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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형님 (조선일보 칼럼 '김영문의 응접실' 100719)
2019.10.23 09:44
형님
“우리는 강원도 해변도시에서 같이 컸는데 바닷가에서 조개 잡으면서 뛰어 놀던 형님은 이제 없고 여기 있는 형님은 제가 모르는 분이더군요.”
어느 날 한국 분 한 분이 전화 와서 만나서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한다. 볼티모어에서 운송업을 할 때의 이야기이다. 일과가 끝난 조용한 시간에 사무실로 찾아온 그 분은 아주 순박하게 생긴 분인데 손에 굳은살이 붙고 거친 것으로 미루어 손을 많이 쓰는 노동일을 하는 분 같았다. 자리에 앉고 인사가 오간 후 잠시 침묵을 지키던 이 분이 담담한 어조로 자기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이 분은 강원도의 어느 어촌에서 철공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미국에 들어와서 살고 있던 형의 초청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다. 어선을 수리하며 아주 성업 중이던 철공소를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주해온지 한 반 년 정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다시 짐을 꾸려서 한국으로 가고 싶은데 도와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었다. 아니, 반 년 밖에 안 됐는데 다시 한국으로 가다니요? 내가 묻자 잠시 주저하던 이분이 하소연하듯 사연을 털어 놓았다.
“저와 저희 형님 사이는 나이 차이가 십년이나 됩니다. 그래서 저는 형님을 마치 아버지처럼 생각하면서 컸습니다.” 이 분은 이렇게 말문을 텄다.
강원도의 어촌에서 철공소를 하면서 근면하게 일하고 부족한 것 없이 살다가 형의 권유를 받아 모든 것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우선 자리가 잡힐 때 까지 형의 집에서 거주하기로 하고 한국에서 가지고 온 모든 재산을 형에게 맡기고 아버지 같이 믿는 형의 말을 따르면서 반 년 정도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점점 형의 하는 행동이 자기가 기억하고 믿고 있던 형과는 다른 것이어서 실망감을 넘어 심지어는 불안한 느낌 까지 들더라는 것이다. 여기는 미국이니까 미국식으로 한다면서 방 값, 전기 값, 물 값, 보험료, 하면서 맡겨놓은 목돈을 임의로 헐어서 쓰고 자기 아이들은 귀하게 알면서 동생의 아이들은 마치 하인배 다루듯 한다는 것이다. 형은 심지어는 얼굴이 한국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항상 까만 안경을 쓰고 다니고 그 아이들도 그 당시 ‘Made in Korea’ 운동화는 고급품으로 속하던 시절인데도 새 운동화를 사면 한국산이라는 말이 싫어서 그 ‘Made in Korea’ 라고 씌어 있는 라벨을 면도칼로 도려낸 후 신고 다닌다는 것이다.
담담한 얼굴로 간간이 쉬면서 말을 이어가던 그 분이 마지막에 한 말이 아직도 내 귀를 떠나지 않는다.
“우리는 강원도 해변도시에서 같이 컸는데 바닷가에서 조개 잡으면서 뛰어 놀던 형님은 이제 없고 여기 있는 형님은 제가 모르는 분이더군요.”
그 분은 말을 마치고 허탈한 표정으로 창밖의 빈 잿빛 하늘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분하고는 그 후로도 두어 번 만나서 대화를 나누고 좀 참고 살다보면 좋은 일도 많이 생길 것이라고 조언을 해드렸는데 본인 말대로 한국으로 다시 귀국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내 회사에서는 그 분의 한국행 이삿짐을 선적해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아무쪼록 이분이 잘못된 형님의 그늘을 벗어나 오늘도 미국 땅 어디에선가 다시 철공업 공장을 차리고 번성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면 좋겠다.
(2019년 10월 7일 조선일보 ‘김영문의 응접실’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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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럼 쓰시는 군요, 분주하시게ㅅ지요....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