영원한 애매함을 드러내 보이려는 듯 어떤 내면의 평화를 다시 찾는 길이기도 하다. 그 배경에는 60년대 체코와 70년대 유럽을 뒤흔들어놓은 시련이 깔려 있다. 지금은 멀어져버린 체코이지만 쿤데라의 작품 한복판에 주인공인 양 요지부동으로 박혀 있는 체코. 실제로 존재하는 나라라기보다는 신화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나라. 유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 때문에 오히려 더욱 그 본질이 더 잘 보이는 듯한 그 나라. 변함 없는 성실성과 배반, 현실과 꿈,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찢겨진 존재들의 복합성, 그리고 또한 둘로 쪼개진 세계와 유럽의 드라마와 작가의 근원적 정신질환.


고드마르 당신이 아직 프라하에 살고 있을 때 쓴 초기의 작품들은 모두 소련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나라들의 분위기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프랑스로 망명하여 정착한 이후 당신의 소설들은 동서간의 왕래로 점철되어 있고 등장인물들은 남아 있는 사람들과 떠난 사람들, 망각과 기억, 이곳과 저곳 사이로 나누어진 인상입니다. 언젠가 체코가 등장하지 않는 소설도 쓰게 될까요?


쿤데라 모르겠어요. 한 인간의 의식, 상상세계, 고정관념을 이루는 모든 것은 그의 생애의 전반기 동안에 이미 다 만들어져가지고 항상 없어지지 않는 채 남아 있어요. 그러므로 내 마음을 사로잡는 모든 테마들은 어떤 방식으로건 프라하와, 그리고 거기서 내가 겪은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어요. 다른 한편, 나는 점점 더 프라하를 프라하로서 보지 않고 유럽을 상징하는 어떤 상상의 도시로 보게 되는 것 같아요. 프라하가 유럽의 운명을 상징하는 상상의 모델같이 된 거지요. 그렇게 느끼기 시작한 지 벌써 오래되었어요. 이미 『생은 다른 곳에La Vie est ailleurs』에서 나는 야로밀이라는 젊은 시인의 운명을 유럽의 시, 특히 랭보의 운명과 대조하고 있지요. 내가 보기에 야로밀은 유럽 시사의 그로테스크한 결말로 여겨졌어요. 내가 프라하를 얘기할 때는 바로 유럽을 얘기하는 거예요. 여기 파리에서 보면 프라하의 그런 면은 더욱 분명한 것 같아요. 더군다나 내 작품에서 작중화자는 프라하로부터가 아니라 유럽의 어느 곳으로부터 말을 하고 있어요. 그의 생각은 자유롭게 파리에서 비엔나로, 프라하에서 제네바, 니체에서 데카르트로, 톨스토이에서 파르메니데스로 옮아가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프라하는 점점 더 상상의 도시로 변해갑니다. 내가 그 도시의 지리와 거리 이름들을 점점 더 잊어버리기 시작한다는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어요…….


고드마르 어떤 상황에서 프라하를 떠나게 되었나요?


쿤데라 1968년 소련 침공 이후 나는 프라하 영화학교의 교수 자리를 잃었어요. 그곳에서 문학과 시나리오를 가르쳤었지요. 그때까지 나는 『농담』과 『우스운 사랑』을 발표했었습니다. 그런데 체코 국내에서는 무슨 글이든 발표하는 것을 금지하더군요. 그래서 내 책들을 외국에서 낼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생은 다른 곳에』가 1973년에 메디치 상의 외국작품 부문에서 수상하게 되어 파리로 올 수 있었습니다. 1975년 렌느 대학교에서 내게 교환교수 자리를 주었지요. 아내와 나는 트렁크 몇 개, 책 몇 상자를 자동차에 싣고 떠났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이라곤 그게 전부였어요. 렌느에서 보낸 몇 년은 매우 행복했습니다. 프랑스는 지방을 통해서 발견해야 그 진정한 모습을 알아내기가 쉬워요. 언어와 습관도 더 빨리 배우게 되고요. 1978년에 우리는 파리에 정착했지요. 지금 나는 파리 에콜 프라티크 데 오트 제튀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고드마르 망명하기 전에 프랑스와 프랑스 문화에 대해서는 어떤 관계였나요?


쿤데라 전통적으로 체코는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는 나라지요. 나는 프랑스 문화의 풍토 속에서 자랐어요. 내게 파리는 유럽 예술의 수도나 마찬가지고 프랑스 문학은 유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문학들 중 하나지요. 나는 다행히도 훌륭한 현대 체코어로 번역된 라블레를 읽을 수 있었지요. 그러니까 한편에는 라블레, 몽테뉴, 디드로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보들레르, 랭보 그리고 모든 초현실주의 시인들이 있지요. 소련 점령과 함께 우리는 다른 모든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어요.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 어두운 시절 동안 나는 파리에서 온 수많은 친구들을 맞아들일 수 있었어요. 그 사람들의 방문으로 인하여 프랑스와 나 사이에는 매우 깊은 관계가 맺어지게 되었고 마침내는 프랑스로 망명하여 그곳에 가서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점차로 굳어진 겁니다.


고드마르 당신의 소설들은 프랑스에서 즉각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게 되었어요. 당신의 첫소설 『농담』에 붙인 아라공의 열광적인 서문을 우리는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성공이 의외여서 놀랐나요?


쿤데라 정말 그랬어요. 변화가 너무나 급작스러웠던 게 사실입니다. 1968년까지 나는 체코 국내의 소설가였을 뿐 아무것도 외국어로 번역된 것이 없었으니까요. 그 뒤에 작품들이 더러 번역이 되긴 했습니다만 체코 안에서 작가로서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나는 프랑스를 작가로서의 조국으로 선택한 겁니다. 내 책들이 먼저 나온 곳은 파리였고 나로서는 그 상징적 의미를 매우 귀중하게 여기고 있어요.


고드마르 흔히들 프랑스가 피난처라고들 합니다. 이런 평판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쿤데라 30년대 미국소설을 잘 알게 된 것은 앙드레 말로 덕분이고 우리가 남미문학을 발견하게 된 것은 카이유와(Roger Caillois) 덕분이고 곰브로비치 같은 사람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이나 가령 오늘날 무질 같은 작가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는 것은 프랑스, 특히 모리스 나도(Maurice Nadeau)의 덕분입니다. 나의 경우 내 작품에 대한 가장 현명한 해석이 내려진 곳은 프랑스였어요. 여기서 비로소 내 작품은 정치성의 껍질을 벗고서 가장 문학적인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었지요. 파리는 오랫동안 유럽의 두뇌였다가 오늘날에 와서는 프랑스의 수도 이상의 그 무엇이 되었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제 파리는 사라져가고 있는 한 세계의 사라져가고 있는 중의 수도라고 여겨지는군요.


고드마르 1979년 『웃음과 망각의 책』 이후 당신은 체코 국적을 상실했고 1981년 프랑스 공화국의 새 대통령이 된 프랑스와 미테랑이 당신과 작가 훌리오 코르타사르에게 프랑스 국적을 주었지요…….


쿤데라 그래요. 지금 생각해도 놀라워요.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놀라움이에요…….


고드마르 언젠가 체코로 돌아갈 생각인가요?


쿤데라 설령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몹씨 망설여질 것 같군요. 실망과 쓰디쓴 맛을 보게 될까봐 너무 무서워요. 나는 1962년에 아르헨티나에서 돌아온 곰브로비치 생각을 자주 하곤 해요. 그는 폴란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러나 어쨌건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지금 내게 문제는 프랑스를 충분히 잘 알지 못한다는 점이에요…….


고드마르 당신의 신작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테레사와 토마스라는 남녀, 그리고 그들의 우연한 만남에서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무엇보다도 우선 어떤 사랑의 소설을 쓰자는 것이 목적이었나요?


쿤데라 테레사와 토마스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는 사랑, 질투, 일편단심, 경박함, 배신…… 등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었어요. 나는 여러 가지 제목들을 놓고 망설였어요. 『미경험의 별』을 선택할 뻔했지요. 어디선가 토마스는 이런 말을 해요. “사람의 삶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그 삶을 구성하는 사건들이 오직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야.” 앞에도 뒤에도 다시 반복되는 법이 없으니 자기 자신의 결정들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인할 길이 없는 거예요. 사람의 삶은 대강 그린 그림일 뿐이에요. 근본적인 미경험, 미성숙이 특징인 거예요. 평범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토마스라는 인물은 바로 이런 주제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그는 오직 한 번밖에 살지 못하므로, 뒤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그는 잘하는 일인지 잘못하는 일인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나는 많이 망설이다가 결국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정했지요. 그건 소설의 또다른 주제로서 토마스, 특히 그의 정부 사비나와 관련이 있어요. 사비나는 끝없는 방임의 생활을 영위해요. 방임에서 방임으로, 유적에서 유적으로, 배신에서 배신으로, 결국 절대고독에, 오랜 옛날부터 갈망했던 전체적인 가벼움에 이르지요. 심지어 죽음까지도 가벼움이라는 상징 속에 이루어져요. 그의 유골이 바람에 흩어져버리거든요…….


고드마르 ‘참을 수 없는’이란 형용사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쿤데라 그게 무슨 선언인 것은 아녜요. 나는 존재의 가벼움이 참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읽어요…… 애매한 데가 있지요. 소설이 맡고 있는 기능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물의 애매성을 발견하게 하는 점이지요. 나는 책의 한 장 전체에 ‘이해되지 않는 말들’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테레사와 토마스처럼, 혹은 프란츠와 사비나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이 사람이냐 저 사람이냐에 따라서 같은 말들이 어떻게 해서 전혀 다른 현실을 가리키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지요. 사실 저자와 독자 사이의 끊임없는 오해의 원인도 여기에 있지요. 흔히 독자는 작가에게 당신은 정확하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당신의 세계관은 어떤 겁니까? 확신의 부재가 유일한 지혜고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그저 모든 단언을 질문으로 바꾸어놓자는 것뿐인 소설가에겐 아주 당혹스러운 질문이지요. 소설가는 실제로 존재하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즉 수수께끼와 패러독스를 말입니다.


고드마르 애매성과 의혹의 적은 당신이 ‘키치’의 세계라고 부르는 바로 그것이지요. 미적인 확신과 순응주의의 왕국 말입니다. 그것은 결국 전체주의적 키치에 도달하고 말지요. 당신은 소설 속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키치 정신을 비판하고 있지요. 키치 정신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근원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다 시야에서 제외해버린다”고 당신은 썼지요.


쿤데라 ‘Kitsch’라는 말은 19세기 독일에서 생긴 말입니다. 그 의미가 점차로 변해와서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어떤 유의 미적 스타일, 싸구려 예술을 뜻할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것 훨씬 이상이지요. 그건 어떤 세계관에 뒷받침된 미학, 거의 철학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건 인식이 제외된 아름다움이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들고 남에게 환심을 사려는 의지이며 총체적인 순응주의입니다. 나는 여기서 헤르만 브로흐의 유명한 이론을 원용하고 싶어요. 그는 『문학 창조와 인식』이라는 책에서 독일 낭만주의에 깊이 뿌리박힌, 그리고 바그너에까지 거슬러올라가는 키치 정신에 대한 한판 전쟁을 벌이고 있어요. 내가 볼 때 키치는 오히려 차이코프스키 같아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고심한 나머지 때로는 성공을 거두기도 하지만 지극히 관습적인, 효과만점의 음악, 예술에 있어서 일종의 데마고기죠. 이런 데마고기는 서구에도 있고 동구에도 있어요. 물론 전체주의 국가들은 이런 키치를 장려하죠. 개인주의, 회의주의, 아이러니 어느 것 하나 용납하지 않는 세계니까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야말로 키치 정신의 절정이지요. 전후 소련에서는 미술대학 학생들에게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서, 소련 사회는 이미 얼마나 진보했는지 여기서 근본적인 갈등은 선과 악의 갈등이 아니라 선과 최선 사이의 갈등이라고 설명하곤 했어요. 서구에서 키치는 특히 정치사상을 통해서 유포되었지요. 미국 선거운동 광경을 보세요…….

고드마르 정치가 키치를 만들어낸다는 뜻입니까?


쿤데라 정치가 키치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고 있어요. 모든 정치운동은 키치에, 유혹하려는 의지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정치에 있어서 세상은 흑 아니면 백입니다. 애매성이라든가 모순이라든가 패러독스가 설 자리는 없어요. 그 어떤 정치가도 나는 저렇게도 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게 아니라, 나는 미래로 나아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는 거예요.


고드마르 당신은 프란츠가 캄보디아의 베트남 주둔군으로 하여금 인류애의 차원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종용하기 위하여 50여 명의 서구 지식인들과 함께 크메르 국경지역으로 여행을 가는 장면을 매우 볼테르 풍으로 묘사함으로써 좌파의 키치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고 있지요. 거기서 사비나에게 완전히 푹 빠져 있는 스위스의 과학연구원인 프란츠는 볼테르의 주인공 캉디드처럼 서구 좌파의 이를테면 대장정 같은 장면을 목격하게 되지요. 현지에 주둔하고 있는 공산군들에게 마구 달려드는 수많은 사진기자들을 앞세우고 미국의 스타들이 결성한 특공대가 나서는 장면 말입니다.


쿤데라 그 캄보디아 장면에서 나는 좌파의 키치를 보여주게 됩니다. 역사란 거대한 전진, 끝없는 진보라고 믿는 좌파 말입니다. 갑자기 크메르 국경에서 프란츠는, 그리고 그를 통해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커다란 패러독스들 중 하나를 의식하게 됩니다. 언제나 앞으로 전진만 하려고 한 나머지 결국은 종말에 이른다는 패러독스 말입니다. 오늘날 유럽에, 그리고 그 유럽의 사상인 좌파에게 일어난 현상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구는 저 혼자서 세계사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사면초가가 되어가지고 세계사는 서구를 빼놓고 혹은 서구를 거슬러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구 좌파의 환상은 무너지고 캄보디아에서의 그 대장정은 바로 그 붕괴를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편에는 서양의 광고, 매스컴의 장치가 제아무리 용감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체의 모든 행위를 키치로 변질시키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스펙터클이 그 마지막 패러독스에 이릅니다. 즉 앞으로의 도망, 앞으로의 전진이 이제는 더이상 불가능해졌습니다. 꼭꼭 닫힌 채 말이 없는 채 버티고 있는 적대적인 경계선뿐인 것입니다.


고드마르 그런 거 모두 매우 논쟁적인 것 아닙니까?


쿤데라 천만에요. 그 누구하고든 논쟁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요. 그러나 소설은 실제로 논쟁적인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본래부터 사물의 정체를 드러내 보이고 우리들이 가진 확신들과 가면들 뒤에 숨겨진 것을 노출시키겠다는 야심을 가진 것이 소설이니까요.




고드마르 토마스와 그의 아들 시몬은 둘 다 소련의 침공 이후 체코 정부 당국과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일을 당했습니다. 유명한 외과의사인 토마스는 사회적으로 낙오한 지식인으로 전락합니다. 1968년 이후 체코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죠. 그리고 그의 아들 시몬은 시골에 정착하여 독실한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이건 체코에도 폴란드형의 종교현상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쿤데라 그렇게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체코에도 진정한 종교적 반작용이 없지 않습니다만. 폴란드에서 가톨릭교는 민족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반면에 체코의 민족 정체성은 일종의 종교적 회의주의입니다. 우리나라는 17세기에 강제로 ‘다시 가톨릭화’되었지요. 그 때문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았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가 다소간 억압을 받았으므로 일부 체코 사람들의 전통적인 반교권주의적 반작용은 사라졌어요. 세속인들과 종교인들 사이에 어떤 상호이해가 생긴 겁니다. 공산주의적 전체주의는 유럽 특유의 합리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무신론 전통과 기독교 전통을 다 같이 위협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얀 파코카의 멋진 표현처럼 “상한 사람들간의 동지애”가 생긴 거죠.


고드마르 당신의 여주인공 테레사는 원래 카페의 여급이었다가 사진작가로 변신하지만 소련 침공 때의 사진을 너무 많이 찍었기 때문에 그 역시 사회적으로 강등되어 다시 여급 신분으로 되돌아옵니다. 그 전에 쓴 소설에서 여주인공 타미나는 이미 카페의 여급이었죠. 이건 우연일까요?


쿤데라 내가 고의로 그렇게 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당신이 그걸 발견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카페 여급의 이미지가 나를 강박적으로 사로잡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이건 소설창작에 있어서 무의식이 작용한다는 사실의 한 예라고 할 수 있어요.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도 결국은 자신을 드러내게 되고 말아요. 그렇긴 해도 나보고 개인적으로 소설가를 정의하라고 한다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걸 아주 싫어하는 사람, 그걸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러나 결국 우리들의 강박관념들은 심술궂게도 우리에게 달라붙어서 못살게 구는 걸 아주 좋아하거든요


고드마르 좀더 일반적으로 말해볼 때 소설창작에 있어서 우연이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쿤데라 난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노르망디의 시골에서 썼어요. 우리는 마당에다가 돼지 두 마리를 키우는 어떤 농부를 종종 찾아가곤 했지요. 우리가 가면 그 두 마리 돼지는 언제나 쫓아나오면서 내게 대단한 호감을 보였어요. 그렇게 해서 보헤미아의 어떤 마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돼지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하게 된 거죠. 난 그 인물을 아주 좋아해요. 그건 바로 노르망디 지방에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그 농부를 만나서 알게 된 때문이죠. 우연은 마침내 필연이 되었어요. 그 돼지가 없다면 소설의 끝에서 테레사와 토마스가 물러나 살게 된 그 마을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까요. 그 동물은 마을의 모티프가 되었어요. 어떤 현실에 완전히 자신을 맡긴 채 그 속에 푹 파묻히지 않고서는 소설 속에서 그 현실을 묘사하기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단들만으로도 하나의 소설적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해요. 때로는 이 돼지처럼 한두 가지의 모티프만 있어도 충분하거든요. 그러나 일화에 의존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대답해본다면, 작가에게 일어나는 우연의 일치에 대한 감각은 글을 써나가는 가운데 깨어난다고 생각해요. 사실 작가들은 누구나 늘 우연의 문제를 제시해왔습니다. 삶이란 우연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삶이 곧 우연이죠. 난 『안나 카레리나』에 있어서 우연의 역할에 대해서 여러 번 말했었어요. 가령 책의 서두를 보세요. 그 여자는 세인트 피터스버그 역에서 브론스키를 만나는데 바로 그때 어떤 역부 하나가 그만 기관차에 치이게 되죠. 그런데 소설의 맨 끝에서 그 여자는 기차바퀴 밑에 몸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실패한 일생을 마감합니다. 이런 대칭관계는 너무 작위적이라고 느껴지죠. 그러나 현실을 한번 관찰해보세요. 우리들의 삶 속에도 마찬가지의 대칭이, 마찬가지 우연의 일치들이 존재하는 겁니다. 어떤 사건은 그 우발적인 성격 때문에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그것에 아름다움과 시적 힘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점에 별로 주목하지 않아요. 그들은 자기 자신의 삶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죠. 그냥 하루하루 살고 밤이 되면 잊어버려요. 우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존재의 망각 속에서 살고 있어요. 삶에 대한 그런 감각, 우연의 일치들에 대한 그러한 주의, 그것이 또한 소설감각이죠.


고드마르 당신은 전에 낸 작품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결정적으로 완성하게 된 어떤 테크닉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다시 사용하고 있어요. 같은 이야기에 여러 시선이 던져지고 있는 것처럼, 동일한 주제를 중심으로 한 변주인 동시에 대위법인 기법 같은데요…….


쿤데라 그 테크닉은 처음엔 그냥 무의식적인 것이었는데 나중에 당신 말처럼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실험을 해보게 되었어요. 그 원칙을 설명해보면 이런 거예요. 즉 같은 작품 속에서, 인물이나 인과관계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서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게다가 각기 문학적 장르가 다른(에세이, 이야기, 자서전, 우화, 꿈)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한꺼번에 들려주는 거예요. 이런 잡다한 요소들을 하나로 묶자면 그야말로 어떤 연금술이 필요하게 되죠. 저마다 제각각인 이런 요소들을 결국은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끌어간 하나의 단일한 전체로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통일성은 대부분 형이상학적인 성격의 반복적 주제와 의문들에 의해서 산출됩니다. 이같은 글쓰기 방식은, 나의 경우, 뿌리가 매우 깊은 것이지요. 내가 처음 쓰기 시작한 산문들에 이미 그 싹이 보이고 있으니까요.


고드마르 이처럼 동일한 현실이 매번 다른 모습으로 해석되어 나타난다든가 사건들이 반복된다든가 소설가가 자기 자신의 소설 속에서 이리저리 왕래하며 서술할 수 있는 것은 책 전체에 걸쳐서 동일한 내레이터가 일관되게 존재함으로써 자신의 이야기와 유희를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쿤데라 바로 그겁니다. 이미 책의 초입에서부터 내레이터가 존재하고 있고, 그리하여 책은 철학적인 성찰로부터 시작됩니다. 소설에는 대체로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해볼 수 있어요. 서술적 소설(발자크, 뒤마), 묘사적 소설(플로베르), 반성적 소설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번째 경우, 내레이터는 생각을 하고 의문들을 제기하는 역할을 맡죠. 그리하여 서술은 바로 이런 반성적 성찰에 종속되는 겁니다. 플로베르의 경우에는 내레이터가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렇지만 반성적 소설에서는 독자가 책을 읽는 동안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게 되죠. 소설을 철학에 연결시키는 게 내 야심입니다. 그러나 오해가 있어서는 안 돼요. 나는 철학자가 하는 식이 아니라 소설가가 하는 식으로 철학을 하겠다는 겁니다. 나는 철학적 소설이라는 말을 안 좋아해요. 그건 주의주장이나 편견이나 증명욕구 같은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표현입니다. 난 뭘 증명하려는 게 아녜요. 난 그저 존재란 무엇인가? 질투란 무엇인가? 가벼움이란? 현기증이란? 약점이란? 사랑의 흥분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을 검토해보려는 것뿐입니다.


고드마르- 당신의 소설은 아주 짧은 장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가장 긴 장도 10여 페이지에 불과하죠. 왜죠?


쿤데라- 난 각각의 장이 한 편의 시처럼 하나의 전체가 되는 것을 좋아해요. 각각의 장이 단순히 서술적 사슬 속에서 하나의 고리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게 되었으면 해요. 아니 그 이상이에요. 그같은 선택은 나의 소설미학과 일치합니다. 각각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장들은 독자가 이야기의 흐름에 정신없이 떠밀려가는 것이 아니라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기도록 만드는 것 같아요. 한 권의 책 속에 서스펜스가 너무 많으면 그건 제풀에 소모되고 소비되는 거예요. 소설은 빠른 속도를 싫어해요. 독서는 느릿느릿해야 하고 독자는 한 페이지, 한 문단, 심지어는 한 문장의 매혹에 사로잡혀야 돼요.


고드마르- 책 속에서 당신은 소설과 자서전, 저자와 인물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당신은 이렇게 쓰고 있어요. “내 소설의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못한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 모든 인물들을 사랑하고 마찬가지로 두려워한다. 그 각각의 인물들은 나 자신이 비켜갔을 뿐인 경계선들을 과감히 넘었다. 내 관심은 바로 그들이 넘어선 경계선이다. 경계선을 넘어버리면 나의 자아는 끝이다. 그 너머에서부터는 소설이 의문을 던지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세계라는 덫 속에서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사다.”


쿤데라- 너무나 많은 오늘날의 소설들은 가면을 쓴 고백록이나 자서전에 불과해요. 나는 그런 식의 소설관과는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요. 사람들은 늘 “당신은 이러이러한 사건을 경험했죠?……” 하고 말해요. 천만에요, 그렇지 않아요, 하고 내가 대답하면 사람들은 또 반문해요. 당신의 책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보면 그걸 실제로 경험한 게 분명해요. 처음에 이런 짜증나는 질문을 받으면서 뭘 몰라서 그러는 거겠거니 했어요. 그러나 가만 생각해본 결과 이건 오늘날의 사람들이 소설을 읽고 이해하고 나아가서는 소설을 쓰는 일종의 유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자서전이 소설 속으로 마구 밀려들어오고 있고 누구나 다 글을 쓰고 싶어해요. 현대인이 열렬히 원하는 게 바로 자기 이야기 하기이고 자기 표현이죠. 녹음기에다가 자기 얘기를 쏟아넣고 싶어하는 이 열광적 취미를 사람들은 무슨 성스러운 것이나 되는 양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보기에 이건 이 시대가 드러내 보이는 가장 그로테스크하고 가장 비천한 권력의지, 즉 타인에게 자기를 강요하고자 하는 의지에 불과해요. 그런 건 다 소설과는 무관한 겁니다. 물론 우리가 쓰는 모든 글은 우리 자신의 삶과 관련이 있지요. 소설은 개인적인 정념들에서 태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탄력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삶과 이어진 탯줄을 끊어버리는 순간,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이 아니라 그냥 삶 그 자체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입니다. 질투에 대하여 글을 쓰는 소설가는 설사 그가 질투 속에 푹 빠져 있다 할지라도 질투를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실존적 문제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돼요. 나는 글을 쓰기 위해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들을 상상하고 내겐 수많은 실험적 자아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인물들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렇기 때문에 한 권의 소설은 그것이 전혀 자전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극도로 개인적인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자신이 그려낸 인물들 속에서 우리 자신의 가능성들을 보게 되고,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었을 수도 있는 존재, 그렇게 될지도 모르는 존재를 만나게 되죠. 그건 여성인물일 수도 있고 남성인물일 수도 있어요. 자서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요.

고드마르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소설에 위협적인 존재라고 보는 것인가요?


쿤데라- 우리는 미디어의 엄청난 영향을 받고 있어요. 이미 50여 년 전에 가령 로베르트 무질처럼 가장 명석한 작가들은 문화의 목소리가 저널리즘의 소음 속으로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들의 생각은 옳았어요. 미디어의 정신은 현대 유럽이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은 문화의 정신과는 배치되는 것이지요. 문화는 개인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 데 미디어는 획일성을 지향해요. 문화는 만사와 만물의 복합성을 보여주는 데 비하여 미디어는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요. 문화는 긴 질문인 데 비하여 미디어는 만사에 신속한 해답을 제공하지요. 문화는 기억의 파수꾼인데 비하여 미디어는 뉴스의 사냥꾼이죠. 오늘날에는 소설가를 기쁘게 해주려고 사람들은 “당신의 책은 일대 사건입니다” 하고 말해줍니다. 그런데 사건이란 뭐죠? 너무나도 중요한 나머지 미디어의 관심을 사로잡는 뉴스를 뜻하죠. 그런데 우리가 소설을 쓰는 것은 무슨 사건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래 가는’ 무엇인가를 만들어보기 위해서죠. 순전히 뉴스에만 관심이 쏠려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 오래 가는 그 무엇인가가 아직도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요? 일간지, 주간지 심지어 잡지라도 펴보세요. 이러저러한 시사적 뉴스에 바싹 매달리지 않고는 거기에다가 글을 발표할 수가 없어요. 당신이 어떤 작가와 인터뷰를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책이 이번주에 출간되기 때문이죠. 일주일만 지나면 그 작가는 벌써 인터뷰 감이 못 되는 겁니다. 시효가 지난 거죠. 그는 이미 뉴스거리가 아니거든요. 뉴스를 벗어나면 구원도 없다 이겁니다. 뉴스의 노예가 된다는 것은 망각의 노예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바로 문화적 계속성이 노상강도사건이나 럭비게임 같은 일련의 덧없고 고립된 사건들로 변질되고 마는 ‘망각체계’를 창조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드마르- 대단히 비관적이시군요. 당신 소설에 등장하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쿤데라- 아닙니다. 난 비관적도 아니고 낙관적도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가설일 뿐이죠. 난 소설가입니다. 소설가는 너무 단정적인 태도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는 걸 잘 알지요. 그는 최대한의 설득력을 가지고 자기 인물들의 ‘상대적’ 진실을 표현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그 진실과 동일시하지 않아요. 바보만이 만사에 대한 해답을 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죠. 소설은 만사에 대해서 다 의문을 품는다는 점에서 현명한 장르입니다. 돈키호테가 자기집 대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서자 세상은 그의 눈앞에서 온갖 질문들로 변해버렸습니다. 세르반테스가 그의 후손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소설가란 그의 독자들에게 세상을 하나의 질문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다라는 겁니다. 신성불가침의 확신들 위에 세워진 세계 속에서는 소설이 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설은 그저 그같은 확신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그거야말로 소설정신에 대한 배반이고 세르반테스에 대한 배반이죠. 레닌주의건 이슬람이건 그 무엇이건 전체주의적인 세계는 답의 세계일 뿐 질문의 세계가 아닙니다. 매스 미디어 정신에 온통 침투된 세계 역시 불행하게도 답의 세계일 뿐 질문의 세계가 아닙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는 세르반테스의 유산인 소설이 설 자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 위험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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