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내가 사랑한 몽골의 여인들 파트 4

2012.01.25 13:21

연규호 조회 수:863 추천:29

마취과 의사에서 실직자가 된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하며, 나의 앞길을 설계 해 보았으나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모아둔 돈이 있어 먹고 살기에는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의사가 의사 노릇을 못하고 놀고 있다는 것은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1990년 초였다. 한국에서는 88올림픽도 끝나고 경기가 상승세를 타고 있었으나, 미국의 경기는 점점 하강세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뉴욕에서의 생활도 여러 모로 지쳐 있었다. * 또한 나를 우울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물론 기대는 하고 있었지만 어려서부터 사랑해 온 내 마음의 연인, 성혜가 나를 외면하더니 드디어 파사데나에 사는 화가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이 왔다. '올 것이 왔구나'하는 담담한 마음이었다. -성혜도 여러 모로 생각을 하였다고 했다. 한차례 남편을 잃고 새로운 남자를 만나 새 출발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렸기에 눈물을 머금고 나를 포기하고 미국 화가와 결혼을 한다는 말을 전해왔다. 첫째는 뉴욕 정신 병원에서 실종된 남편의 용의자로 아직도 경찰은 성혜와 나를 지목하고 계속 감시하고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이런 의심을 마다하고 결혼을 한다면 영낙없이 경찰의 추적을 받을 것이란다. 둘째는 마취를 하는 중에 생긴 과실 치사로 인해 직장을 잃고 재판을 받고 있는 나와 결혼하는 것은 고통을 자초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반대가 심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 그녀의 변명이었다.- 수긍이 가는 얘기였다. 그리고 사실이 그러했다. 근래에도 경찰들이 나의 집으로 찾아와 몇가지 질문을 하곤 하였다. 아직도 그들은 K건설 뉴욕 지사장인 이사장의 실종 사건에 대해 나를 집요하게도 의심을 하고 있으며, 내가 용의자 중에 한 사람이라는 말이었다. 게다가 마취과 의사 직업을 잃고 보니, 나는 영락없는 '거지 의사'였다. 3개월이 지나고 보니 이젠 여기 마운트 버논이 아니라도 좋으니, 어디를 가서든지 다시 마취과 직장을 갖고 싶었다. 마운트 버논도, 뉴욕도 이젠 싫어지고 있었다. * 인연이란 평생을 같이 따라 다니는지도 모른다. 그 동안 별 소식도 없이 지냈던 나의 친구, 기성환의 전화를 받았다. 반갑기도 하였으며, 한 편으로는 부끄러운 마음이었다. 벌써 15년 전 마운트 버논 병원에서 외과 의사의 수련 과정을 중도에 그만두고 떠날 때, 친구라고 한 나는 그에게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그를 위해 나는 변호도 못했다. "석호? 마취과를 쉬고 있다고 하던데, 어떤가? 여기 아나하임으로 오게나. 그동안 나는 외과 개업을 착실하게 하였기에 신용도 생겼다네. 내가 보증하면 이곳에서 마취 의사로 채용해 준다고 하니, 캘리포니아는 살기도 좋고, 수입도 뉴욕보다 났다네. 그리고 성혜를 잊어 주게나! 인연이 없는 것 같아. 인연이? 아참! 어머니의 반대에 대해 나를 봐서라도 이해를 해 주게나!" "……" 어쨌거나 나는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반가웠다. 나는 마취과 의사 직업을 찾고 있었는데, 살기 좋다는 곳, 캘리포니아로 오라니! 더구나 자기와 같이 일을 하자고 하니, 또 다시 나는 친구의 신세를 지는 셈이었다. "내가 알아 본 바에 의하면, 마취 의사의 의료보험이 다소 비싸기는 하나 가입 할 수가 있다네. 그리고 병원에서 보험금도 절반은 부담을 해 준다고 하니, 웬만하면 이리로 오게나. 나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자네 없이는 살기 힘든가 봐!" 고마웠다. 그리고 역시 기성환은 나보다 훌륭했다. 마음도 탁 트인 남자 다운 의사였다. "고맙다. 성환아! 네 곁으로 갈게, 가고 말고!"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 와- 모든 것이 시원하게 해결 된 셈이었다. 꽉 막혔던 수채 구멍이 확 트인 기분이었다. 용커스에 있는 집과 얼마 안되는 부동산도 싸게 팔았다. 그리고 뉴욕 주의 의사 면허를 캘리포니아 주 면허로 바꾸고, 드디어 캘리포니아 아나하임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것이 1990년 3월이었다. 결국 나는 14년을, 처음 몇 년 간은 기성환과 같이 지냈으나, 그 후 12년은 외롭게 나 혼자 뉴욕에서 산 셈이었다. 이제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마치 옛날 청량리에 살 때, 기성환의 집을 찾아 가는 기분이었다. 성환의 어머니는 나에게 노골적인 반대를 해 왔다. "캘리포니아에는 왜 왔느냐?" 물론 나도 성혜를 만나는 것도 곤욕스러웠지만 그래도 재혼을 축하해 주웠다. 그리고 내가 가장 궁굼한 것은 하이디였다. * 막상 뉴 포트에 있는 기성환의 집으로 찾아갔을 때, 나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또 한번 혹독한 박대를 받았으며, 생각 외로 하이디도 내게 쌀쌀하게 대해 주었다. 그의 어머니에게는 언제나 박대를 당하였기에 의례 그러커니 생각을 하였지만 하이디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런데, 왜 그럴까? 왜?' 그러나 나는 금방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친구라면서 친구인 성환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말도 않고 침묵을 지킨 나에 대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편인 성환이 나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이 못 마땅했다는 것이다. 나와 성환은 아나하임에 있는 마틴 루터 병원에서 마취과와 외과 의사로 다시 함께 일하게 되었다. 너무나 좋았다. 외롭지도 않았다. 그동안 닥터 기는 외과 의사로서 상당한 위치와 신용을 쌓았는지 수술 환자가 많았기에 나도 또한 덩달아 바빴다. 왜냐하면, 그의 수술 환자를 내가 전담하여 마취를 하였기 때문이다. * 내가 사랑했으며, 나의 아내가 되어 있어야 할 성혜를 만난 것은 역시 뉴 포트에서 였다. 파사데나의 미술 대학의 교수인 백인 남성이 그녀의 곁에 있었다. 그래서 내가 보아도 그는 멋진 사내였기에 나는 성혜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잊어버리기로 했다. '아! 역시 성혜는 나의 아내가 될 인연이 아니구나. 저 멋진 남자를 봐! 나는 역시 상대감이 아니었구먼!' *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실종된 남편으로 인해 나와 성혜는 결국 결혼도 못하고 용의자일지도 모른다는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는데, 우리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뉴 포트 경찰서에서 온 한 통의 편지였다. 〔"기성혜씨와 강석호씨는 경찰서로 출두하시요."〕 라고 하는 법원에서 온 명령서였다. "예? 법원에서요? 왜요?" 나와 성혜는 이렇게 물었다. "와 보면 알게 됩니다." 경찰은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였다. "와! 무슨 일일까?" 우리는 걱정을 하면서 뉴 포트 경찰서로 찾아 갔다. 마치 성혜의 남편, 미스터 리를 살해한 공범일지도 모른다는 우리에게 무슨 단서라도 잡혔기에 구속이라도 하려는지, 뉴 포트 경찰서에는 뜻밖에도 FBI 직원도 함께 와 있었기에 우리는 더욱 마음이 위축되었다. "기성혜씨입니까?" FBI 직원은 성혜에게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만?" 성혜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떨고 있었다. '혹시?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있어 잡아가려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스터 리가 남편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망한 것으로 알고, 보험금도 타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FBI 직원은 또 물었다. "예." 성혜는 떨리는 말로 대답을 하였다. 옆에 앉아 있는 나는 '혹시라도 미스터 리가 어디에 살아 있나보구나. 그렇기에 생명보험금을 환불하라고 하는 모양이구나!'라고 나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재혼 하셨다고요?" FBI 직원은 씩 웃으면서 성혜에게 물었다. "예." "그래요? 그러면 여기에 있는 닥터 강하고요?" "아니, 파사데나 미술대학의 교수하고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기성혜씨? 당신의 전 남편인 미스터 리를 찾았습니다." "예! 예!" 성혜와 나는 동시에 소리를 쳤다. 뜻밖이었다. 6년 전에 실종된 미스터 리가 살아 있다고 하니, 죽은 줄 알았던 남편이 살았다니! 그렇다면 사망으로 인해 받은 생명보험금도 되 돌려 주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미술가와 결혼한 성혜는 어찌된단 말인가? 아- 맙소사! 맙소사? "찾았습니다. 뉴 저지와 뉴욕이 만나는 허드슨 강 하류인 자유의 여신상이 빤이 보이는 곳에서 말입니다." "……" 맙소사! 맙소사! 그렇다면 나의 재혼은 결국 물거품이로구나. 법적으로 2중 결혼을 한셈이군! 성혜는 앞이 캄캄해 지고 있었다. "바닷물 속에 빠진 상태로 6년 동안 죽어 있었습니다." "죽었다고요?" 성혜가 이번에는 눈을 번득이면서 되 물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 살았구나. 미스터 리가 아니, 남편이 죽은 것이 다행이구나'라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듯 하였다. 곁에 있던 나도 그러했다. 살인자 일지도 모른다고 하는 누명을 벗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퀸즈에 있는 깽단의 소행으로 몇푼 안되는 돈을 빼앗으려고 한 짓이었습니다. 역시 뉴욕의 깽단 답게 놈들은 잔인했습니다. 동양 사람들, 현금을 많이 갖고 다닌다는 것 때문에 생긴 단순 범죄였지요. 병원 간호사들을 매수했더군요. 슬그머니 밖으로 내 보낸 후 납치하여 돈을 뺏고는 잔인하게 죽였어요. 그리고 자동차 트렁크에 실고 부르클린으로 해서 만하탄 남쪽으로 간 거지요. 자, 여기에 싸인을 하십시오. 기성혜씨? 강석호씨? FBI에서 사건의 전모를 알려 주었다고 하는 이 서류에 말입니다." "예!" 우리는 각각 서명을 하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끝으로 나는 허무한 인생을 느끼고 있었다. '아! 억울하다. 진작 이렇게 누명을 벗었더라면 떳떳하게 성혜에게 청혼을 할 수가 있었는데…' 결국 나는 성혜에 대한 욕망을 완전히 포기하고 말았다. * 그러나 하이디에 대한 나의 미련은 반대로 커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나같은 사람을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친구의 아내를 사모하다니, 이게 무슨 운명인가?' * 나는 나의 친구 덕분에 뉴욕에서 보다 더 생활이 좋아져서 1년만에 아나하임 힐에 있는 꽤 큰 집을 살 수가 있었다. 혼자 사는 마취과 의사에게는 너무나 큰 집이었다. 마침내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지 3년만에 나는 드디어 하이디로부터 비교적 따뜻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이제서야 나는 닥터 기의 집과 대등한 위치에서 방문을 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이젠 나도 돈도 있고, 집도 있는 의사가 되었다는 의미일 게다. * 나와 하이디가 대화다운 대화를 하게 된 것은 1994년 가을이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하이디가 갖고 있는 남편 기성환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닥터 기에게 불만을 품다니? 그가 누구인데, 말도 안되지!'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하이디를 바라다 보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닥터 강? 몽골에 가서 선교를 한답시고 내 남편이 너무 자주 진료실을 비운답니다." "선교를?" 나는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모르는 척 되 물었다. 언제부터인지 남가주에는 '몽골 선교'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었다. 닥터 기는 그가 다니는 가톨릭 성당에서 주관한 몽골 의료 선교차 10일간 그의 진료실을 비우고 몽골의 우란 바톨에 다녀왔다. 이 세상에 있는 여러 나라들 중 가장 못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몽골이었다. 한 때는 세계를 지배했던 징기스칸의 나라가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전략하다니, 여기에는 공산주의가 심어져 있다고는 하나,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련이 붕괴되면서 꿈적도 않던 몽골에도 선교의 입김이 조금씩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신교와 구교를 망라하고 몽골로 선교차 찾아가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나의 친구는 몽골 선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아내인 하이디는 몽골 선교에 반대를 하였다고 했다. '정치적으로 위험하며, 세계에서 유달리 고립되어 있는 가난한 나라에 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한다면 어쩌겠는가?'라는 이유에서 였다. 사실, 몽골이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고, 사회적으로도 위험하여 강도가 여기 저기에서 나타나며, 갖고 들어 간 의약품 마저도 빼앗기곤 하였다. 더욱이 물도 부족하여 더럽고, 사막 기후와 엄동 설한으로 위생마저도 불결한 나라였다. 그러나 닥터 기는 생각보다 몽골에 대한 의료 선교의 열정이 대단하였다. 몽골에 의료기를 사 주기 위하여 닥터 기는 선뜻 5만 달러를 마련하였기에 하이디는 의아해 하였다. 그녀는 이해가 되지 않는 다고 말했다.- * 친구인 나도 그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왜? 하필이면 몽골을?" 나는 닥터 기에게 물었다. "몽골? 응, 단지 좋아하고 싶은 나라이니까." "……" 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요, 감추어진 나라인데, 그가 좋아 할 이유가 없었다. 이 문제에서만큼은 나와 하이디는 같은 편이었다. 1990년 초부터 몽골로 가는 선교 행렬이 남가주에서는 시작되었는데, 1994년에는 꽤 많은 선교사들과 의사들이 몽골을 다녀왔다고 한다. 부인 하이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닥터 기는 기독교 단체에서 주관하는 의료팀에 합류하여 9월에 또 다시 2주 간을 다녀오게 되었다. 그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고 했다. 너무도 가난하고 건조하여 물도 제대로 없는 몽골에 가서 본 환자들은 고혈압과 고지방의 환자가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우란 바톨에 있는 병원에서, 그리고 다르 항에서 그는 수술도 하며, 몽골 사람들을 도와 주고 왔다. 그 결과 그의 외과 의원도 위축되었기에 마취과 의사인 나에게도 적지 않은 손해를 보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하이디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내게 남편이 왜 그토록 몽골 선교에 열을 올리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나도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었기에 별다른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외과 의사가 하기에는 힘든다고 하는데, 왜 진료실을 비우면서까지 몽골에 가나요?" 하이디는 불평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가만히 생각을 해 보았다. "왜, 갑자기 닥터 기가 이토록 열심히 몽골 선교에 열을 올리고 있는지!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 몽골을 다녀온 나의 친구, 닥터 기를 통해 나는 인생의 또 다른 출발을 배울 수가 있었다. 1994년 1월 1일 아침, 닥터 기는 조용히 생각을 해 보았다고 한다. "아! 내 나이가 이젠 50살이 되는구나, 50살?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하였단 말인가? 무엇을? 외과 의사의 일도 중요하지만 이젠 나만을 위한 인생에서 남을 위한 인생으로 살자. 외과 의사로서 돈도 많이 벌었으며, 큰 집도 샀으며, 벤즈도 타고 있지만 그것이 뭐 어쨌다는 거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지 않은가?" 사실 그러했다.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 의사들은 뉴욕 필라델피아 볼티모어와 같은 대 도시의 병원에서 마치 값싼 노동자처럼 흑인환자나 알코올 중독자들을 치료하며, 수련을 받아 전문 의사가 되었다. 엄청난 고생과 희생의 대가였기에 개업을 하여 돈 많이 벌어 잘 살아야 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돈 벌어 좋은 집도 사고, 벤츠도 사고 골프를 치며, 인생을 즐겨 본들 즐거움은 없었다. 그러기에 우울증 환자가 생기고 있었다. 나의 친구, 닥터 기는 반대였다. 새로운 삶을 찾아 의미로운 인생을 살겠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가난한 나라에 가서 기독교를 전도하며, 외과 의사로서 봉사를 하겠다고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바로 몽골 의료 선교였다. 1995년 3월, 캘리포니아에는 꽃이 피고 따뜻한 날씨가 계속되지만 나의 친구가 찾아간 몽골은 아직도 눈보라가 치는 겨울이었다. 닥터 기가 세 번에 걸쳐 몽골을 방문하였지만 그의 아내, 하이디는 아직도 달갑게 생각하지를 않았다. 아직도 그녀는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몽골에서 돌아 온 후, 몇 개월 닥터 기는 몸이 피곤하였으며,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신장 암으로 판명이 된 것은 불과 1개월 후였다. 그래서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닥터 기는 실망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안도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다행히 죽기 전에 몽골에 가서 의료 선교를 하였다고 하는 작은 위로였다.- 나는 언젠가 나의 친구에게 왜 몽골을 의료 선교의 현장으로 선택했는가 이유를 물었다. 아마도 그가 죽기 불과 1개월 전이었을 게다. "석호야! 나는 몽골에 가서 옛날 그곳에서 살았던 예쁜 고려의 여인을 만나고 싶었다." "뭐라고? 고려의 여인을?" "그래. 고려의 여인? 아주 예쁜 여인, 기황후를?" "기황후?" "그래, 그래. 그러나 못 만났어. 부탁이다, 석호야! 네가 내 대신 가서 만나주려무나. 나 대신?" "너 대신? 기황후를 만나 달라고?" "그래. 석호야!" 그리고 그는 피곤한지 말을 멈추었다. * 나는 그날 저녁 그가 몽골 선교에 열심인 참 뜻을 알 수가 있었고, 또한 얘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닥터 기는 나보다는 늘 한 수 앞을 먼저 내다보는 친구였기에 나는 그의 뒤만 따라 다녀도 되었다. 기황후라면?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조공으로 받쳐진 아름다운 '기여인'의 얘기를, 그녀는 아름다운 고려의 처녀였다. 마치 하늘의 별처럼 청아하고 벽란도 앞 바닷물처럼 파란 처녀였다. 그 뿐인가, 가을 날 송악산에 핀 단풍잎처럼 화사하고 박연 폭포처럼 곧은 절개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러기에 몽골의 황제가 한 눈에 반하여 황후로 만들었다는 고려의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렇다면? 닥터 기는 옛날의 그 아름다운 여인의 후손임을 느끼고 있었기에 유달리도 가난한 몽골에 가서 의료 선교를 하고자 하였을 것이라고 나는 추측을 하게 되면서, 그를 다시 한번 우러러 보게 되었다. '아! 성환은 기황후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구나! 그러기에 그는 몽골을 사랑하였구나! 몽골을?' 나는 이렇게 결론을 지었다. * 안타까운 것은 닥터 기의 발병이 하필이면 세 번째 몽골을 다녀와서 였기에 그의 아내는 그가 몽골에서 신장암을 옮아 가지고 왔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뉴욕에서 간호대학을 나왔다고 하는 아내의 생각이 이러하니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닥터 기는 불쌍하게도 몽골에 가서 신장암을 얻어 온 셈이지?" 닥터 기의 숭고한 봉사 정신이 점점 퇴색되고 있었다. 그리고 자칫하다가는 닥터 기의 죽음이 헛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안타까웠다. * 닥터 기의 병세는 악화일로 였다. 신장암은 악성이기에 여기 저기로 퍼지게 되며, 칼슘의 농도도 높아져 심장의 맥박도 불안하여 항암제를 투여하며, 입원도 하였지만 혼수에도 빠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를 넘겨 1996년 봄, 닥터 기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내게 두 가지를 부탁하였다. "석호야! 아무래도 네가 내 대신 몽골에 가서 일 좀 해 줘야겠다. 몽골의 여인을 만나라, 석호야! 그리고 너도 마음을 잡고 이젠 결혼도 해야지. 내가 죽으면 하이디도 힘들텐데, 그녀를 부탁한다. 하이디와 결혼해. 나는 네가 하이디를 사모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 "……" 나는 뜻밖의 부탁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자기의 아내, 하이디와 결혼을 하기를 바란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나 자신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알았기에 내가 그녀를 사모한다고 말을 했는지 나 자신도 놀랐다. 마치 나는 신령한 분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놀란 기분이었다. * 닥터 기의 죽음은 그의 아내 하이디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다. 20여 년간 믿고 살아 온 남편에게 약간의 의심과 불신감이 생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럽게 외과 일을 팽개치고 몽골로 가서 병을 얻어와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야 했는가? 동양 남자들은 다 그런가? 아니 한국 남자들은 다 그런가?' 하는 의구심도 그녀는 가졌다. 검은 상복을 입고 수 많은 한국 사람들과 약간의 미국 사람들과 같이 치룬 장례식도 그녀에게는 씁쓰름할 뿐이었다. 어서 이 지루한 장례식이 끝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남편을 끔찍하게 사랑할 이유가 있었기에 그녀는 이런 생각을 쉽사리 떨쳐 버릴 수는 없었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난 하이디는 잠시 생각할 여유를 찾았다. '시집 식구들과 같이 이곳 뉴 포트에서 같이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뉴욕으로 가 친정 식구들과 살아야 하는가?' 하는 갈등이었다. 수많은 한국 사람들은 닥터 기의 아내가 시집 식구들과 같이 살지 않을 것으로 단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닥터 기만 불쌍해.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고! 동양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미국년들은 남편만 죽어 보라고! 있는 돈 다 빼 가지고 뉴욕으로 가서 옛날에 사귀었던 백인 남자와 결혼하고 살게 뻔 하다고!" * 나는 혹시라도 그녀가 뉴욕으로 가버리지나 않을까, 마음 조리면서 하이디를 만나고 말았다. 그녀는 별로 반가워 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래도 나는 용기를 가지고 그녀를 설득하고자 했다. "하이디씨? 뉴욕으로 가지 마십시오. 가지 말아요. 여기 캘리포니아에서 같이 사는게 좋겠어요." 나는 마치 애기가 엄마를 조르듯이 부탁했다. "그게 무슨 뜻이지요?" "여기 나와 같이 살자고요." 나는 엉뚱하게 말을 하고 말았다. 나의 친구가 내게 부탁한 말이 언뜻 떠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영문도 모르는 하이디에게는 엉뚱한 질문이었기에 그녀는 나를 의아하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닥터 기가 내게 당신을 부탁하며, 결혼을 하라고 했다'고 말을 할까 망설였다. "닥터 강! 한가지 물어 봅시다. 왜? 내 남편이 그렇게 바보처럼 몽골로 갔던 거예요? 혹시라도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녀는 얼굴을 붉히면서 내게 묻고 있었다. "하이디? 잘은 모르나, 혹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추측은 갑니다만!" "추측이라고요? 그렇다면 닥터 강도 모르고 있었단 말이군요. 그렇죠?" "예, 그렇습니다. 언젠가 닥터 기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몽골에 가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고 싶다고!" "예! 아름다운 여인? 그건 또 무슨 말이예요!" 그녀는 불쾌한 듯이 말했다. "예, 아름다운 여인? 기황후를 말입니다." "기황후라고요? 기황후? 무슨 말이요? 닥터 강?" "예, 기황후. 고려의 여인, 기황후 말입니다." "……" * -어리둥절한 하이디에게 나의 추측을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기황후와 몽골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워야만 했다. 몽골 사람들은 비록 고비사막과 알타이산으로 둘러 쌓인 몽골에 살았지만 몇 세기마다 한번씩 세상을 놀라키곤 하였다. B.C. 2세기 경에 몽골의 영웅 묵특 선우장군은 만리장성을 넘어와 한나라를 크게 혼내키고 화친의 조건으로 한나라 고조의 공주를 보내 달라고 하였을 때, 한나라 고조는 공주를 대신하여 아름다운 궁녀, 왕소군을 보냈다고 합니다. A.D. 4세기 경 왕소군의 피를 받은 '야만인 아틸라의 군대는 전 유럽에 침범하여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아틸라가 죽은 후 그들은 몽골로 패주하여 돌아 왔으나, 항가리(마잘족), 핀랜드, 에스토니아에 몽골 사람들을 남겨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13세기를 시작하는 1206년이 왔다. 징기스칸은 몽골의 초원에서 시작되는 켈룰렌 강가에서 칼을 높이 들고 죽은 아버지의 한을 풀겠다고 맹세하였다. 〔"영원 불멸하는 신이여! 금나라 황제는 우리 선조들의 목숨을 빼앗고 우리 민족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만약 하늘이 복수를 허락하신다면 우리들에게 힘을 주소서."〕 라고 외쳤다. 결국 한 세기의 영웅 징기스칸(테무진)은 중국과 만주를 통일하고 그의 손자 쿠빌라이는 중앙 아시아, 동 유럽을 통일하여 '원제국'을 건설하였다. 켈룰렌 강은 북쪽으로 흘러 바이칼 호수로 들어가고 있었다. 바이칼 호수에서 불어오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과 고비사막에서 이글거리는 여름의 더운 바람이 바로 징기스칸을 길러 준 고향이었다. 동방의 나라, 고려 왕국도 원나라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행인지, 불행인지 원나라 사람들은 몽골 사람, 색목인 다음으로 고려 사람을 좋아하였다. 특별히 몽골 사람들은 고려의 처녀들을 좋아하였기에 매년 그들은 고려의 처녀들을 조공으로 바치라고 했다. 고려 말기였다. 몽골의 황제는 몽골의 공주를 고려의 왕비로 만들었다. 충렬왕, 충선왕, 공민왕 등이 바로 그러했다. 공민왕은 '노국 대장 공주'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정신 이상에 걸리기도 하였다. 원나라에서 온 공주가 사는 개경에 고려의 명문, 기씨 가문의 아름다운 처녀가 바로 '기처녀'였다. 기처녀는 원나라의 궁중에 바쳐지는 조공의 처녀로 원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끌려갔다. -〔마치 B.C. 2세기, 한나라의 공주를 대신한 궁녀, 왕소군이 몽골로 잡혀간 것과 같았다. '살아서 고려 땅을 밟지 못하리라'라고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며 원나라의 수도 연경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는 기처녀를 보자마자 좋아하였다. 순제는 어려서 불행한 유년기를 고려의 대청도에서 보냈다고 했다. 귀양으로 온 것이 바로 대청도였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다. 비록 그는 큰 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그의 동생(후에 영제가 됨)을 좋아하였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귀양으로 온 대청도는 황해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었지만 인심이 좋았다. 고려의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기도 했다. 제기 차기, 연 날리기도 해 보았다. 그 뿐인가, 고려의 처녀들과 같이 놀기도 하였다. 댕기를 딴 고려의 처녀들이 그에게는 정말로 예뻣다. 우락부락한 몽골의 처녀들보다 더 좋았다. 고려의 물을 마시며, 조국 몽골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동생이 원나라의 황제가 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그는 불안하였다. 혹시라도 동생(영제)이 자객을 보내어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였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생겼다. 동생인 영제가 북경(연경)에서 죽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연경으로 돌아가 황제가 되었으나, 그의 머리 속에는 댕기를 딴 고려의 처녀들이 눈에 아른거렸으리라. 원나라에 조공으로 받쳐진 기처녀를 보는 순간, 순제는 그녀에게 홀딱 반하고 말았다. 꽃같이 아름다웠으며, 마음도 고왔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같았다. 순제는 마치 옛날 대청도로 되 돌아 간 듯 하였다. '대청도에서 만났던 그 소녀'와 같았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는 어머니를 만났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기처녀를 황후로 맞이하였다. 기처녀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었으니, 고려의 명문 기씨 가문의 세력은 고려 왕도 어쩔 수가 없었다. '기황후는 늘 조국 고려를 그리워하며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고려에 갈 수가 있었다. 고려를 좌지우지하는 종주국 원나라의 황후였으니, 그 누구가 말린단 말인가. 그러나 역사는 거꾸로 돌고 있었다. 원나라는 쇠퇴하여 새로 들어선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패퇴하여 만리장성을 넘고 고비사막을 넘어 외몽골로 쫒겨가고 말았다. 순제는 가엾게도 그곳에서 죽었으며, 북원이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유목민족이 되고 말았다. 기황후는 고려로 돌아 올 수가 없었고, 남편 순제의 뒤를 따라 그곳에서 죽어 카라코름에 묻치지도 못했다고 한다. 주원장에 의해 목베어 죽음을 당하고 북경에 버려졌다고 한다. 그녀는 고려에도, 아니 몽골에도 가지 못하고 원혼이 되어 어디에서인지 울고 있었다고 했다. 역사의 '아이로니'라고 부르자. '고려의 멸망으로 왕(王)씨는 몰락하였으며, 원의 멸망으로 기(奇)씨도 몰락하였다.' 그러나 기씨 가문은 겨우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유학에 전념하였다. 그러기에 나의 친구도 유학자의 명문 가문이었다. 기씨 가문은 역시 전통이 있어 유학자 뿐만 이니라, 기황후같은 미인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의 친구는 머리가 영리하며, 준수하게 생긴 남성이요, 그녀의 동생은 역시 미인이었다는 말이다.〕- 나의 추측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나의 친구, 기성환은 그의 가문을 빛내기도 했으며, 욕을 먹기도 했던 기황후와 그의 동생, 오빠(기철, 기식)을 생각했었다. 그리고 기황후의 후손들인 몽골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 상태를 알고 난 후 그들을 돕고자 했었다고 나는 추측하였다. 몽골 사람은 바로 기황후의 후손이요, 바로 닥터 기의 형제라고 생각을 했다는 말이었다.〕- *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얘기를 들은 그의 아내, 하이디는 믿지 않았다. "그게 언제 일인데, 6-7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야만인 아틸라도 왕소군이 죽은지 600년 후의 일이었으니까요. 항가리의 마잘족도 말입니다. 마잘족, 그들도 역시 몽골 사람이 아닙니까?" "……" 하이디는 지루하다는 듯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달라고 했다. "하이디? 닥터 기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나 같은 사람은 그를 따라 갈 수가 없다고요. 어쨌거나 그는 몽골을 사랑했습니다. 몽골을 위해 목숨을 내 걸고 봉사를 하였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죽은 그의 뜻을 따라야 겠지요. 그의 뜻을?" "……"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유럽 사람들이 동양의 역사를 이해 하기도 힘들었지만 몽골과 한국, 그리고 중국에 대한 이해는 더욱 힘들었다. 그리고 몇 개월 후, 그녀는 집을 정리하고 수 많은 한국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뉴욕으로 훌쩍 떠나 버렸다. '미국년은 동양 남편이 죽으면 모든 것 정리하여 백인 남자하고 재혼하여 산다.' 라는 비난을 들으면서… 뉴욕! 뉴욕! 이곳에도 우리네 한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여기 저기에 있다. 맨하탄, 브롱스, 부르클린, 스테이튼 아일랜드, 퀸즈에 있는 후러싱 한인 타운은 그 규모도 크며, 경제적인 응집력도 꽤나 크기에 한국에서 오는 청치인들은 빠짐없이 이곳을 찾곤했다. 마운트 버논과 용커스는 이곳과는 많이 떨어져 있었으며, 한국 사람들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뉴욕의 외곽에 있는 주거 도시였다. 그러기에 한국 사람들과는 전혀 관계없이 사는 곳이란 말이다. * 나의 사랑하는 친구, 기성환의 아내, 하이디는 그녀의 친정이 있는 마운트 버논으로 딸을 데리고 이사를 왔다. 친정 식구들에게도 남다른 감회가 컸다. 동양 남자를 좋다고 연애를 할 때에는 다소의 마찰이 있었다. 그러나 일단 인정을 하고 나서는 남의 자유 의사를 존중하여 주었기에 그녀가 닥터 기를 따라 버지니아로 따라 갈 때는 격려를 하여 주었으며, 결혼 할 때는 많은 축하를 하여 주었다.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결혼관과는 너무나 차이가 있었다. '같은 민족이 아니면 안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안돼!' 라고 아우성치는 한국인 부모들하고는 차이가 컸다. 그러나 사위가 죽고 나서는 역시 우리들하고는 방식이 달랐다. '한 번 결혼하면 시집의 귀신이 되어야 하느니라. 여자 혼자 살 수는 없다. 그러니 좋은 사람,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결혼하여라.' 라고 말하는 방식이 사뭇 달랐다. 하이디는 몇 차례 고등학교 시절에 알고 있던 옛 친구, 백인 남자와 데이트를 하였다. 그는 몇 년 전 부인과 이혼을 하고는 혼자 살고 있었다. 뉴욕에서 대학을 나와 뉴욕 주 세금 조정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 회계사(CPA)였기에 봉급도 꽤나 되었지만 이혼하면서 준 위자료와 생활비 지급으로 인해 비교적 각박하게 살고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 만나면서 그녀는 그의 본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미국 사람 특유의 경제적인 본성이었다. 하이디가 갖고 있는 재산과 현금에 관심을 갖고 여기 저기에 투자를 하자고 회계사다운 조언을 하였으나, 하이디에게는 공허함 뿐이었다. 닥터 기로부터 받은 돈과 생명보험금이면 그녀의 일생을 사는데 아무런 구애가 없었다. 결국, 옛 친구는 하이디와 섹스나 하고 그녀의 돈이나 같이 공유하자고 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말하는 사랑의 표현이었다. * 결국 하이디가 보낸 뉴욕에서의 3년은 생각 밖으로 우울하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있기를 바랬다. 그리고 생각을 하였다. 어느 날, 그녀에게 문득 떠 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강석호와의 대화였다고 한다. 닥터 기의 선조가 되는 원나라 최후의 황제, 기황후에 대한 나의 설명이었다고 한다. -〔하이디! 당신의 남편인 닥터 기는 결국 그의 선조인 아름다운 여인 '기황후'를 생각했던 겁니다. 기황후를 생각하면서 그는 못사는 나라 몽골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천주교를 전도하고자 했던 것이지요. 그러기에 그는 훌륭한 의사요, 인격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남편에 대해 긍지를 갖어야 합니다.〕- 라고 말해 준 나의 설명이었다. 그녀는 한인들이 모여 사는 퀸즈의 후러싱 한인 타운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한국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의 몽골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녀가 기대했던 천주교 신자들과는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 나름대로 큰 성과였다. -많은 한국 교회 신자들이 주동이 되어 몽골에 가서 의료 선교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닥터 기의 출신 학교인 A의과 대학에서 파견된 교수들이 우란 바톨 친선 병원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저녁 그녀는 많은 생각을 해 보았다. '그렇다. 인생은 길지 않고, 생각보다 험난한 고난의 길이다. 내가 신봉하는 천주교에서도 희생과 봉사를 강조하지 않는가? 나는 그동안 간호사이면서 무엇으로 봉사를 하였던가? 명예와 돈을 모으는데 전념을 하였으며, 남편이 죽은 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기껏 썩어질 나의 육체를 위해 나는 뭇 남성들을 생각하며, 성적 욕구를 채우기만 하였다. 남편은 비록 한국에서 온 동양인으로 이곳 미국에서는 무시를 받고 살았지만 그는 정말 의연하게 남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는 멋진 남자였다.' 그녀는 밤새 번민을 하였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그녀는 멀리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왔다. '남편의 친구, 아니 나를 사모하는 석호씨에게 나의 마음을 털어 놓자!' 전화를 받은 나는 오히려 깜짝 놀랐으며, 오해를 하였다. '아니? 하이디가 나를 좋아하여 이렇게 전화를 걸어 온 것이구나! 그러면 그렇지, 제가 나를 싫어 할 이유가 없지!' 그러나 그녀의 진심을 알고 난 후, 나는 또 한번 놀라고 말았다. "다시 캘리포니아로 되 돌아 가겠습니다. 닥터 강! 그 곳에서 같이 살아요. 같이!" 나는 그녀가 말하는 의미를 혼동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로 와서 나와 결혼하여 같이 살겠다고 하는 말로 들렸으니!' "하이디가 온다! 하이디가." 나는 허공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녀가 오면 나는 그녀와 결혼을 하게 된다.' 나는 나 자신이 한심했었다. 어려서부터 사모해 온 성혜도 가고 이젠 친구의 미망인도 가버렸다고 생각을 하며 단념하였는데, 이제 그녀가 마음을 고쳐 먹고 나를 찾아 온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이 흥분되었다. * 하이디가 뉴욕의 삶을 정리하고 다시 뉴 포트로 이사를 오는데는 6개월 이상이나 걸렸다. 뉴욕의 콜럼비아 대학에 다니는 그녀의 딸, '제인 기'(Jane Kee)의 졸업도 보아야 했으며, 마운트 버논의 집도 정리를 하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녀가 갖고 있는 꽤 많은 금전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닥터 기가 남겨 놓은 재산과 돈이 꽤 되었다는 말이다. 잠시 언급하는 닥터 기의 딸, 제인이었다. -백인인 어머니와 잘 생긴 동양인 닥터 기의 유전인자를 반반씩 나누어 가져서 그런지 아주 예뻣다. 그리고 키도 컷으며, 웃음 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사람마다 '와- 예쁘구나! 예뻐?'라고 감탄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진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 마침내 하이디는 짐을 싸 들고 그녀의 시집이 있는 뉴 포트로 되 돌아 왔을 때, 그녀는 울고 말았다. 2년 전 세상을 떠난 시아버지, 기박사에게 그녀는 너무나도 큰 죄를 지은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아버지는 하이디에게 아주 좋은 분이었다. 비록 인종과 피부 색깔은 달랐으나 이해심이 많았으며, 며느리, 하이디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장례를 지냈을 때, 정작 하이디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아니, 새로 사귄 미국 남자 애인과 향락에 빠지다 보니 참석하지 않았다. 그녀가 찾아 간 곳은 뉴 포트에서 멀지 않은 라구나 언덕에 있는 '포레스트 론'(Forest Lawn) 가톨릭 묘지였다. 그녀는 시아버지의 묘소 앞에 서서 넋을 잃고 있었다. 천주님께 돌아가신 시아버지와 남편에게 지은 죄를 사죄하면서 사죄와 후회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은 남편이 그토록 찾아가곤 했던 몽골을 찾아가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었다. * 내가 하이디를 만난 것은 며칠 후였다. 놀라웠다. 나에게 냉정하게만 대해왔던 그녀가 나를 보자 허깅을 해 주웠다. 웬 일일까? 나는 그녀로부터 욕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통해 그녀의 남편에 대한 과거를 알고 싶어하는 듯 그와는 정 반대였다. 비록 우리는 오렌지 힐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붉은 와인과 왕새우를 먹으며,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몽골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닥터 강? 언젠가 닥터 기의 옛 조상에 대한 얘기가 기억납니까?" "아! 기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그래요. 기황후!" 그녀는 내게 말했다. "닥터 강!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고 있는 몽골의 현실을 아십니까? 누가 그 나라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하고 무서운 민족이었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러기에 근자에 이곳 남가주에 있는 많은 한국 사람들의 교회에서는 다투어 몽골로 선교차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선교사와 의사들이 우란 바톨에 가 있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우리도 한번 가 볼 수 있겠군요? 그리고 나도 꽤 많은 금액의 돈을 그들을 위해 지출 할 준비도 하고 있겠습니다. 닥터 강? 한번 시간을 내 보시겠어요? 나와 같이 몽골로 여행 겸 의료봉사 차 가십시다. 나도 궁굼한게 있습니다. 남편이 가서 도와주고 왔다고 하는 몽골 친선 병원에 한번 가 보고, 그곳에 의료 기구를 기증하고 싶군요." * 나에게도 계산이 있었다. 몽골에 가보고 싶다고 하는 하이디와 같이 여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구혼을 해 보리라고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과연 나의 예상은 맞았다. 내 나이 55살이요, 하이디는 52살이 되었으며, 하이디의 딸, 제인도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직장을 갖게 되었기에 하이디도 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었다. 한가지 놀라운 것은 내 친구의 어머니였다. -사사건건 나에게 제동을 걸었던 그녀도 몇 년 전에 남편, 기박사가 죽고 보니 혼자 살고 있는 며느리가 가여웠다. 과부 사정을 아는 것은 바로 같은 과부이기 때문이었다. 며느리, 하이디가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와 나를 자주 만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괘씸하게 생각을 하였는데, 몇 개월 만에 놀랍게도 그녀는 변하고 있었다. 하이디와 나를 짝지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자기의 딸, 성혜는 안되었지만 혼자 사는 며느리라도 재혼시켜 주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50살이 훌쩍 넘은 나를 볼 때마다 가엾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생긴 변화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역시 마음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이북에서 피난 나온 고아이라고는 하나 나에게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 아니 갖고 싶다. 하이디와, 하이디!' 결국 하이디도 나의 간절한 사랑의 고백을 받아 들이게 되었다. 2001년 3월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이디와 닥터 기의 가정에서는 나에게 강력하게 개종할 것을 요구하였다. "닥터 강!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십시오. 개종을?" "……" 나는 섣불리 대답을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점차 그렇게 하기로 말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다. '몽골을 한번 방문하기로…' 그리고 갖고 있는 많은 돈을 유용하게 쓰기로 하였다. 그것이 바로 우란 바톨에 있는 A의과 대학 친선 병원에 의료기구를 기증하며, 다르 항에 있는 한인 교회에도 헌금하기로 하였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일차로 몽골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몽골을 다녀 온 후, 우리는 날을 잡아 뒤 늦게나마 결혼을 하기로 계획을 잡았다. 그런데, 나로서는 초혼이요, 하이디로서는 재혼이 되는 셈이었다. * 몽골로 가는 계획은 간단하였다. 7월 중에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서울을 거쳐, 아시아나 항공을 이용하여 북경 상공을 지나 만리 장성과 고비사막을 넘으면 되는 것이다. 솔직하게 고백을 하면, 나는 하이디를 사모하며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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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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