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소설 5편 / 글벗동인 제 3집 수록
2024.11.05 15:39
김영강 짧은 소설 (5편)
글벗동인 제 3집 수록
본명 이영강(李鈴江). 경남 마산 출생.
소설집 『가시꽃 향기』 『무지개 사라진 자리』 장편소설 『침묵의 메아리』
글벗동인소설집 『다섯 나무 숲』 등, 7권의 책과 그 외 한국학교 교재 다수 출간.
미주한국일보 소설 신인상, 에피포도문학상 소설 금상, 해외문학상 소설 대상, 고원문학상, 미주가톨릭문학상 수상.
이화여대 남가주동창회보 편집장, 계간미주문학 편집장, 미주가톨릭문학 편집장 역임. 현재 미주한국문인협회, 미주한국소설가협회 회원. kaykim1211@gmail.com
젖은 눈
첫사랑과 구두닦이
삼켜버린 진짜 진주
깜박깜박 가물가물
아버님의 여자
젖은 눈
앗! 갑자기 눈앞에 형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오만상을 찡그리고 곧바로 두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비틀거리다가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확 꺾었지요.
앗! 하는 찰나에 일어난 일입니다. 물론 거기가 낭떠러지인 줄을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요. 젠장, 다른 건 몰라도 운전만은 자신 있었는데…
형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하던 중 일어난 일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형이 어떻게 달리는 내 차 앞에 나타날 수가 있었을까요?
형과 나는 이란성 쌍둥이입니다. 아무리 이란성이라 하더라도 쌍둥이는 쌍둥이인데, 우린 많이 달라요. 얼굴도 다르게 생겼지만 성격도 달라요. 키가 훌쩍 큰 것만 닮았습니다. 형은 어찌나 말랐는지 툭 건드리기만 해도 픽 쓰러질 것같이 비실비실하게 생겼어요. 그리고 나가 놀지를 않고 공부만 들고파며, 시를 쓴답시고 맨날 뭐를 끄적거려요.
결론적으로 말해,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아주 건강하고 형은 아주 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쌍둥이가 이렇게 다르다니? 의사들도 의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형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어요. 특히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늘 숨이 찼어요.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내가 형한테 갈 젖까지 다 뺏어 먹어서 그렇다네요. 어쨌든, 학교 다닐 때도 형의 가방은 노상 내가 들고 다니고, 아주 어릴 적에도 나는 항상 형을 보살폈어요.
말하자면 형은 내가 업어 키운 셈입니다. 걸핏하면 픽 쓰러지는 형놈을 들쳐 업고 병원으로 달리기를 밥 먹듯 했다니까요. 그땐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만 알았지요.
엄마는 형만 위했어요. 나를 형의 종처럼 부려먹었지요.
먹는 것도요. 맛있는 반찬은 형만 따로 해줬어요. 형은 입이 워낙 짧아서, 도대체 먹지를 않아 엄마가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릅니다. 아무 거나 맛있게 잘 먹는 나와는 생판 달랐어요.
부모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게 얼마나 서럽고 더럽고 억울한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겁니다. 알 수가 없지요.
게다가 형놈 병치레로 집안 살림 거덜 나, 점점 살기 어려워지고…
어쩔 수가 없어… 내 입 하나라도 덜어야겠다 싶어서 나는 그만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어요. 집 나오는 날, 공교롭게도 비가 주룩주룩 내렸는데… 나를 바라보던 형의 젖은 눈을 잊을 수가 없네요. 축축하게 젖은 눈…….
혼자 힘으로 고학까지 하려니 사는 게 참 힘들었어요. 지방대학을 근 10년 만에 졸업을 했으니까요.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그 중간에 군대까지 갔다 왔으니, 가족과는 몸도 마음도 아주 멀어져 있었지요. 그러한 상황이 저는 도리어 편했어요. 가슴 속에 얹혀 있던 돌멩이 하나가 쑥 빠져나간 듯해 속이 후련하기까지 했으니까요.
그리고 사회인으로 첫발을 디딘 곳이 생활용품 영업직이었어요. 하나라도 더 소매상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내 임무이니, 거의 하루 종일 운전을 하면서 참 열심히 뛰었습니다. 돈과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요.
계속 자동차 몰고 동서남북으로 다니자니 힘은 듭디다. 동가식서가숙 떠돌이 삶이니… 이게 말하자면 현대판 장돌뱅이올시다. 하지만, 여기저기 구경 원 없이 하고 다양한 사람들 만나니 꼭 나쁘지만은 않았고 배우는 것도 참 많았어요.
그런데 가족이란 관계가 참으로 묘하데요. 아버지가 수소문하셔서 저를 찾아오셨지 뭡니까? 하지만 제 본심은 그냥 데면데면했습니다. 아버지도 아무 말씀 없으시데요. 눈물을 한 방울 떨어트리신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치는 않네요. 워낙 오래 전 일이라서…
얼마나 지났을까요? 멀리서 앰뷸런스의 사이렌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어요.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것 같았어요. 이렇게 숲속 깊은 곳에 처박혀 있어도 발견이 되었나 봐요.
아, 참. 형이 보았었지. 그가 신고를 했나? 분명히 형이 쓰러지는 걸 보았는데, 그럼 잠깐 쓰러졌다가 정신이 돌아온 모양인가? 하지만 이제는 다 소용 없는 일, 난 이미 끝났어요.
눈은 떴는데 앞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훤한 대낮인데도 완전 캄캄해요. 아무 것도 안 보여요.
아! 내 눈! 내 눈……
그리고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죽은 건가요? 내가 죽다니, 왜 내가 죽어야 하죠? 그러니까 형놈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었네요. 아, 억울합니다! 억울해요. 너무 너무 억울해요.
아마도 내 심장은 분명히 형한테 이식이 될 거예요. 오래 전에 장기이식에 동의를 했고, 운전면허증에도 그 사실이 적혀 있으니까요.
제발 부탁합니다, 제발! 제발…!
뇌사에 들어가더라도 좀 기다려줘요. 내 심장 미리 떼내지 마세요. 의식이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런 건 가족이 결정할 문제라구요? 아녜요. 아녜요. 엄마 아버지는 내 심장을 바로 형한테 이식하려고, 호흡기를 당장 떼라고 할 겁니다. 안 돼요. 안 돼. 좀 기다려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형놈이 사실은 내 덕분에 살았다구요. 내가 콩팥을 이식해 줬거든요. 어쩝니까, 당장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판인데… 아무튼 살려놓고 봐야할 상황이니… 콩팥 아니라 뭐라도 떼 줘야죠. 부모님도 그걸 바라시고…
이러다가는 내 장기를 모두 내줘야하는 판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짜증도 나고 더럭 겁도 나고… 내가 뭐 형의 장기 임시보관소도 아니고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불쌍한 형은 늘 죽음과 함께 살아온 셈입니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 서서 아슬아슬… 그 곁에 늘 내가 있었고…
이왕에 주는 거 기분 좋게 줬으면 좋았을 걸… 마지못해, 심통을 있는 대로 부려댔으니… 그러니 받는 사람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그걸 바라보며 못 본 척 해야 하는 부모님의 심정은 또 어땠겠어요.
한데, 콩팥 하나 떼 주고도 나는 건강했어요. 이상할 정도로요. 하나 있는 신장이 두 개 역할을 한다고 그랬는데, 진짜 그런가 봐요.
그런데 이제는 심장까지 떼 주게 생겼어요. 내가 형의 장기 임시보관소가 된 게 틀림없네요. 젠장!
어! 근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서울대학병원에서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형이 죽었어요. 나도 죽고, 형도 죽고? 그러니까 형이 죽으면서 나까지 끌고 간 것이 분명합니다. 동시에 태어났다고 해서 동시에 죽어야 한다는 법은 없잖습니까?
형, 왜 그래? 살아서도 그렇게 날 힘들게 하더니 죽어서까지도 날 괴롭히고 싶어?
“따라오지 마. 따라오지 말라니까! 돌아가. 돌아가. 돌아가라구우우---”
앞서가는 형이 계속 소리를 지릅니다.
“나는 이왕 죽을 몸이었어. 지금 말이야. 내 몸에 암이 다 퍼졌어. 장기가 하나도 쓸모없이 돼버렸지만, 다행이 눈은 살아 있어. 내 눈 가지고 밝은 세상 보면서 너는 더 살아야 돼.”
뭐 암이 다 퍼졌다고? 나는 몰랐던 사실입니다.
“걱정할까 봐 너한테는 말 안 했으나, 그간 내가 많이 아팠어. 내 죽음은 당연지사야. 살아봤자 남한테 짐만 되고, 더구나 고통을 벗어나고 보니 난 지금 더없이 행복해. 나는 정말 이제부터 살판났어.”
약하디 약한 형한테서 어디서 그런 우렁찬 목소리가 나오는지 신기했어요.
“너도 이제부터는 살판나게 살아. 새 눈으로 밝은 세상 보며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부모님께도 내가 살판나서 좋아한다고 전하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너는 꼭 살아서 돌아가야 해.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만 하셨는데, 네가 잘해 드려. 너만 믿는다.”
순간 형이 비틀거려 쫓아가서 부축을 하려니 나를 확 밀어내며 패대기를 쳤습니다. 놀랍도록 강한 힘이었어요.
그리고 형은 따라오지 말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너무 심하게 바닥에 내팽개쳐져 일어설 수가 없어 나는 한참을 널브러져 있었어요. 이제는 더 속도를 내며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형의 뒷모습을 누운 채 바라보는데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형,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앰뷸런스 울부짖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네요. 왱 왱 우앵 우앵 우애앵 우우애애앵…
아, 환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형의 눈이라 그런지, 어딘가 다르네요!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뭐랄까, 안 보이던 것이 보이는 것 같고… 세상이 맑고 투명해 보인다고 할까요. 결국 이렇게 형과 나는 하나가 된 셈이죠. 쌍둥이로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지요.
형의 유품을 정리하다 보니 내게 보내는 수제(手製) 시집이 나왔습니다. 손으로 정성껏 또박또박 쓰고 그림까지 직접 그려 넣었네요. 이런 정성을 여자한테 쏟았으면 장가 몇 번 가고도 남았을 텐데…
읽어보기도 전에 눈물부터 납니다. 속표지에 이렇게 씌어 있어요.
미안하다, 고맙다, 사랑한다.
정말 미안하다, 정말 고맙다, 정말 사랑한다.
흔해빠진 신파조인데도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몸은 내가 튼튼하다고 우쭐댔지만, 진짜 중요한 정신은 형이 나보다 한결 건강했던 겁니다. 저는 그런 하느님의 섭리를 모르고 건방을 떨며 살았던 거죠. 왜 사는 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사람의 목숨이나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것, 사람이 이러구저러구 할 일이 아니라는 것…
지금 저는 형의 산소를 향하고 있습니다. 초록의 이파리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산과 들에는 오곡백화가 만발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온갖 것이 다 아름답습니다.
형이 내게 주고 간 사랑의 빛이 온 세상을 밝히고 있기에……. <끝>
첫사랑과 구두닦이
무심코 텔레비전을 켰는데, 그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름도 언급이 되었다. 30여 년 전, 그렇게도 애타게 사랑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정희는 눈과 귀를 의심했으나 분명히 그였다. 잠깐 동안이었는데도 그 화면이 정희에게 잡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이리도 담담하지? 약간의 놀라움은 있었으나 금세 입가에 미소가 일며 그냥 모르는 아저씨를 대하는 것 같았다.
이곳 로스앤젤레스에서 방영되는 한국 채널에서다. 그가 무슨 기업공로상을 받아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중이었다. 옛날에도 겉늙어 보여 대학생 같지가 않고 아저씨 같았는데, 50줄에 들어선 얼굴 역시 나이보다는 늙어 보였다. 그는 한국 재계에서 손꼽히는 유명인사였다.
그렇지, 그동안에 그의 소식은 까맣게 모르고 살았으나, 워낙에 야망과 포부가 컸으니 성공가도를 달렸겠지? 그가 떠난 것도 내 그릇이 작아서인지도 모르고···
그때, 불현듯 구두닦이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음은 어인 일이었을까?
어느 날, 그들은 교외선을 타고 야외로 나갔다. 그 당시에 관광지로 널리 알려진 송추라는 곳이었다. 가을의 끝자락이라 시즌이 지난 탓인지 관광객이 별로 없어 주위는 한적하고 쓸쓸했다.
점심때가 되어 둘은 식당엘 들어갔다. 식당이라는 이름만 붙었지, 그냥 시골집이었다. 밥을 먹고 나오니 마루 밑에 놓인 그의 구두가 유난히도 반짝거렸다.
그리고 열 서너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마당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누가 구두 닦으라고 그랬지? 나는 구두 닦으란 말 안 했는데?”
소년은 무안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의 눈치만 살폈다. 그는 구두끈을 천천히 매고 일어서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구두 닦으라는 말 안 했는데 네가 그냥 닦아놨으니, 돈 안 줘도 되지?”
정희는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로 돈을 안 주고 그 집을 나서는 것이 아닌가? 뒤통수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그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대학생인데도 불구하고 구두도 옷도 항상 브랜드 네임만 찾는 남자가···
구두닦이 소년이 울상을 하고 바라보는 순간, 그녀는 무슨 큰 죄나 지은 듯 가슴이 철커덩하고 내려앉았다. 그를 따라 나가면서 얼른 지폐 한 장을 소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한참을 걷다가 그가 말했다.
“돈을 안 주고 왔더니 기분이 찜찜한데···”.
그럼 도로 가서 주면 되잖아요? 이렇게 톡 쏘아붙일 걸, 정희는 그가 무안해 할까봐 도리어 신경을 쓰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줬어요.”
그는 아무런 대꾸도 안 했다. 그녀는 자신까지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몹시 불쾌했다.
그날 밤, 정희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느 때 같았으면 그날로 바로 빠이빠이를 해버렸을 터인데도 그녀의 의지가 말을 듣지 않아 그들은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인연의 끈을 슬슬 늦추던 그가 결국에는 그 끈을 스르르 놓아버린 것이다. 만나기로 한 날,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겨울밤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천리길인양 아득했고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려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겨웠다.
그의 마음을 이미 다 읽었건만 정희의 심장은 머리를 비웃으며 수없이 덜컥거렸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철렁철렁 내려앉았고 수화기를 드는 손이 떨렸다. 상대방이 ‘여보세요.’ 하기까지의 순간은 숨쉬기도 힘들었다.
길을 가다가도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그가 즐겨 입던 국방색 바지자락만 보아도 눈물이 났고 키 큰 남자의 뒷모습만 보아도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그녀는 혼자 쥐고 있던 인연의 끈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에서는 ‘잊었다, 잊었다.’ 하고 되뇌면서도 가슴에서는 그가 살아 있었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시려왔다.
그가 약속을 어기고 연락이 없었으면 그리도 애타게 기다리지만 말고, 그녀가 먼저 전화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이미 돌아서버린 그였기에 정희는 더 이상 비참해지기가 싫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했건만 그들은 잘 있어라, 잘 가라,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소식이 끊어졌다.
30여 년 전, 대학시절의 이야기··· 이제는 빛바랜 소설책의 한 구절이 되어 모두 다 아름다움과 감사로 승화했다. 그가 떠난 것까지도······.
소년도 지금은 마흔쯤의 중년이 됐을 것이다. 갑자기 궁금증이 밀어닥친다.
그동안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공무원이 되었을까? 아니면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을까? 어려운 환경 속에서 혹시 나쁜 길로 빠졌으면 어떡하지? 절대 그럴 리는 없어. 분명, 어디에선가 행복하게 잘살고 있을 거야.
착한 아내와 아이가 한 둘쯤 딸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으면 더없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텔레비전에서 그를 본 탓인지 자꾸만 그가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정말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갑작스럽게 그와의 추억들이 심심찮게 떠오른다. 하얀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며 정희의 가슴속으로 밀려든다.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 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그랬다. 그는 노래를 참 잘 불렀다. 그의 노래 소리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온다. 노랫소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그때 그녀는 “어머나 어쩜, 가수보다도 노랠 더 잘 불러요.” 하고 그의 팔에 매달리며 마냥 행복해 했었다. 바닷가를 거니는 연인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다 하여도···.
신문을 들척이다가도 경제면은 제목도 안 보고 넘겨버리기가 일쑤였는데, 혹시나 그의 기사가 있나 하고 눈여겨보게 되는 요즘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커다란 그의 얼굴이 정희를 보고 씽긋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무슨 상을 또 받았나?
그러나 아니었다. 그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기업인 미래건설 총수의 사위라는 점인데, 작년에 장인이 죽은 후, 경영권을 둘러싼 처남들과의 분쟁이 고소 사건으로 번져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재판 도중에 죽은 것이다. 그가 장인과 함께 한국의 경제계를 위해 이루어 놓은 업적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단한 야망의 소유자에 능력 또한 탁월했다.
유족에는 아내 이름만 달랑 나와 있었다.
세월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구두닦이 소년과 정희는 분명히 한배를 타고 있었다. 풍랑을 만나 고전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잔잔한 바다 위에서 순탄한 항해를 지속하고 있다.
그 풍랑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었다는 옛 이야기를 하면서······. <끛>
삼켜버린 진짜 진주
수술이 끝난 다음 날이었다. 얼마나 낮잠을 잤는지 눈을 뜨니 벽시계는 벌써 오후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내 병실을 지키던 마누라는 집엘 다니러 간 모양인지 보이지를 않았다.
김 노인은 다시 한 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랫도리가 묵직한 것이 오줌이 시원스럽게 나오지 않고 자꾸 찌릿찌릿해 무슨 큰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고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다행히 큰 병은 아니어서 비대해진 전립선을 특수 시술로 축소시키고 방광에 숨어 있는 결석을 제거하는 정도로 수술은 끝이 났다.
낮잠은 잘 잤으나 통증은 여전했다. 입안도 텁텁하고 목도 말랐다. 일어나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납작한 플라스틱 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안엔 제법 큼지막한 알약 한 알이 담겨져 있었다. 보통 콩알보다는 훨씬 큰 것이 강낭콩만 했다. 아침나절에 부탁한 진통제임에 틀림없었다.
엄살이 심하고 참을성도 없는 김 노인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마누라이기에 우선 한 알만 부탁한 것 같았다. 간호사가 약을 들고 들어왔다가 김 노인이 잠이 깊이 들어 그냥 놓고 나간 것이 분명했다.
무슨 놈의 약이 꼭 진주처럼 생겼다. 우유처럼 뽀얀 빛깔에 노리끼리하면서도 푸르스름한 기가 약간 돌면서 반질반질 윤기가 났다. 보통 약처럼 그 모양이 정해진 규격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동글납작하면서도 겉면이 파도가 이는 듯 약간 웨이브가 졌다. 광채까지 띤 그 빛깔이 영락없는 천연진주였다.
마누라가 보았더라면 반지를 해 끼겠다고 했을 것이다. 마누라가 보석 중에서도 유난히 진주를 좋아해 김 노인도 진주를 보는 눈에는 일가견이 있다. 마누라한테 약을 보여주고 싶었으나 통증이 계속돼 그냥 먹어버리기로 작정을 했다.
물로 삼키려고 하다가 그냥 삼키기엔 좀 큰 것 같아 깨물어 보았다. 어찌나 딱딱한지 쉽게 깨물어지지가 않았다. 씁쓸하지도 않고 시큼하지도 않고, 약이라고 느껴지는 아무런 맛이 없었다. 혀끝에 닿는 감촉이 진짜 진주같이 매끈매끈했다. 혀로 슬슬 굴려가며 이빨로 계속 깨물었더니 드디어 동강이가 났다.
그리고 꿀꺽꿀꺽 물을 들이켜고 입가심을 했다. 약을 먹고 나니 통증이 금세 가라앉아 기분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다. 생긴 모양도 희한하더니 정말 희한하게 잘 듣는 약이었다. 김 노인을 위해 특별히 조제된 약 같았다.
얼마 후, 담당 간호사 샌디가 닥터 챙과 함께 들어왔다. 의사나 간호사나 그 상큼한 젊음이 언제 봐도 기분이 좋아 김 노인의 입가엔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더구나 닥터 챙에게는 같은 동양인이라 그런지 더 친근감이 간다. 닥터 챙도 김 노인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어 말이 안 통해도 마음은 통했다.
점검을 끝내고 병실 문을 나갔던 샌디가 금세 도로 들어왔다. 그리고 물 컵 옆에 놓인 빈 플라스틱 통을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그것을 손에 들고 김 노인에게 내밀면서 뭐라고 뭐라고 중얼거렸다.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눈짐작을 해보니 그 약을 잘 먹었느냐고 묻는 것이 틀림없었다. 김 노인은 잘 먹었다고 고개를 끄덕거렸으나 샌디는 알아듣지 못하고 계속 물었다. 나중엔 김 노인이 입을 아-- 벌리고 손가락으로 입속을 가리키며 물까지 마셔대면서 온몸으로 설명을 했다. 그제야 알아들은 듯했다.
그녀는 놀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오 노오”를 연발하더니 병실 밖으로 튀어나가버렸다.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세차게 흔드는 모습이 긴박한 상황에 처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몹시 당황한 태도였다. 뭔가 잘못된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것이 약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대충 짐작을 했다. 아니 약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어찌된 까닭인지 한국말로 술술 물어보면 속이 확 뚫릴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 병원에는 한국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미국에 온 다음부터 그들 부부의 보호자가 된 딸은 항상 미국 병원만을 고집했다. 어쩌다 혼기를 놓쳐 이제는 나이가 마흔에 가까웠다. 공부 때문이었다는 핑계를 대지만, 지금은 공부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결혼은 뒷전이다. 이제는 일에 미쳐 있다.
아들들은 결혼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다 잘 살고 있는데 하필이면 하나뿐인 딸년이 결혼을 않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들만 줄줄이 낳다가 만년에 얻은 참말로 귀한 딸인데 말이다. 그들의 소망은 오직 딸이 하루빨리 좋은 배필을 만나 결혼하는 것뿐이다.
처음엔 한국 남자만을 고집했으나 이제는 사람만 괜찮으면 백인도 마다 않는다. 닥터 챙 같은 중국 남자라도 좋을 것 같다. 사실 김 노인은 혼자 은근히 닥터 챙을 사윗감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
영어 잘하는 딸은 퇴근 후에야 병원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도 마누라는 영어를 쬐끔은 알아듣는다. 눈치도 빨라 어림짐작으로 때려잡아도 잘 맞추는 편이고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자기 의사도 다 표현을 하는 지라 김 노인은 마누라만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전화를 걸어도 응답이 없어 더 답답했다.
간호사의 행동거지로 봐, 그게 약이 아닌 것은 분명했고 또 먹어서도 안 될 것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걸 먹은 후에 통증이 씻은 듯이 가라앉질 않았는가?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기다리던 마누라가 드디어 나타났다. 뭐이 그리 좋은지 핼쭉핼쭉 웃으면서 병실을 들어서는데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답답했던 가슴이 봄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렸다. 길을 잃고 헤매다가 엄마를 만난 듯이 든든했다. 입이 저절로 헤에 벌어졌다. 어깨 너머 창문으로부터 햇살을 받고 서 있는 마누라가 오늘 따라 유난히 젊어 보이고 또 예뻐 보인다. 그들은 둘 다 칠십 고개를 넘었으나 평생을 금실 좋게 살고 있는 잉꼬부부다.
오줌이 시원스럽게 나오지 않고 아랫도리가 자꾸만 찌릿찌릿해 하루는 마누라한테 하소연을 했더니 그녀의 반응이 걸작이었다.
“영감탱이가 주책없이 어디 가서 못된 병에 걸려 가지고 온 거 아녜요? 설마 나한테 옮겨준 건 아니겠죠?”
그러나 그녀는 말과는 달리 호호 웃고 있었다.
마누라한테 진주처럼 생긴 그 약에 관해 자초지종 설명을 했다. 그녀도 고개를 갸웃둥거리면서 어쨌든 샌디한테 물어보자고 했다. 영어가 잘 통하지도 않을 텐데 활달한 그녀는 어느새 쪼르르 병실을 나서고 있었다.
한참 만에 돌아온 그녀는 배꼽을 잡고 깔깔대며 웃느라고 정신을 못 차렸다.
“당신 말대로 그게 진주는 진주였다고요. 당신이 몸속에 품고 몇 십 년을 길렀으니 어디 조개가 기른 진주에 비하겠어요? 그냥 뒀더라면 기념으로 반지나 해서 낄 걸, 먹긴 왜 먹어치워요?”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는 마누라에 비해 김 노인은 그렇지가 못한 편이라 얼른 감이 안 잡혔다.
집어삼킨 알약이 몸속에서 기른 진주라니···
“아이구 답답해. 그래도 모르겠우? 그게 바로 이번 수술에서 끄집어낸 돌맹이었다구요. 여기서 꺼낸 돌맹이요.”
마누라는 자기의 아랫배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그제서야 감이 잡혔다. 동시에 김 노인의 입에서 튕겨나온 한마디.
“뭐야? 그 약이 밑에서 꺼낸 그거라고?”
“그래요. 밑에서 꺼낸 그거였다고요 그런데 밑에서 꺼낸 그거를 당신이 위로 도로 먹었었다고요. 한데 좀 찝찔하지 않았어요? 그야 아주 맹탕보다는 맛이 좀 나았겠지만요. 호호호.”
‘밑에서 꺼낸 그거’ 라는 말에 잔뜩 힘을 주면서 마누라는 계속 웃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그 알약은 김 노인의 몸속에서 진주처럼 자라다가 이번 수술로 인해 바깥세상 구경을 한 바로 방광결석이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파도에 씻기고 씻겨 반들반들 잘 다듬어져 바야흐로 요도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던 중이었다. 까딱 잘못했으면 세월 따라 좁아진 통로가 아예 막힐 뻔까지 한 것이다.
간호사는 자기가 보아도 그것이 보통 결석과는 달리 특이하게 생겼고 또 진주처럼 아름다워 원한다면 집에 가져가라고 병실에 놓고 나간 것이라 했다. 병원의 규칙에도 본인에게 주어도 좋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약으로 오해하고 먹어버리리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못 했다는 것이다.
“한데, 어쩌자고 아래에서 꺼낸 걸 위로 도로 먹어요? 몇 십 년을 품고 기른 것이라 아까워서 그랬어요?”
한데 그놈을 도로 먹었으니 일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오줌길을 아주 막아버리면 큰일 아닌가? 이빨로 동강이를 내서 삼켰으니 그것이 계속 자라 이제는 한 개의 진주가 아닌 여러 개의 진주가 될 테니 더 큰일 아닌가?
유머 감각이 뛰어난 마누라는 계속 웃기는 소리를 하다가 갑자기 철학자나 된 듯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걸 먹고 나니까 금세 통증이 멎었다고 했죠? 그럴 수 있죠. 세상살이가 다 그런 거 아녜요? 약이라 생각하면 약이 되고, 독이라 생각하면 독이 되고···,”
그날 저녁, 병원에 들른 딸은 그냥 웃고 넘기라는 아버지의 말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 노인은 그놈을 먹은 것은 순전히 자기 잘못이고 또 창피한 노릇이니 제발 암말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나 딸은 닥터 챙에게 따졌다.
영어도 모르는 노인환자의 병실에 그런 것을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놓고 나간 자체가 병원 측의 책임이고, 또 먹어도 괜찮은 것이기에 천만다행이었지만 먹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면 어떡할 뻔했냐는 것이다. 닥터 챙은 모든 것이 자기 불찰이었다고 정중히 사과를 했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딸은 닥터 챙과 결혼을 했다. 딸한테는 물론 마누라한테도 내색을 않고 혼자 상상하던 일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딸한테 이런 좋은 일이 생긴다면야, 김 노인은 그 결석을 몸속에 다시 품어 이번에는 진짜 진주로 키우고 싶은 심정이다.
하나가 아닌 여러 개의 천연진주로. <끝>
가물가물 깜빡깜빡
“이혼이야 이혼-- 이번에 못 찾으면 이혼이야--. 진짜로 이혼한다고오--”
남편의 언성이 높아졌다.
뭐? 열쇠 잃어버렸다고 이혼을 해? 70이 넘은 나이에? 그깟 일로 이혼했다면 벌써 골백번은 갈라섰겠다.
“언제 외출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열쇠 없어진 지가 오래됐다는 얘기 아냐? 한번 두번도 아니고 벌써 몇 번째야? 어디 열쇠뿐이야. 선글라스도 다 잃어버렸잖아?”
언성은 자꾸 높아지고 눈은 아예 모로 섰다. 입을 꾹 다물고 있자니, 경자 속은 계속 부글부글 끓는다.
“또 냄비란 냄비는 다 태워 먹었잖아? 여자가 왜 그래? 그러다가 언젠가는 집까지 홀랑 태워먹을 게 뻔하다. 뻔해.”
주제가 열쇠면 그 얘기 하나로 끝내야지 왜 이런저런 다른 일까지 들추어내면서 마누라 속을 긁어? 쪼잖케시리게···.
화-악--! 한 번 뒤엎어버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쨌든 원인 제공자는 자신이 아닌가?
“이젠 정말 나도 지겹다 지겨워. 맨날 따라다니며 챙겨줘야 하니 나도 지쳤다고. 다른 집은 남편 치다꺼리를 와이프가 해준다는데 우리 집은 완전 거꾸로 됐다고.”
언제는 따라다니며 챙겨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살랑거리더니, 이젠 맘이 변했다 그거지? 그렇지만 지금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경자라 목구멍으로 말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대로 가물가물 깜빡깜빡이 한번 두번이 아니니 화를 낼 만은 하다. 자기는 그런 일이 아직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여튼, 열쇠뿐만이 아니라 안경, 골프채 휴대폰 등등, 본인 물건 챙기는 데에는 아주 철저한 남편이다.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땐, 고마운 일이기도 하련만, 경자는 그렇지가 않다. 얄밉다.
그녀는 열쇠를 찾는 척하며 서재로 슬쩍 피했다. 다행히 남편이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다. 길길이 뛴다고 발 달린 열쇠가 놀라 튀어나올 리 만무이고, 이왕지사 일은 벌어졌는데, 좀 점잖고 존경스런 남편 노릇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컴퓨터를 켜놓고 우두커니 앉았는데 문 닫는 소리가 쾅! 하고 들렸다. 얼른 창가로 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자동차를 타자마자 그는 급하게 시동을 걸었다. 보통 때보다는 더 큰 소리가 부르릉거렸다.
경자도 요즘, 기억력이 뚝 떨어진 것을 실감한다. 가물가물 깜빡깜빡 가물가물…
외출을 하려고 여기저기 열쇠를 찾다보면 가방을 든 손가락에 키가 걸려 있질 않나, 어느 땐 약도 안 먹고 핸드폰도 두고 나와 도로 집엘 들어가서 일단 약 먼저 먹고, 핸드폰 찾느라 또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럴 땐 전화를 걸어보는 수밖에. 이제는 귀도 갔는지 소리는 들리는데 어디서 들리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어 이방 저방을 헤맨다. 그러다가 찾고 나면 이젠 또… 손에 들고 있던 열쇠가 없다.
어디 그뿐이랴? 식당에서 나와서도 맡겨놓은 키를 찾느라 가방을 뒤지지를 않나. 키뿐이 아니다. 안경이 한두 개가 아닌데 다 어딜 갔지? 하고 집안 구석구석을 헤매다보면 안경은 벌써 귀에 걸려 있다.
한 번은 텔레비전 리모컨트롤을 전화기 받침대에 꽂으면서 이게 왜 맞지가 않아? 하다가 폭소를 터뜨린 적도 있다.
친구들이 모여 이게 치매니? 건망증이니? 하고 쏟아놓는 이야기들에 비하면 경자는 그리 중증은 아니었다. 별 희한한 일들이 많아 배꼽을 잡고 웃다가 결론은 다 건망증 쪽으로 나기 마련이다.
어느 친구는 시장을 잔뜩 봐놓고 카트는 마켓 바닥에 놔둔 채, 달랑달랑 빈손으로 집으로 왔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저녁을 먹으려고 냉장고 문을 여니,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냉장고가 텅텅 비어 있더라는 것이다. 그때야, 아차 하고 부랴부랴 마켓으로 도루 갔다니…….
열쇠를 어디다 놓았는지를 몰라 찾아 헤매면 그건 건망증이고, 열쇠를 손에 쥐고 이게 뭐하는 물건이지? 하고 요리조리 살피면 그건 치매란다.
경자는 본격적으로 열쇠 찾는 작업에 들어갔다.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옷들을 착착 걸고 시트까지 들춰보았다. 누구는 냉장고에서 전화기를 찾았다기에 냉장고 안도 들여다보았다. 재킷 등, 바지 호주머니까지도 다 뒤져보았다. 심지어 휴지통까지 쏟아보았으나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방, 거실 부엌 할 것 없이 구석구석 보고 또 보았다. 보통 때는 들지 않는 핸드백까지 백이란 백은 다 뒤져보았다.
현관에 있는 장식장 거울 앞이 열쇠 놓는 자리다. 거기에 없으면 핸드백 안에 있거나 어디에 있거나 두루두루 찾으면 별 탈 없이 찾곤 했는데 이번에는 아무리 뒤져도 오리무중이다. 열쇠가 한두 개가 아니고 한 뭉텅이가 달렸으니 어디 사이에 끼일 리도 없다.
경자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어, 혹시 남편 열쇠를 놓아두는 곳에 두었나 하고 안방 침대 왼쪽 스탠드 아래까지도 살펴보았다. 밖에서 잃어버렸을까도 생각해 봤으나 그건 절대 아니었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남편이 주로 운전을 했고, 요즘은 혼자 나간 적이 거의 없어 언제 열쇠를 사용했는지조차도 가물가물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거꾸로 쳐 올라가봤다. 그래도 감감했다.
열쇠를 새로 만들려면 돈이 300달러가 넘게 든다. 남편한테 욕먹는 것보다 돈 들어가는 것이 더 속상하다. 보나마나 남편은 지금 열쇠 만들러 간 게 분명하다. 예전에도 그랬다. 며칠을 참지 못하고 후다닥 튀어나가 열쇠를 주문했었다. 그런데 만든 지 사흘 만에 찾았다. 아깝게 돈만 날려버려, 왜 저렇게 남자가 참을성이 없을까 하고 돌아서서 쭝얼거렸다.
해가 서산에 걸렸는데도 남편에게서는 소식이 없다. 슬슬 걱정이 되었다,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니겠지? 아니아니 절대 그럴 리는 없어! 화가 나서 나갔는데 또 혹시, 교통사고라도 난 게 아닌가 하고 몹시 불안했다. 별의별 상상이 머리를 자꾸 어지럽혔다.
드디어 남편의 차 소리가 났다.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후닥닥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눌렀다.
금세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야 할 그가 소식이 없어 내다보니, 옆문을 열고 뒤뜰로 가서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갖 잡동사니 연장들을 보관하고, 페인트를 칠하거나 지붕에 올라가야 할 일이 있을 때 입는 작업복들을 걸어두는 곳이다.
한참이 지난 후에 남편이 경자 앞에 나타났다. 한데 뜻밖에도 잃어버렸던 열쇠 뭉치를 들고 있지 않는가? 얼른 열쇠를 뺏어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아니···. 이거 내 키잖아? 어디서 찾았어요?”
남편의 입에서 금세 한 옥타브 올라간 소리가 나올 것 같아 단단히 각오를 했다. 한데 그의 자세가 왠지 엉거주춤하고, 표정 역시 어설펐다. 게다가 말도 더듬거렸다.
“며칠 전에 내가 당신 키로 옆문을 열고 들어가 창고 정리를 했거든··· 근데 말야··· 그러니까··· 그때 입고 있던 작업복 바지 주머니에 키를 넣어놨나 봐. 그리고는 그만 깜빡했네.”
세상에··· 이럴 수가? 자기가 깜빡해 놓고 나한테 뒤집어씌워?
순간, 경자 입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따발총처럼 튀어나와야 마땅하다.
뭐라고? 깜빡했어? 그래 놓고 뭐? 나한테 이혼하자고? 당신 혹시 치매 걸린 거 아냐? 맞네. 맞아. 완전 치매네 치매. 내일 당장 병원에 가보라구우우우---
이렇게 소릴 지르며 이혼’을 ’치매‘로 복수작전 개시를 해야만 했다.
아침에 이혼이란 두 글자를 입에 담으며 소리를 지른 그와 똑같이···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상하게 마음이 지극히 잔잔했다. 남편이 집에 무사히 돌아온 것만도 감사했다. 뭐랄까, 동지가 생긴 것 같은 야릇한 위로감이 들었다. 그리고 시 구절이 하나 떠올랐다.
가물가물 깜빡깜빡 속상한 그 심정
이제는 아시려나
같이 늙어가는 사람아 <끝>
아버님의 여자
오늘이 아버님 장례식 날이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민지는 몸도 마음도 천근만근이다. 가슴 한복판에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얹혀 있는 것 같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법적으로 어엿한 아버님의 부인인 여자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
민지의 남편은 그녀가 아버지와 함께 산 세월이 근 20년이니 부인으로 예우를 해주어야 한다고 조심스레 주장했다. 하지만, 시누이 셋은 반대를 했다. 큰시누는 팔팔 뛰면서 완강히 반대했다. 부고에 이름도 넣지 말아야 하고 장례식에서도 절대로 부인 예우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우겨댔다. 입관식, 장례식 순서지에도 이름을 빼라고 했다.
민지는 안다. 왜 저렇게 방방 뛰는 건지··· 아버님의 재혼 당시, 그리고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도, 큰시누는 아버님 재혼 사실을 비밀에 붙여야 한다고 당부를 했으니까. 그래서 모두들 쉬쉬했다.
아버님의 부인데도 불구하고, 그분은 가족 누구로부터도 ‘어머니’라고 불리운 적이 없다. 아이들이 할머니라고 부르니 모두들 ‘할머니’라고 불렀다, 아들도 며느리인 민지도, 딸들도 사위들도, 심지어 남편인 아버님까지도 그렇게 불렀다.
공교롭게도 큰딸과 그녀는 동갑이다. 법적으로는 어엿한 모녀지간이지만 둘은 나이가 같다. 둘 다 78세이다. 동갑인 두 여자를 모녀지간으로 만든 주인공, 한 여자에게는 남편이요, 또 한 여자에게는 아버지가 되는 바로 그 남자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남자는 100년이라는 한 세기를 꽉 채우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결국, 딸들의 의견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어, 가족사항 맨 윗줄에 올라야 할, 부인 아무개라는 이름은 아예 흔적조차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그야, 큰누나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동생들을 다 공부 시켰고 공부 욕심 없는 자신을 등 떠밀어 박사학위까지 따게 해주었으니 우기지 못했을 것이다.
누나 셋에 막내인 아들은 워낙에 발언권이 없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도 불구하고 무슨 소식이든 간에 항상 맨 꼴찌로 접한다. 똑똑한 세 누나에 치어서 뭐든지 항상 꼴찌다. 그러니… 며느리인 민지는 오죽하겠는가? 하느라고 해도 무시당하는 기분에 발칵발칵 화가 날 때도 많으나 입도 벙긋 못 하고 산다.
모든 일은 ‘아버님의 여자’인 그분이 없을 때 진행이 되었지만 나중에 결과를 알고도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영주권도 없이 그냥 미국으로 굴러 들어와서, 아버님과 결혼함으로 시민권까지 획득하고, 모든 혜택도 받고 있고, 더구나 큰시누로부터는 매달 용돈도 듬뿍듬뿍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버님이 살아계실 때는 그렇게 잘하던 큰시누가 돌아가신 후에는 완전히 돌변을 한 것이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채 1년도 안 됐을 때였다. 하루는 아버님이 결혼 얘기를 꺼냈다. 다른 사람 얘기가 아니라 본인이 결혼을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딸들은 물론, 아들까지도 아주 강력히 반대를 했다.
“지금 도우미 아줌마가 하루 종일 돌봐드리고 있고, 효부 며느리가 가까이 살면서 자주 드나들고 있는데, 뭐가 부족하세요? 그만함 복 많은 줄 아세요.”
효부? 의무에 얽매어 하는 행위도 효부라고 할 수 있을까?
아버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데도 큰딸은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언성까지 높아졌다.
“남들이 알면 뭐라 그러겠어요? 집안 망신이에요. 집안 망신! 자식들 얼굴에 똥칠하고 싶으세요? 그 연세에 결혼은 무슨 결혼이에요?”
그때 아버님은 82세였다.
아버님은 강력했다. 외로워서 못살겠다는 것이다. 혼자 자다가 밤에 죽을까봐 무서워 죽겠다면서 큰 소리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왜 내 나이가 어때서? 나이 많다고 맘도 늙은 줄 아느냐? 내 맘은 아직도 이팔청춘이다. 이팔청춘--- 이팔청춘이라구---”
세 번씩이나 이팔청춘을 외치며 뒷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팔청춘? 이팔이든 팔이든, 그 답은 십육이니 맞는 말이기도 하다. 바로 하나 거꾸로 하나 청춘은 청춘이니까.
민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한번은 아버님 모시고 마켓에 갔었는데, 거기서 웬 여자를 만났다. 아버님 얼굴에 희색이 만연하셨고 그 여자 역시 엷은 홍조를 띠며 표정이 환해졌다. 이팔청춘이 무색하리만치 두 사람은 새파랗게 젊어 있었다.
아버님은 어쩔 수 없었는지 며느리인 민지에게 다 털어놓으면서 너만 알고 있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민지는 상대방의 말은 일단은 다 잘 들어주는 성격이라 아무런 대꾸 없이 “네. 네” 했었다.
82세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버님은 정신도 총명하셨고, 자세도 꼿꼿했으며 얼굴도 70세 못지않게 젊어 보였었다. 눈도 귀도 다 밝았다. 돋보기 없이 신문을 줄줄 읽을 정도였으니··· 더구나 말씀도 잘하시고 매사에 박식하셨다.
장례식에는 그녀가 나타날 것이다. 아무리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이 큰딸이라 하더라도 장례식에 오지 말라는 말까지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타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차라리 안 오면 얼마나 좋을까?
일찌감치 도착한 민지는 깜짝 놀랐다. 입구에서부터 엘에이 꽃집의 꽃이란 꽃은 다 동원한 것처럼 화환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널따란 장례식장 가장자리까지 빈틈없이 화환들이 들어차 있었다.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새까만색의 정장을 한 그들의 모습에는 귀티와 부티가 줄줄 흘렀다. 목에도 귀에도 보석들이 주렁주렁 걸렸다. 장례식이 무슨 상류사회 사교클럽 파티인 줄 아나?
잘나가는 세 딸들의 위력이다. 아마도 큰딸의 영역이 가장 클 것이다. 그녀는 인맥을 아주 잘 관리한다. 명예와 체면에 목숨을 건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체면이 그렇게도 중요한가?’
민지는 속으로 조용히 투덜거렸다.
동생들에 비해 외모도 학벌도 훨씬 뒤떨어지는 올케 민지를 큰시누는 부끄러워한다. 그것도 그녀의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일까?
조의금은 모두 그녀에게 주기로 정해졌었다. 큰딸이 낸 방안이다. 참 잘한 결정, 마땅한 결정이다.
그러나 장례식장 입구에는 “조의금은 정중히 사절합니다.”라는 커다란 팻말이 서 있었다.
장례식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민지는 계속 눈길을 멈추지 않고 ‘제발 오시지 마세요. 오시지 마세요.’하고 입속으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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