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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끝나는 계절
2019.09.27 05:05
영화 “여름이 끝나는 계절”은 뒤태를 보이며 앉아 있는 저 여자에게 말을 걸 때 공통의 화제로 사용할 수 있는 미끼가 될 수 있다.
“실례합니다. 한국분이시지요? 뒤에서 보니까......”
나를 보는 여자의 눈에는 표독스런 적의가 서려있고 그 얼굴은 화상흉터로 괴물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 흉한 얼굴에 잠시 할 말을 잃고 당황스럽게 서 있는 나를 쏘아보던 여자는 벤치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내게 등을 돌리고 캔버스 가방을 벤치 등받이에서 꺼내 들었다.
뜻밖의 상황에 나는 당황해서 얼빠진 사람처럼 서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어쩌지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조용히 있는 시간을 방해해서.”
여자가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외면하고 말했다.
여자의 목소리는 곱고 아름다웠다. 여자의 얼굴을 그렇게 태워놓은 무서운 불길도 그 아름다운 목소리는 건드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말이 끝나자 여자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내게 등을 보이며 걷기 시작했다.
“저, 같이 좀 걸어도 될까요? 어쩐지 그냥 이렇게 보내드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마치 침묵의 허가를 얻은 것처럼 여자의 옆에서 같이 걸었다.
“동정하시는 건가요?”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렇게 그냥 보내드리면 안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쳐 지나가던 산보객 부부가 여자의 흉한 얼굴을 보자 얼굴을 찌푸리며 얼른 길 한쪽으로 물러섰다.
나는 어색한 공간을 메우기 위해 필요 없는 설명을 장황하게 해댔다.
“참, 제 이름은 김현성입니다. 모두 저를 케이라고 부르지요. 어쩐지 미국이름 만들기가 어색해서 제 성의 첫 번째 글자를 따서 생각해낸 이름입니다.”
여자는 역시 아무 말 없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며 여자의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김영자씨. 눈이 아름답군요. 몹쓸 일을 당하고도 두 눈은 그대로 다치지 않고 아름답게 남아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하겠군요.”
여자의 입술이 떨리며 눈에 순식간에 눈물이 가득 고여 나왔다. 나는 여자의 어깨를 안은 채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를 어떻게 당해서 이렇게 큰 화상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다만 그런 이유 때문에 스스로를 정신적 감옥에 가두고 유폐된 생활을 자초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김영자씨, 우리 이제부터 친구가 됩시다. 제 친구가 되어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김영자라는 여자의 얼어붙은 마음에서 조심스럽게 다시 따뜻한 모습을 끄집어내려 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어깨를 잡고 있는 내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주차장으로 나오자 여자는 하얀 캠리 차 앞에 멈춰 섰다.
“오늘 친절을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작별을 고하고자하는 여자의 말에 나는 다소 다급해졌다.
“내일 또 뵐 수 있을까요? 나는 네 시면 일이 끝나는데 그 이후에는 아무 때라도 시간을 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보여주신 호의만으로도 족합니다. 더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나는 이 여자를 놓고 싶지 않았다. 이것은 하룻밤을 즐기기 위해서 유혹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도 괜찮지만 이것은 좀 더 의미가 심중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다시 만나기를 원하는 나의 부탁을 한사코 거부했다. 연락할 곳을 알려달라고 해도 그것도 사양하고 말았다.
“진정 그러시면 제가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도 저하고 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차가 없이 택시를 타고 여기 왔습니다.”
여자가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고 나는 다운타운의 홀리데이 인에서 묵는다고 말했다.
여자가 짤막하게 말하고 차에 올랐다. 나는 마치 여자가 차를 몰고 훌쩍 떠나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듯 서둘러서 여자의 뒤를 따라 같이 차에 올랐다.
여자는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면서 운전했고 내가 무슨 말이건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차는 호텔 앞에 도착하고 말았다.
홀리데이 인의 로비로 들어가는 회전문 앞에 차를 대고 내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여자에게 나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여자의 화상 입은 얼굴은 표정을 잃어버렸지만 나는 이 여자가 그저 쓸쓸히 미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대신 내 명함을 한 장 꺼내서 대쉬보드 위에 얹어놓았다.
“혹시 마음이 변하시면 아무 때나 연락 주십시오. 거기 전화번호도 있고 이메일 주소도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김영자씨가 저를 잊지 않고 연락을 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큰 아쉬움을 느끼며 차에서 내린 나는 여자의 차 꼬리등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호텔 로비 문 앞에 멍청히 서있었다.
시카고에 다녀온 지 한 달쯤 지난 때에는 나는 완전히 김영자를 잊고 있었고 그 “여름이 끝나는 계절” 이라던가 하는 영화도 잊고 있었다.
그 금요일 밤에 나는 수지를 데리고 나이트클럽에 가서 새벽 두 시까지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발광을 하다가 동시 픽업이라고 부르는 택시 서비스로 수지의 아파트로 갔다.
그날 밤새도록 나는 수지와 엎치락뒤치락하며 광란의 시간을 보내고 토요일 오후 한 시쯤이 되어서야 침대에서 일어났다.
- 시카고에 오셨을 때 보여주셨던 호의를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김영자.
비로소 나는 시카고에서 일어났던 일이 기억에 떠올랐다. 화상입어 일그러진 얼굴을 가지고 있던 김영자가 생각났다.
나는 김영자에게 간단한 답신을 하고 컴퓨터를 껐다. 영화를 보기는커녕 피곤해서 지금은 우선 잠부터 자야했다.
- 시카고에 오셨을 때 보여주셨던 호의를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김영자.
그렇게 이메일을 보내고 이틀이 지난 오후에 사무실에서 나는 김영자의 답신을 받았다.
- 화상에 일그러진 제 얼굴을 보고 놀라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이제 더 이상 감당하기가 힘들군요. 용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 짧은 이메일 메시지는 나의 마음을 흔들며 와 닿았다. 괴로울 테지. 몹시 괴로울 테지.
나는 퇴근하기 전에 쎌폰에 수지의 전화번호를 찍어 넣었다.
뭘 해? 시간 있니? 오늘은 안 돼. 밤일이 있어. 짜식. 알았다.
수지와 만나서 한바탕 격전을 치룰 생각을 했었는데 틀렸다. 일찌감치 집에 들어온 나는 샤워를 하고 헐렁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메일 프로그램을 열자 첫 번째 눈에 들어온 것은 사무실에서 읽었던 김영자의 메시지였다.
- 화상에 일그러진 제 얼굴을 보고 놀라는 뭇 사람들의 시선을 이제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들군요. 용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나는 애써 이 메시지에서 시선을 돌렸다. 없었던 일로 해두자. 나는 나 나름대로 내가 가진 문제가 있다. 이 여자가 가진 문제 따위에 말려들어가서는 안 된다.
별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나는 또 그 영화를 찾아서 화면에 떠올렸다.
나는 컴퓨터에 영화의 주인공 윤미란의 이름을 타자해 넣었다.
1982년 서울 생. 꼭 한 편의 영화에 출연. “여름이 끝나는 계절”. 현주소 미상.
그리고 새벽 두 시가 거의 다 되어갈 때 나는 시카고의 괴물얼굴 여자에게 이메일을 썼다.
이메일을 보내고 미처 10분이 지나기 전에 답신이 들어왔다.
시카고의 새벽 시간에 김영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자서 삶을 괴로워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다처럼 거대한 호수는 또 그만큼이나 큰 파도를 만들어 하얀 거품을 뿜어내며 육지를 때렸다.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호수가의 바람은 자는 날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착한 사람이 되어 김영자에게 사죄하는 마음이었다.
얼마만한 시간이 흘렀을까, 혼자 생각에 깊이 빠졌다가 문득 눈을 뜨니 그 벤치에 김영자가 뒷모습을 보이며 앉아 있었다.
나는 김영자와 거리를 띄우고 벤치 끝에 앉았다. 화상흉터로 일그러진 그 얼굴이 이제는 이상하게도 친근하게 느껴졌다.
여자는 얼굴을 돌리고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손을 들어 돌덩어리 같은 여자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여자는 눈을 내리깐 채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침묵 속에는 무수히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김영자씨가 씩씩하고 용기 있게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김영자씨를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온다고 하면 못 오게 할 것 같아서 핑계를 댔습니다.”
지나치던 산보객이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외면하면서 지나갔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따위 생각 짧은 사람들의 행동을 개의치 않기로 했다.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간 후 나는 김영자씨를 생각하면서 그 영화를 두 번이나 봤습니다.”
“그리고 그 여주인공 윤미란에 대해서도 컴퓨터에 남아 있는 기록을 모두 찾아서 다 알아봤습니다.”
“1982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영화에는 꼭 한 편 ‘여름이 끝나는 계절’ 에만 출연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나도 한참 동안 호수를 내다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말했다.
여자가 충격에 비틀거리며 돌아서서 급하게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 등에 대고 다급히 불렀다.
서둘러 일어나 여자의 뒤를 따라가서 어깨를 끌어안았다. 내 손 안에서 여자의 온몸이 화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윤미란씨. 나하고 이야기합시다. 나하고 조금만 더 이야기합시다. 나는 윤미란씨와 친구가 되기로 약속한 사람입니다.”
“나는 윤미란이 아니에요. 오늘은 나를 놓아주세요. 나는 집에 가고 싶어요.”
여자는 한사코 나를 거부했다. 그 목소리가 너무 완강했기에 나는 단념하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이 자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일 만나서 더 긴 이야기를 나누기로 합시다.”
여자는 뛰다시피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서 급히 차를 몰고 멀어져갔다.
나는 쿵쾅거리고 뛰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차가 시야에서 없어진 후에도 갈 곳을 잃어버린 바보처럼 한참이나 거기 서있었다.
그 후 삼 일 동안을 나는 여자를 만났던 자리에 매일 아침부터 나가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렸지만 여자는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 윤미란씨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속으로만 침잠해 들어가서 자학하고 울면서 고통을 더 크게 만들지 말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서 거의 반년이 지나 안타까운 기다림이 희석되어 가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윤미란에게서 답신을 받았다.
- 따뜻한 말씀에 삶의 의지가 되살아나는 것이 두려워 답신 드리지 못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윤미란에게서는 더 이상 소식이 없었다. 몇 번 애타는 이메일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그렇게 하면서 또 시간이 지나 여자를 처음 만났던 계절이 되돌아왔다. 여름이 끝나고 아침저녁으로 꽤 차가운 바람이 살갗에 부딪쳐오는 계절이 되었다.
무심히 내다본 창밖에는 초록빛을 잃어가는 나뭇잎들 사이로 마악 떨어지고 있는 해가 마지막 빨간 빛을 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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